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구는 곡식을 찧는 농기구의 일종이다. 절구 외에도 곡식을 찧는 기구는 방아가 있다. 방아는 연자방아, 통방아, 물레방아 등이 있다. 그 모습들은 저마다 다르고, 이용하는 방법도 다 다르다. 그러나 절구는 쇠절구, 돌절구, 나무절구로 구분을 하지만, 그 형태나 사용하는 방법은 같다.

사실 절구만큼 우리네 실생활과 밀접한 농기구도 그리 흔하지 않다. 절구는 곡식을 찧는 외에도 콩을 삶아 찧어서 메주를 만들거나, 그 외에 여러 가지 식물을 찧을 때도 사용을 했다. 그런 절구통은 예전에는 집집마다 한 두 개씩은 다 있었다. 이 절구를 요즈음은 인테리어를 하는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과거의 절구는 여인들과 가장 가깝게 실생활에 사용이 된 농기구 중 하나이다.


성을 기억해 낼 듯한 우리의 절구


흔히 우리는 나이 먹고 뚱뚱한 사람을 비유할 때 ‘절구통’이라고 표현을 한다. 절구 중에는 ‘통절구’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위아래가 굴곡이 없이 밋밋하게 만들어진 절구를 말한다. 아마도 그런 통절구라면 이런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통절구는 대개 나무절구로, 둥근 나무를 중앙을 둥글고 깊게 파들어 간다.

돌절구나 쇠절구는 아래받침 부분을 잘록하게 만들어, 유한 선을 만들어 낸다. 이 절구는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절구질을 할 때 필요한 홍두깨인 ‘절구공이’이다. 이 절구공이를 갖고 절구통 안에 있는 곡식을 찧으면, 껍질이 벗겨지게 되는 것이다. 절구질을 할 때는 혼자하면 ‘외절구’요, 둘이하면 ‘쌍절구’ 혹은 '맞절구'라고 부른다.


은밀한 성을 노래하는 절구질

사람들은 왜 절구질을 하면서 ‘방아타령’이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방아타령이라는 것이 정말로 방아를 찧으면서 하는 소리이기보다는, 절구질을 하면서 하는 소리이다. 즉 남녀 간의 ‘성(性)’을 표현하는 것인데, 절구질을 하면서 이런 소리를 한다.

쿵덕쿵 쿵덕쿵 찧는 방아 이방아가 뉘방아냐
건너 마을 김서방네 벼를 찧는 방아로다
건너 마을 김서방은 밤이 새도록 찧는다는데
우리네 서방은 어쩌자고 초저녁잠만 늘어가나
 

저기 가는 저 할머니 딸이나 있으면 사위삼소
딸이야 있지마는 나이 어려서 못 삼겠네
아이고어머니 그 말씀마소
참새는 작아도 알만 잘 낳고
제비는 작아도 강남을 가오
고추가 작아도 씨가 많고
가재는 작어도 돌팍만 인다오


민초들의 작업요에는 성적인 요소가 있다.

우리네 소리는 특별한 양식을 따지지 않는다. 그저 일을 하면서 힘든 노동을 잊기 위해 부르는 소리이다. 하기에 이 '방아타령‘이라고 하는 사설은, 방아타령과 여타의 노동요 사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저 힘든 절구질을 하면서, 그 힘든 작업에서 오는 고통을 잊기 위한 소리일 뿐이다. 그런데 그 소리 안에는 성(性)이 있다. 이웃집 남정네는 밤새 방아를 찧는다고 표현한 것이나, 우리 집 서방은 초저녁잠이 많다는 것은 모두 성을 빗댄 표현이다.

뒤이어 나타나는 사설도 마찬가지이다. 나이가 어린 소녀가 아마 시집이라도 가고 싶었는지, 아니면 평소 흠모하는 사내가 있어 마음이 들뜬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니 세상에 작은 것들을 들먹이며, 자신은 능히 성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빗대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곡식을 찧는 기구인 절구. 그저 단순히 농기구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노동을 해야 하는 농기구를 이용해, 우리네 여인들은 많은 소리를 창출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은연중 남녀 간의 성을 빗댄 소리로 전해졌다. 그것은 우리 민초들의 소리문화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것 하나를 갖고도,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우리네의 풍속이었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나름 정해진 바가 있다. 좋은 집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칭찬을 하지만, 잘못된 것은 아낌없이 파헤친다는 생각이다. 이는 고택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재에 동일하게 적용시키는 나만의 답사 방법이기도 하다.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는 고택을 100채 이상을 돌아보았다. 그 중에는 정말 살고 싶은 집이 한두 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역시 이번 답사 길에 만난 함양군의 일두 정여창의 고택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인 이 고택의 사랑채는 미적 감각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다. 안주인의 위엄을 보이게 구성을 한 안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집에는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 좋다. 이 집의 주인과 같은 분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닐는지.



45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고택

우선 이집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일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집의 구성은 길에서 들어가면 만나는 솟을대문 위로 홍살문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5개의 효자와 충신의 정려패가 문 위에 걸려있어, 이 집의 범상치 않은 내력을 알게 한다.

집의 구성은 대문과 사랑채, 행랑채, 안사랑채, 중문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으로 꾸며져 있다. 조선 오현 중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의 고택으로, 정작 이 집은 선생의 사후인 선조 무렵인 1570년대에 지어진 집이다. 정여창 고택의 특징은 당시의 집의 구조뿐만 아니라 세간까지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깔아진 돌과 솟을 대문(가운데) 그리고 효자와 충신의 정려(아래)

뛰어난 사랑채의 멋스러움

골목길을 들어서면서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골목길의 바닥을 돌로 깔아 운치를 더했다. 이 돌길은 새롭게 조성한 것이 아니고 집을 처음 지을 때부터 놓여있었다고 하니, 당시에도 이 집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광채와 중문의 담으로 연결이 된 사랑채가 보인다.

장대석을 3단으로 놓고 그 위에 자리한 사랑채. 정말로 눈이 부시다고 해야 할까? 사랑채 하나만 갖고도 하루 종일 글을 써도 부족할 듯하다. ㄱ자로 꺾인 부분에 개방된 마루를 놓아 정자로 만들고, 그 밑은 물건을 넣어둘 수 있는 광으로 구성을 하였다. 대문채와 광채에도 이런 물건을 둘만한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채의 밑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은 아랫사람들의 동선구성을 신경을 썼다는 뜻이다.



사랑채는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놓았다. 꺾인부분은 판벽으로 마감을 하고 앞을 개방해
정자와 같은 기능을 갖는다(가운데), 개방마루 밑은 물건을 넣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사랑채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담 너머로 사랑채를 보니 커다란 노송과 어우러지는 광경이 그대로 그림이다. 어찌 이런 사랑채를 꾸밀 수가 있었을까? 모든 것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것일까?

안주인의 위엄을 보이는 안채의 구성

사랑채와 중문을 사이로 구별이 되는 안채는, 정여창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100년이 지난 후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다. 350년의 세월이 지난 안채는, 앞으로는 중문채를 놓고 우측으로는 아래채, 좌측으로는 사랑채의 뒤가 막고 있어 튼 ㅁ 자로 구성하였다. 사랑채의 대청은 집안의 대소사를 마련할 수 있도록 넓게 구성이 되었으며, 오른편에는 며느리의 방을 따로 마련한 것도 이 안채의 특징이다.

안채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적으로 안주인이 맡아서 할 수 있도록 집안의 동선을 꾸며 놓았다. 심지어는 결혼을 한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남자는 뜰아래채로 내려가 생활을 하게 하였다고 하니 이 집의 엄한 가풍을 알만하다.



안채와 뜰아래채(위), 중문채(가운데)와 안채의 정원

아랫사람을 생각한 집 구조와 동선

정여창 고택의 백미는 역시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집주인의 배려가 곳곳에 묻어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집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아랫사람을 생각하고 집을 지은 것은 볼 수가 없었다. 왜 오현 중의 한 분으로 선생을 꼽았는지를 알 수 있다. 안채 앞뜰 우물곁에는 절구를 땅 속에 묻어놓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안채에서 여자들이 절구질을 할 때, 땅에 묻힌 절구가 힘을 덜 들이고도 작업을 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환기를 시키는 까치구멍 대신 벽에 창문을 내었다. 까치구멍은 사시사철 공간이 열려있어, 한 겨울이 되면 바람이 심하게 들어와 춥다. 하지만 까치구멍이 있어야 할 곳에 창문을 내어 열고 닫음으로써,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배려의 마음이다.


땅속에 파묻어 힘이 덜 들도록 한 절구(위)와 까치구멍 대신 창을 내어 추위를 막았다(아래)

정여창 고택만이 갖고 있는 마루측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중문채 밖으로는 사랑채의 뜰로 나가는 공간이 있다. 곳간을 두고 일각문으로 향하는데, 중문채 뒤편에 마루가 보인다. 그런데 그 마루의 한편이 판벽으로 막혀있다. 무엇인가 하여 다가가 보았더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판벽 안으로는 소의 여물통을 이용해 소변을 볼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중문채는 집안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그러다보면 제 시간에 소변조차 마음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준 마루측간. 이것이 바로 윗사람의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닐까? 정여창 고택을 최고의 집으로 꼽는 데는 한 치의 주저함도 필요치가 않았다. 어디 이런 윗분 없을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분 같은데.


일각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중문채의 바깥 툇마루가 있다.(위) 그 우측이 바로 마루측간이 있는 곳이다.
소의 여물통을 이용한 마루측간. 정여창 고택의 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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