하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다산 정약용이 한 말이다. 다산은 신분타파를 위한 급진주의자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파란이 많았다. 지난 날 드라마 이산에서 보이는 다산을 처음부터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낸 것도, 아마 다산의 그런 파란만장한 일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 당시 30세이던 다산은, 화성의 모든 축성과정을 그려내고 감독하는 소임을 맡았다. 화성을 축조할 때 다산은 서양의 서적을 탐독했다. 그 결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축조에 공헌을 하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다산은 대단한 학자요, 과학자였다. 이산에 다산이 처음 등장할 때 성균관 담을 넘는다거나, 망원경 같은 것으로 밖을 관찰하는 등의 행동은 결코 허황된 표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뒤늦게 벼슬길에 오른 장약용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자로 익히 알려진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과 이산 정조와의 만남은 화성(華城)이라는 시대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어냈다. 화성은 정조 일생일대의 커다란 업적이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진주 목사 이제원의 넷째아들로 출생하여, 1783년 회시라는 과거에 3등으로 합격을 하였으니 22살에 급제를 한 셈이다. 그러나 바로 벼슬길에 나선 것은 아니다. 178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벼슬을 받았으니, 이때의 나이는 이미 27세 때였다.

 

최초로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다

 

요즈음 군인들이 도하작전을 할 때면, 강에 배를 연결해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하작전이 다산이 최초로 사용을 하였다고 하면, 틀린 말이라고 할까?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에 보면, 한강을 건널 때 배를 연결해 배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의 배다리인 주교는 1795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산을 다녀올 때 사용하였다.

 

당시 정조 이산은 1,779명의 문무백관, 나인, 호위군사 등과 함께, 779필의 말로 다리를 건넜다. 당시의 주교는 가로 4m, 세로 11m의 목선 나룻배 37척을 연결해 만들었다. 당시 이산의 능행차도에는 궁중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그린 반차도에 상세하게 남아있다.

 

우리 기록문화의 최고봉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이는 63쪽의 반차도(班次圖)는 기록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이 그림들은 김홍도의 지휘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당시 궁중 화원들이 그린 조선 최대의 기록화이다. 반차도를 그대로 재현한 수원 화성문화재의 정조 능행차는 바로 이 반차도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이론만 내세우는 인물들과는 달랐다. 실제로 체험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리를 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당시 서구에서 들어 온 서적은 거의 다 탐독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거중기를 만들고,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아마 지금 이 시대에 백성을 자신만큼 생각하는 정약용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모든 일을 슬기롭게 처리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외에도 탐구가인 다산 정약용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돌아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은, 그러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와 행정가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강한 군주가 되고 싶어 하는 정조의 굳은 의지와, 애민사랑이 응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화성은 정부와 행정, 그리고 학자들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완성을 한 당대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다산, 한강[冽水]가의 삶과 꿈” - 남양주 실학박물관 특별전

 

다산 정약용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두미’ 혹은 ․‘두물머리’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쳐 큰물로 아우러지는 이곳은, 향후 실학의 회합이라는 그의 운명과 이어지고 있었다.

 

다산은 30여년 넘는 서울과 강진 등의 타지 생활에서도, 다산의 마음은 항상 고향에 남아 있었다. 순조 1년인 1801년 강진으로의 유배생활, 기약 없는 해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18년 세월. 다산은 그곳에서 연구와 저술에 열정을 태우면서도, 그는 아득하게 먼 한강만을 그리워했다. 그곳은 부모형제와 처자식이, 그리고 님이 계신 곳이었다.

 

다산은 한강을 열수(洌水)로 불렀다. 1818년 강진에서 돌아온 그는, 한강에 사는 사람임을 자처했다. 그리고 18년을 고향에서 살다가 한강으로 돌아갔다. 다산은 늘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무수히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한강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발견한다. 평생의 고민이자 꿈은 민생을 위한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종합을 통한 부국강병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25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한강을 바라보며 또다시 다산 정약용을 떠올려본다. 한강에서 품었던 다산의 삶과 꿈을.

 

소내[苕川]에서의 생활

 

다산에게 소내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의 그물치기와 낚시는 그의 일상이었고, 집 뒤의 철마산, 운길산과 수종사, 강 너머의 천진암 등은 부친을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어느 때는 벗들과, 때론 홀로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광주부(1872년 지방지도)(위) 와 소내(정선의 《경교명승첩》중에서)(아래)

 

다산은 평소 “나의 정신이나 외모 대부분은 외가에서 받았다”고 밝혔다.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말 한대로 외탁을 한 그 모습은 외증조부인 윤두서(1668∼1715)에서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강진으로 떠나 홀로 생활을 한지 6년, 결혼 30년을 맞은 부인 홍씨에게서 온 치맛자락, 다산은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다시 담는다. 그리고 몇 년 후 이를 자식들에게 전한다. 그것이 바로 ‘하피첩(霞帔帖)’이다. 두 아들에게는 사대부로서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훈계했고, 시집가는 딸에게는 집안의 화락을 기원했으며, 막내딸에게는 위로의 마음을 매화가지에 앉은 새로 담아냈다.

 

1786년(정조 10) 다산이 고향 소내의 풍경에 대해 읊은 12수의 시이다. 이른바 “소천 12경”이다. 25세 때였다. 이후 그는 유배지 강진에서 이 시들을 이성화에게 써 주었다. 고향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이성화를 통해 고향까지 전해지기를 바랐던 것일까?

 

 다산의 외증조부, 윤두서 자화상(좌) 와 다산 정약용(1935년 동아일보 삽화)(우)

 

한강에 돌아와, 후세의 기약

 

18년의 세월, 그것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강진에서 다산의 저술은 경세학의 체계화라는데 특징이 있다. 조선후기의 사회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변법적 개혁론의 전개였다. 그중에서도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의 ‘일표이서一表二書’는 다산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나는 조선 사람이다. 기꺼이 조선의 시를 쓰겠다”고 선언하였다. 또 조선은 중화문화에 부속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고,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체득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 바탕이었다.

 

다산이 그린 매화 그림, 매화병제도(좌) 와  매조도(우)

근대의 길에 대한 모색, 조선학의 발전

 

18년 강진에서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이후 자연 다산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모여들게 했다. 양반 자제뿐만 아니라 강진의 아전과 승려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 다산의 방대한 저작 과정은 제자들과 분업화된 공정을 거쳤다. 이를 ‘다산학茶山學’으로 규정할 수 있다.

 

다산의 거대한 담론은 한강에서 출발하여 거기서 완성되었다. 평생 자신의 학문성과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고 했던 그였다. 하지만 다산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그 꿈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회갑을 넘어 스스로를 ‘사암俟菴’이라 불렀듯이 그는 후세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상서지원록》과 《매씨서평》의 마무리, 다산의 고민

그가 서거한 지 100년 후, 우리는 국권을 상실한 질곡의 역사를 겪고 있었지만, 그의 학문은 조선학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이후 또 80여년이 흘러 탄신 250년을 맞았다. 그가 염원했던 민생과 부국강병은 현재진행형이다. 두 물이 합쳐져 큰물이 되었듯 다산의 거대한 사유를 마음에 담아내야할 때이다.

 

 

매달마다 농가의 모습을 읊은 농가월령가와(위) 수종사 가는 길(아래)

다산의 생

본관 나주羅州, 자는 미용美鏞·송보頌甫, 시호는 문도文度

1762년(영조38) 광주 초부면 마현리(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재원과 해남윤씨의 3남으로 출생

1765년(4세) 천자문을 배움. 2세 때 앓은 천연두로 오른쪽 눈썹이 셋으로 갈라져 흔적이 남게 되어 삼미자三眉子로 불림.

1776년(15세) 관례를 치르고 약용若鏞이라는 관명冠名을 얻음.

호조좌랑 홍화보의 딸 혜완惠婉과 혼인. 서울 남촌으로 이사.

1777년(정조1) 이가환李家煥과 매형 이승훈李承薰을 쫒아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고 사숙.

1779년 형 약전과 성균관 승보시陞補試에 합격.

1783년(22세) 초시와 회시에 합격, 진사가 되어 선정전宣政殿에서 정조를 처음 만남

1784년 두물머리의 배에서 이벽에게 서교西敎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

1789년(정조13) 주교사舟橋司에 배속되어 주교 설치 공사의 규제를 만듬.

1791년 호남에서 천주교도 박해로 진산珍山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와 절교.

1792년(31세) 화성의 설계를 명령받고 거중기를 설계하여 공사비 4만냥 절약.

1794년(정조18)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연천, 파주, 장단 등을 감찰

1800년(39세) 정조 승하로 고향으로 돌아와 초천에서 강학, 여유당與猶堂의 편액을 달음.

1801년(순조1) 신유사옥으로 투옥되었다가 강진으로 유배.

1805년(44세) 백련사에서 혜장惠藏과 교유. 고성사의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이사.

1806년 강진 읍내 이학래李學來 집으로 이사.

1808년(47세) 만덕사 서쪽의 다산茶山으로 이사.

1809년 초의선사와 교유

1818년(순조18)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 마현으로 귀향. 호를 ‘열수洌水’라고 함.

1822년(61세) 회갑을 맞아 스스로 묘지명墓誌銘을 지음. 호를 ‘사암俟菴’이라고 함.

1836년(순조36) 부인 홍씨와 회혼일에 고향 마현에서 별세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다. 또한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조의 정치적 포부가 담긴 곳으로,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 한양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곳이었다.

둘레의 길이 5,744m인 화성은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축성이 되었다. 성내의 시설물로는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현재는 41개 시설물이 남아 있다.



창룡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손이 되었던 것을 복구하였다. 동쪽으로 난 문인 창룡문은 푸를 '창'자를 써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을 보면 옹성 밖의 성벽이 돌출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성문을 지키는 옹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다. '철옹성'이란 말이 생각난다.


동문인 창룡문을 들어서다

수원화성은 규장각의 문신인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1793년에 저술한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하여 축성을 하였다.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을 하였다. 화성 축성 시에는 거중기와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 이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동방을 ‘청(淸)’이라고 하는데, 그 청을 상징하는 것인가 보다. 창룡문은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에 복원하였다. 창룡문은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동문의 옹성은 밖은 벽돌로 쌓고, 안은 화강암으로 이용하여 축성을 했다. 옹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터진 곳 밖에 없다. 성문을 깨트리는 공성무기를 안으로 옮기기도 힘들지만, 성문 앞으로 다가서면 전멸을 하게 된다. 성문은 모두 여러조각의 철퍈으로 덮어 놓았다


창룡문을 들어서면 우선 홍예의 크기에도 놀랍지만, 창룡문서부터 팔달문까지 이어지는 제1저지선이 있다는 것에 더욱 경이롭다. 용머리길이라고 하는 이 외곽의 저지선은 그 자체가 토성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루로 올라본다. 한편을 터놓고 둥글게 문을 감싸고 있는 옹성. 옹성위로도 병사들이 이동을 할 수 있어, 적이 성문으로 접근하는 것을 방비하였다. 성벽 여기저기에는 뜨거운 기름등을 부어 성벽을 타고 흐르게 만들었다. 성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적을 막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문루에 올라가면 옹성위로 난 길을 따라 이동을 할 수가 있다. 옹성 위 여장에는 총혈과 화살을 쏠 수 있는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아래로는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도 있다. 상상만 해도 옹성 안으로 들어온 적이 어떻게 될지가 그려진다.


보물로 지정된 화서문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서문으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이 되었다. 서문인 화서문의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동문인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계단을 꺾어지게 해서 층을 만든 것이 다르다. 화서문을 둘러쌓고 있는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동일하며, 높이는 11척이다.

화서문은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화서문은 정조 19년인 1795년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년 1월 8일에 완성을 하였다, 화서문은 서해안과 남양만 방면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서장대에서 성벽을 떠라 내려오다가 만나게 되는 화서문. 화서문은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보물 403호로 지정이 되었다


화서문의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단 채제공이 썼다고 한다. 동문인 창룡문의 옹성이 벽돌로 쌓은데 비해, 화서문의 옹성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쌓아 올렸다. 문루는 양편으로 출입문을 내었으며, 안에는 마루를 깔았다.

성문, 그 위에 올라서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손실되었다. 파손된 부분을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 그 위 문루에 올라서 난 무엇을 보았을까?



서문인 화서문은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꺾어 놓아 또 다른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화성의 모든 문은 각기 특색있게 꾸며졌다. 성문의 두께도 대단하지만, 겉을 보누 철판으로 마감을 하였다.


화성의 성문들은 자연이다. 사방으로 난 길을 따라 난 성문들은, 그 형태들이 나름대로 특징을 갖고 있다. 네 곳의 문이 다 다른 모습으로 서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자연인양 하다. 주변의 지형에 맞게 꾸며진 사대문. 그것 하나만으로도 화성에 쏟아 부은 정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인 성곽인지 알만하다.



옹성 위로 올라가면 성문에 접근하는 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공성무기조차 사용할 수 없는 화성의 문. 당시 어떻게 이런 구조물을 생각해 낸 것일까?  


사람들은 화성을 돌아보면서 참 잘 쌓은 성이라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만하다는 칭찬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 엄청난 성을 쌓기 위해 수많은 눈물을 이곳에 얼마나 흘린 것일까? 땀과 눈물, 창룡문의 문루 위에서 저 멀리 높게 보이는 서장대를 바라보니, 군사들의 함성과 함께 수많은 민초들의 땀으로 얼룩진 모습이 있다. 끝내 이루진 못한 이산 정조의 눈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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