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 대신면 보통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26호 김영구 가옥은, 조선 영조 29년인 1753년에 지어졌다. 이 김영구 가옥은 현재 거주하고 있는 김영구 옹이 40여년 전에 구입을 하여 살고 있다. 원래는 풍양 조씨들이 살고 있던 집으로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조석우가 지은 집이라고 한다.

김영구 가옥은 세 번째나 방문을 했다. 김영구 가옥은 볼수록 폐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집이다. 마치 철옹성 같다고나 할까?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으로 구성된 본채는 앞에 누마루로 달아 만든 누정이 달린 시랑채가 있고, 사랑채의 서쪽에 붙여 대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길게 ㅡ 자로 늘어선 안채와, 양편에 날개채를 달았다. 안채의 지붕이 높여 날개채와 구분을 한 것도 이집의 재미있는 모습이다.


철저하게 안채 출입이 통제된 가옥

날개채에는 양편 모두 광을 달았고, 서쪽 날개채는 부엌과 연이어져 있다. 동쪽의 날개채의 끝은 일각문과 연결이 되어 사랑채와 연결되고, 서쪽의 대문은 사랑채와 날개채를 연결하고 있다. 결국 두 곳의 문을 통하지 않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50년 전만 해도 마을사람 반도 이 집을 드나들 수가 없었다'는 김영구옹의 설명대로 이 집은 어느 누구도 안채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집이었다. 그만큼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이 되어 있다. 경기지방의 보기 드문 가옥의 구조로 되어있다.

"우리 집은 정승 판서가 22명이나 나온 집이여"

집을 여기저기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집 주인인 김영구옹이 말씀을 하신다.



"여기 이 집은 신문 방송에서 많이 촬영해갔어. 이집에서 정승 판서가 22명이나 나왔거든."
"어르신은 어떻게 이 집에 살게 되셨어요?"
"우리 선대부터 이 마을에 살았는데, 이 집이 판다고 나왔어. 나도 자식들을 키우고 있으니 이집을 사면 아이들이 잘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자녀분들은 다들 잘되셨나요?"
"탈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들 살고 있으니 그 정도면 됐지."

김영구 가옥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과연 이 집에서 정승 판서가 22명이나 나왔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마을중앙에 조금 높게 앉아있는 이 집은, 얼핏 보기에도 명당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김영구옹의 말씀대로 이 집에서 그렇게 많은 정승 판서가 나왔을까? 좀 더 세세하게 이 집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집을 지은 석재나 기둥, 처마 등을 보면 이 집은 지방의 공인이 지은 집이 아니다. 석재는 모두 잘 다듬어져 있다, 계단을 쌓은 석재나 주추로 사용한 석재들이 모두 일반적인 자연석을 주추로 사용을 한 것이 아니다. 잘 다듬어진 석재와 누마루를 놓은 형태. 그리고 처마 등을 살펴보면 한양에서 집을 짓던 경장(京匠) 등을 데려다가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해시계가 왜 여기 있을까?

김영구 가옥의 안채로 들어가면 사랑채 뒤에 붙은 높은 굴뚝이 있다. 그 굴뚝 앞에는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고, 경기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된 해시계가 있다. 별 장식이 없이 화강암으로 만든 이 해시계는 높이 0.76m에, 위 평면의 넓이는 25cm 정도가 된다. 가운데는 깊이 1cm 정도의 구멍 흔적이 있다. 아마 이곳에 나무 같은 것을 꽂아, 태양의 일주운동에 따라 그 그림자로 시간을 쟀을 것이다.

이 해시계에는 명문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읽을 수가 없다. 이 해시계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조선 세종 16년인 1434년 세종의 명에 의해 장영실이 해시계를 만들어, 흠경각에 처음으로 설치를 하였다. 그리고 서울 혜정교와 종묘 앞에도 설치를 했다고 하는데, 이 집에 있는 해시계는 언제 제작된 것일까? 명문이 없어 제작 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아쉽다. 다만 이 집을 지었다는 조석우는 고종 때 판서를 지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해시계도 당시에 이집에 두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랑채에 달아낸 누정이 압권

김영구 가옥의 사랑채 서쪽에는 누정이 붙어있다. 마루로 놓인 이 누정은 김영구 가옥의 모습을 뛰어나게 만든다. 누정은 밑을 잘 다듬은 돌로 주추를 하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다. 정자는 삼면이 모두 들창으로 되어있으며, ㅡ 자로 되어있는 사랑채에서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다.


그 누구도 집안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도록 구조가 되어있다. 대문을 열어놓아도 안을 들여다보기가 힘든 것도 이집의 특징이다. 대문 안은 바로 서쪽날개채의 벽이기 때문이다. 대문을 열어도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날개채의 벽이 바람을 막는 방풍의 역할도 하고 있다. 둘러볼수록 빠져드는 집이다.

김영구 가옥의 또 하나 특징은 바로 작은 사랑채다. 사랑채와 동편 날개채가 붙은 일각문 옆으로 사랑채와 같이 ㅡ 자로 붙어있는 작은 사랑채. 이곳도 방과 마루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 작은 사랑채도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사람들을 접대하기도 하고, 이곳에서 손들이 묵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이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은 사랑채도 일각문을 열어야 안으로 출입을 할 수가 있어, 결국 이집은 밖에서 외부인들이 안으로 들어가기는 쉽지가 않다.



행랑채 앞에 솟을대문이 있었다고 하는 여주 김영구 가옥. 그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또 안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밖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 열린 대문 안을 들여다보면 그 집 하나하나에 참으로 대단한 정성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소를 타고 다녔다는 정승 고불 맹사성. 맹정승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많이 전하는 편이다. 정승 고불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인 1360년에 태어나, 조선조 세종 20년인 1438년에 세상을 떠났다. 려말과 선초에 걸쳐 세상을 살다 간 맹사성은 본관은 신창이며 자는 자명, 호는 고불이다.

많은 벼슬을 거쳐 1427년에는 우의정이 되었으며, 1432년 좌의정을 지내고 난 후 1435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정승 황희와 함께 조선 초 우리 문화를 금자탑을 이룩한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고불 맹사성.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로 명성을 높였으며, 효자로 유명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지기도 했다.


청빈한 삶을 살다간 맹사성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소재한 고불 맹사성의 옛집. 사적 제109호인 '맹씨 고택'은 맹사성이 살던 고려 때 지어진 고택과 더불어 맹사성이 심었나는 수령 600년이 지난 은행나무, 그리고 맹우와 맹희도, 맹사성의 위폐를 모신 세덕사가 있다.

평소 청빈한 삶을 살아 온 맹정승은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면 대문 밖까지 나가 맞아들이고, 언제나 상석에 앉혔으며 손이 떠날 때도 반드시 대분 밖까지 배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하는 ‘쌍행수’

고불의 고택이 있는 곳을 ‘맹씨 행단’이라고 한다. 행단은 은행나무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담으로 양편을 쌓은 쪽문 안에는 <청백리 고불 맹사성 기념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밖으로 돌아 계단을 오르면 맹사성의 유적을 관리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듯, 솟을대문 안으로는 ㄱ 자 형의 집이 있다. 그 집을 바라보고 우측 계단으로 오르면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고물 맹사성이 1380년경에 이곳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이다. 두 그루 은행나무 중 우측의 은행나무는 외과 수술을 한 듯, 나무 가운데에 남성의 성기 같은 시멘트로 바른 죽은 가지가 보인다. 수령 630년이 지난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쌍행수'라고 부르는데, 높이는 35m 둘레는 9m 정도에 이른다. 잎이 떨어져 가지만 남아 있어도 이렇게 위용을 보이고 있으니, 여름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면 대단할 것 같다.

최영장군도 살다 간 680년 역사의 맹씨 고택

은행나무 앞으로 자리하고 있는 고택 한 채. 바로 고불 맹사성이 살았던 고택이다. 이 집은 고려 충숙왕 17년인 1330년에, 최영 장군의 부친인 최원직이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무민공 최영이 살았던 집이다. 최영장군과 고불 맹사성이 살았다는 고택 한 채. 이 집의 내력이 대단하다.

고불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자사위이다. 최초로 지어진 지 680년이나 된 이 고려 때의 고택은, 최영과 맹사성이라는 역사의 일면을 장식한 두 사람이 거처로 정했던 곳이기도 하다. 맹씨 고택은 성종 13년인 1482년, 인조 20년인 1642년, 그리고 순조 때인 1814년과 1929년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집은 '공(工)' 자 형으로 꾸며져 있으며, 27.5평에 불과하지만, 고려 때의 고부재와 창호 등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집이다.




집안 곳곳에 배어 있는 고불의 청렴

두 사람의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 살다 간 고택. 최영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다. 고불 맹사성은 청백리로 소를 타고 다니며 직접 아궁이에 불을 땔 정도로 청렴한 정승이었다. 이렇게 세상의 탐욕과는 거리가 먼 두 분의 마음이 맹씨 고택에는 그대로 배어 있다. 기단은 커다란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주추도 다듬지 않은 덤벙주추를 놓았다. 중앙에는 두 칸의 마루를 놓고, 양편에는 길에 방을 드렸다. 그 방의 끝이 앞뒤로 삐죽이 나와 工 자 형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방은 별다른 꾸밈없이 양편에 길게 들였는데, 뒤편을 막아 각각 윗방을 들였다. 이 집의 아궁이는 별다르게 부엌을 만들지 않고, 앞면 담 밖에 아궁이를 놓았다. 이런 아궁이의 형태는 밑에 사람을 쓰지 않고, 직접 불을 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불 맹정승의 청빈한 삶을 그려 볼 수 있는 것이다.



700년 가까운 세월. 그렇게 청빈한 주인들이 살다 스러져간 고택 한 채. 그 집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요즈음 돈푼께나 있고, 권력께나 가졌다는 자들은 앞을 다투어 고래등같은 집을 짓고 자기자랑을 하고자 할 때, 그저 작은 집 하나로 비바람을 피했다. 그 청빈하고 세상에 찌들지 않은 마음 하나를, 비워놓은 내 마음에 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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