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팔달구 지동 창룡문로 56번길. 집 대문 앞에는 경기안택굿보존회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안택굿은 집안의 안녕을 위해서 하는 축원굿으로, 이 집에는 4대째 대물림을 하면서 경기지역의 안택굿을 보존, 전승시키고 있는 고성주(, 60) 회장의 집이다. 23일 오후 집안에 북적인다.

 

한편에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튀기고 있고, 집 안에서는 연신 덩이진 밀가루를 손으로 곱게 부수고 있다. 28일은 고성주 회장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들과 수양부리(자신을 따르는 신도를 일컫는다)들을 위해 맞이굿을 하는 날이다. ‘진적굿이라고도 하는 맞이굿은 신령을 섬기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굿이기도 하다.

 

 

자신을 비롯해 10여 명의 사람들이 준비를 하고 있는 약과와 다식은 바로 맞이굿을 할 때 상에 진설할 음식 중 하나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편하게 모두 사다가 사용을 하지만, 이 집은 40년이 넘는 세월을 한 번도 사다가 진설한 적이 없다. 직접 모든 음식을 조리를 하기 때문에 짧게는 5, 길게는 1주일 전부터 준비를 한다.

 

정성이 깃들지 않으면 음식 올릴 필요 없어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신령님들이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는지를 모르는 것 같아요. 적어도 나를 주관하고 내 수양부리들을 잘 살게 만들어주는 신게 제물을 드린다고 하면서 약과나 다식도 다 사다가 쓴다면 무슨 정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 되겠어요. 저희는 40년 동안 한 번도 사다가 올린 적이 없습니다.”

 

 

23일 오후 내내 정성을 들인 약과와 다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 힘이 들겠지만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약과와 다식 등은 맞이굿을 마치고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싸들고 간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먹을 음식이기 때문에 더 정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방식 그대로 만드는 약과와 다식

 

약과는 조청, 계란노른자, 생강가루, 찹쌀, 들기름 등을 잘 반죽해 둥그렇게 누른 다음에 적당한 크기로 잘라 가운데 칼집을 내고 그 안으로 양편을 집어넣어 모양을 만든다. 그리고 기름에 튀겨내면 다시 조청에 담가 잘 젖게 만든다. 채로 걸러내면 달라붙지 않게 고물을 뿌려서 말린다.

 

 

다식은 콩가루와 쌀가루, 조청 등을 혼합해 가루를 잘게 부순다. 가루가 곱게 부수어질수록 다신이 깨끗하게 만들어진다는 것. 거기다가 식용색소를 포함하여 색을 낸 다음에 다식판에 반죽을 둥글게 만들어 놓은 다음 손으로 힘을 다해 누른다. 다식판에 참기름 칠을 한 다음에 찍어내면 아름다운 문양이 있는 다식이 된다.

 

저희는 다식을 다섯가지 색으로 만들어요.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을 뜻하는 것이죠. 많은 재료를 이용하지만 그 중 어느 것 하나 재료를 싼 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음식을 만들어야 나중에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건강에도 좋으니까요.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내는 약과와 디식은 사람들도 좋아하죠.”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 요즈음은 기계로 쉽게 만들 수가 있지만, 음식을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년 봄, 가을로 올리는 맞이굿에 진설하는 음식은 모두가 직접 만든다고 한다.

 

 

저희 고성주회장님은 아직 한 번도 음식을 사서 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아무리 힘이 들아도 정성을 올리는 음식을 사서 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맞이를 올릴 때는 보통 일주일 전부터 준비를 하죠. 맞이굿을 하는 날은 300명 정도의 음식 장만을 직접 하세요. 김치 담그고 나물 무치고, 전도 이틀 전부터 부치고요. 모든 음식은 집에서 직접 장만을 합니다. 그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예의라는 것이죠.”

 

아직 한 번도 사서 쓰는 음식을 신을 모시는 전안에 진설하거나 손님들의 상에 올려보지 않았다고 하는 고성주 회장. 전통방밥으로 만든 약과와 다식을 만들면서도 연신 잘 만들어야 한다고 독려를 한다. 정성을 들인 음식을 먹고 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 집의 축제준비는 늘 웃음이 넘친다.

 

요즈음 우리는 각처에서 열리는 많은 행사를 보면서 지역적 특성이 강한 우리 것이 너무나 홀대를 받는 것은 아닌가 염려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문화는 백리부동풍(百里不同風)’이라고 하여서 그 지역마다 각기 다른 풍속과 문화예술을 지니고 있다. 즉 살아가는 방법과 주위환경, 그리고 역사적, 시대적 배경을 민속 창출의 요인으로 삼아 각 처마다 다른 형태의 풍속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기에 우리는 적어도 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사람들이 딴 곳으로 이주를 하면, 3대 정도를 지나야 그 곳의 풍습을 익히고 그 지역의 토착 풍속과 동화된다고 한다. 그 예로 판소리의 경우 전라도 사람의 성음이 틀리고, 경상도 사람의 성음이 틀리다. 또한 경기도 사람의 성음이 달라 각기 그 지역 나름의 창제(唱制)를 갖고 있다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각 지역마다 환경에 따른 문화가 창출돼

 

풍물을 보더라도 기 지역에 따라 각기 처해진 바대로 다른 음악성향을 띠우고 있어 우리는 웃다리농악, 호남좌도농악, 우도농악, 삼천포농악(영남) 등 지역의 다른 색을 보이고 있는 농악을 볼 수가 있다. 춤 또한 지역적으로 각기 특색 있는 춤의 형태가 있고,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태가 다르다고 표현을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는 문화를 지켜가야 할 사람들의 문화를 망치는 행위를 보거나, 우리 것인지 남의 것인지, 우리 지역 것인지 남의 마을 것인지, 있었는지 만들어졌는지. 구분도 되지 않는 그러한 것들을 너무나 흔히 접할 수가 있다. 전통예술은 그 지역에서 함께 그 행위를 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정서가 그 안에 송두리째 담겨있는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다고 볼 수있다.

 

 

그런대도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지역의 정서가 사라진 전통예술이 마치 그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었거나, 혹은 전혀 다른 정서인데도 불구하고 그 지역의 것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 없이 오랜 시간동안 그 지역에 전해지면서 자연적이고 순차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그 지역민의 정서를 내포하고 있는 아름다운 전통예술이야말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지역적 특성이 사라진 전통은 자긍심을 죽이는 행위

 

그러나 우리의 정서도 없고, 그 지역적 사고도 없는 예술은 이미 전통이 아니다. 더욱 그런 것들 - 지역적 정서도 없고, 특성도 없으며, 현대적 냄새가 나는 그러한 것들 - 은 더 이상은 우리가 방관을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없애고 민족적 자긍심을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어찌 보면 매국적 행위라고 볼수도 있다. 민족적 자긍심을 죽이는 행위는 그 자체가 바로 망국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미 일제에 의해서 문화말살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수 없이 많은 전통문화예술이 훼파되고, 얼마 남지 않은 부분을 지켜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이즈음의 현실이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묻기를 원한다. 관리를 하는 행정부서의 담당자는 우리 것에 대해서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는지. 문화를 지켜가야 할 당사자들은 그 지역적 사고를 지닌 예술적 행위를 하고 있으며, 양심을 속이는 일은 없는지. 타 지역의 정서를 갖고 있으면서도 가장 그 지역사람인체 하고, 나 몰라라 하는 행위는 하지 않고 있는지.

 

전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통인체 가면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것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으면서도 우리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 것인 양 탈을 쓰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내리시길 바란다. 그리고 더 이상은 우리의 정서가 내포되어 있지 않고, 지역의 특성이 없는 그러한 국적불명, 지역불명의 문화를 내세우는 행위는 삼가 하기를 바란다. 그 길만이 스스로가 이 나라 사람임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색동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흔히 삭전(索戰)’이라고 해서 정월 대보름을 기해 마을과 마을이 서로 힘겨룸을 하는 대동의 놀이이다. <동국세시기>에는 충청도 풍속이 거전(炬戰)이라는 횃불싸움이 있다. 또 편을 갈라 줄을 서로 잡아당긴다. 그래서 끌려가지 않는 편이 이기는 것으로 풍년을 차지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줄다리기가 행해졌다. 지역마다 줄의 형태나 줄의 처리방법, 줄다리기가 갖고 있는 내적사고는 다르다고 해도, 하나의 공통적인 습속은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거나 줄은 액막이의 상징으로 줄을 다리고 난 뒤 그것을 잘라 대문 앞에 걸어놓거나, 줄을 마을 입구에 놓으면 액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등의 사고를 갖고 있다.

 

 

줄의 효능과 처리방법

 

우리 민족은 짚으로 꼬아 만든 줄이라는 조형물에 대해 깊은 뜻을 내재하여 왔다. 짚으로 꼬아 만든 줄은 왼새끼로 꼬아 대문에 걸어두면 금줄이 된다. 집안에 큰 일이 있거나 산모가 있을 때도 이 줄을 늘여 잡인의 접근을 막았다. 또한 장을 담가도 줄을 둘러 액을 막았다. 이렇게 우리민족과 짚으로 꼬아 만든 줄은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정월 보름을 맞이하기 전에 사람들은 짚을 준비하고 줄을 꼬기 시작한다. 줄의 형태는 암줄과 수줄을 만드는데, 이것은 남녀를 상징한다. 줄다리기를 할 때는 암수줄이 한데 엉키게 되며 이를 비녀라고 하는 장목으로 고정시킨다. 줄의 용두를 만들 때는 암줄은 넓게 하고 수줄은 좁게 하여, 암줄의 용두에 수줄의 용두가 들어가게 만든다.

 

이러한 줄의 결합상태가 주는 내적사고는 바로 다산과 풍농이다. 남녀가 결합을 해서 다산을 기원하고, 짚으로 만든 줄을 결합시킴으로써 풍농을 구가하는 것이다. 줄을 당기는 이유는 마을마다 다르다. 그 마을이 처해있는 환경이나 지리적인 여건 등에 따라 내적 사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여자 쪽이 이기면 3년간 풍년이 들고 마을전체가 평안하게 살아간다.’(성남 판교)

승자는 공동으로 이용해 보를 막기 때문에 풍년이 든다’(안양)

강물이 풀려 액송기를 꽂은 줄이 떠내려가면 모든 재앙과 액운이 소멸된다’(여주 흔암리)

 

이렇게 지역마다 줄을 다리고 난 뒤에 마을에 전하는 속설이 차이가 난다. 그것은 그 마을이 처해있는 환경에 따라 적당한 속설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큰말 일원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줄다리기를 해왔다.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그 유래가 아주 오래인 것으로 전해진다.

 

9일 오후 고색동 줄달리기 이루어져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행해졌으나, 요즈음은 보름 전후의 날을 잡아 일요일에 줄을 당긴다. 고색동 줄다리기는 1900년대만 해도 근동 30여 개 마을에서 풍장패를 끌고 나와 참여를 하는 큰 줄다리기였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 때는 줄을 다리지 못하자 마을에 흉사가 끼고 평안하지가 않아, 몰래 줄을 다리고는 했다고 한다.

 

 

1987년까지도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연이어져 왔다, 그 후 줄이 불에 타서 소실이 되고 마을이 급격히 도시화하면서 줄다리기가 중단이 되었다가, 고색동 청년회가 전통문화의 승계를 위해 1995년 줄을 새로 제작하고 복원하여 보름을 전후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고색동 줄다리기는 마을에 있는 당집에서 당고사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9일 아침 10시 수원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고색동 당집에서 풍물패들이 먼저 당고사를 올린다. 그리고 길놀이를 하면서 당주네 집으로 몰려간다. 당주네 집에 도착하면 마당놀이를 하는데, 이때는 근동의 풍물패(화성시)들도 함께 와 풍물을 주고받는다.

 

암줄이 이겨야 마을이 안과태평해

 

예전 같으면 당주집에서 마당놀이를 하고나면 바로 줄을 메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길놀이를 하겠지만, 지금은 중간에 문화행사 등 많은 행사가 이루어진다. 마을잔치로 하다 보니 더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오후 2시가 되어서 줄다리기가 시작이 되었는데, 여자와 아이들은 암줄을 남자들은 수줄을 잡고 다린다.

 

 

줄 위에는 각각 남장과 여장을 한 편장이 타게 되고, 편장의 지시에 의해 줄을 밀고 당긴다. 양편의 줄이 합해지면 수줄의 용두를 암줄에 밀어 넣고 빠지지 않게 장목으로 비녀를 끼운다. 징소리에 맞추어 세 번을 다리게 되는데, 암줄이 이겨야 마을에 풍년이 들고 마을이 평안하다고 한다.

 

풍물패의 빠른 가락에 이어 사람들의 함성소리. 그리고 줄을 당기는 사람들의 고함소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마을이 떠나갈 듯한 고색동 줄다리기 한 판. 줄다리기는 그 내재되어 있는 사고 외에도 겨우내 침체되었던 몸을 줄다리기를 하면서 기운을 써 몸을 푸는 효과도 가져오는 전승놀이이다. 그렇게 마음껏 소리치고 힘을 쓰면서 일 년의 안과태평을 빌었으니 마을이 편안할 수밖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동영상 조회 수가 1억 회를 돌파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 세계는 지금 K-POP의 열풍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놓고 연일 기사화하기에 바쁘다. 물론 이런 현상을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거기다가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의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런 한국인들의 예능적 기질은, 사실 알고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기인한다. 그동안 우리들의 예능적 기질은 전· 현대를 막론하고, 세계적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만 지금도 그렇지만 일부의 소수사람들만 집중적으로 떠들어대는, 우리나라의 언론이나 포털이 문제였을 뿐이다.

 

걸그룹 소녀시대(사진은 한국어 위키백과 사전) 

 

우리민족은 원래 놀던 민족

 

우리의 문화에 대한 역사를 좀 논해보자. 삼한시대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은 모두 한 마디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는 무대였다. 사람들은 3일 밤낮을 먹고 마시며, 춤추고 노래헸다. 그런 우리민족의 오랜 관습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들은 뛰어난 예능적 자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봄과 가을에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을 베풀었다. 봄이면 일 년 농사의 풍농을 기원했고, 가을이면 풍년이 들었음을 고마워했다. 그런 마당에서 그들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면 즐겼다. 한 마디로 종합적인 예능이 이루어낸 무대였다는 점이다. 이런 점이 서구문화와 차별화된 예능이다.

 

서구문화가 한 가지에 집약되어 발전을 했다면, 우리문화는 종합적인 문화였다. 그들은 서로 즐기면서 ‘답지저앙(踏地低昻)’하면서 ‘수족상응(手足相應)’했다. 서로 땅을 밟으면 춤을 추는데 손과 발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억지 같지만 바로 지금 우리네 아이돌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 과거 담지저앙하고 수족상응의 형태를 그대로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싸이 강남스타일 중(사진출처  YG엔터테인먼트)

 

숨어있던 끼가 발산이 된 셈

 

지난 날 우리는 소리 잘하고, 춤 잘 추는 사람들을 보고, ‘쟁이.라고 부르며 비하해 왔다. 그런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마지못해 소리를 해왔지만, 최근까지도 숨기고 다였다. 한 마디로 후손들에게 해가 갈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자식들이 그런 것을 한다고 하면, 부모님들은 펄펄뛰면서 난리를 쳤다.

 

그 당시 어르신들은 노래하고 춤추면, 그것이 가문에 먹칠을 한다고 생각했다.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룰이 깨지고 나자, 봇물 터지듯 숨겨오던 끼가 터져 나온 것이다. 한 마디로 어린 아이돌들이 어른들도 하기 어려운 것을 깨버린 것이다. 그들은 마음껏 자신의 잠자고 있던 기능을 살려냈고, 그것은 곧 한 가지분야에 치중하던 외국인들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미지의 세계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들이 광분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노래를 하면서 춤까지 격정적으로 추는 것을 본 적이 없기에. 거기다가 적당한 랩까지 곁들이는 아이돌의 무대는 충분히 관객을 사로잡을 만했다. 판소리를 보자. 판소리의 3대 요소는 바로 소리인 창과 아니리, 그리고 너름새라고 하는 발림이다.

 

걸그룹 카라(사진출처 / 뉴데일리)

 

창은 당연히 소리이다. 아니리는 소리를 하는 도중에 말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창과 아니리로 부족한 것은, 발림이라는 행동으로 보충한다. 이러한 상황 극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판소리이다. 이런 대단한 놀던 민족이 바로 우리민족이다. 앞으로 우리는 얼마나 더 큰 사고를 칠지 모른다.

 

어차피 깔아놓은 멍석이며, 펼친 판이다. 좀 더 발전을 시키고 과거 속의 사고까지 곁들인다면 우리들의 시장은 세계 곳곳을 누빌 수가 있다. 전 세계를 한국문화권으로 묶을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날을 기다려보자.

고성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마지막 큰 만신이다. 스스로를 ‘만신’이라고 자처하는 고성주는, 4대 째 경기도 굿제를 이어오고 있다. 그 중 고성주를 비롯한 3대가 독자적인 가계로 이어진다. 중간에 고성주에게 내림굿을 주관한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를 빼고도, 조모 - 고모 - 고성주로 이어지는 순수한 무가(巫家)의 집안이다.

 

물론 그 윗대의 만신들과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굿거리의 절차는 항상 대물림을 하면서 신의 세계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가계의 전승은 무형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는 가장 큰 자산으로 본다.

 

 

어려서부터 익힌 춤과 노래솜씨 뛰어나

 

“저는 만 18세가 되던 해 내림을 받았어요. 어려서부터 수원에서 살았는데, 몸이 아파 이천으로 다시 내려가 살았어요. 그러다가 다시 수원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학교생활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죠. 일 년이면 한 두어 달만 괜찮고 나머지는 골골했죠. 그러다가 화성재인청 이동안 선생님께 가서 재인청 춤과 소리 등을 배우면서 몸이 좀 좋아졌어요. 당시는 저를 보고 초립동이라고 불렀죠.”

 

어려서부터 기구한 삶을 살았다. 몸이 마르고 며칠씩 물 한 모금 먹지 않다가도, 또 먹을 때는 엄청 먹어 치웠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해 주변에 눈총을 산 일도 허다했단다.

 

“내림을 받고나서 이천 대월면 송라리 뒷산을 대명산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가서 탱화하고 놋쇠그릇, 관음보살, 대감항아리, 책 두 권을 가져왔어요. 예전에는 가족들이 그곳에서 살았다고 해요.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시지만, 제 뿌리가 그곳인가 봐요.”

 

 

고성주는 요즈음의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내림을 받고나서 문서를 익히고 재주를 익히는데 한 10년은 실히 걸린 것 같다고 한다. 경기도 안택굿은 적어도 그 정도의 학습기간을 잡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처럼 몇 달 뚱땅거리다가 나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10년 세월은 배워야 안택굿의 장단 가락, 징, 춤사위, 거성, 노래, 사설 등을 익힐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저는 사람들에게 점을 신을 모시기 전부터 보아 주었어요. 괜히 지나는 사람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하고요.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 어머니 집에 와서 있었는데, 어머니가 굿을 하러 가면 사람들을 보고 얼마를 가져오라고 했으니까요. 한 3년 신어머니 집에서 음식 하는 법 등을 배웠는데, 당시는 머슴살이를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손님들이 오면 점을 보아주고 굿을 떼고는 했죠. 그러다가 한 3년 뒤에 최씨 어머니가 전대자루 하나를 만들어 주면서 나가서 시주를 해오라고 하데요. 그래서 인계동서부터 매교동 일대까지 3개월을 다녀서, 돈 67원하고 쌀 두말 조금 넘게 걷었어요. 그래서 내림을 했죠. 굿을 처음 한 것은 내리면서 바로 굿을 했어요. 수원 큰 만신들이 굿판에 데리고 다니는 바람에 빨리 배웠죠.”

 

첫 굿판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처음 굿판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난리를 쳤단다. 당시에는 밤을 새워 굿을 했는데, 사람들이 춤 잘 추고 소리 잘하는 애기만신이 나왔다고 자리를 뜨질 않았다는 것. 경기도 안택굿에 어떤 특징이 있느냐는 질문에 깊은 한 숨을 쉬기도 했다.

 

“경기안택굿은 굿 속에서 마음에 닿는 느낌이 있어요. 사람들을 울리고 웃고, 함께 춤을 추는 그런 굿이에요. 예술적이면서도 신성이 함유된 굿이고요. 특히 굿판에서 세상사는 방법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굿이죠. 한 마디로 살아있는 굿이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일부 사람들은 경기도 안택굿이 서울굿과 비슷하다고 말들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예요.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한양 성내에서 굿을 할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서울에 안택굿이 있을 수가 있었겠어요. 수원을 비롯해 안산, 시흥, 화성, 용인 등지에서 큰 만신들이 많이 나왔던 것을 보아도 경기도 안택굿이 본류라고 보아야 하죠.”

 

선대의 신어머니에게서 학습을 할 때는 주로 어떤 것을 배우게 되었는냐고 묻자, 옷 개는 법, 굿의 순서대로 무복을 착용하는 법, 상 차리는 법, 상 차리는데 필요한 음식, 떡, 과일, 전, 사탕, 밤, 대추, 나물, 적 등을 어디에 차려야 하는지 까지를 다 배운단다. 그리고 나면 바라, 징, 장고 치는 법 등을 익히고. 그 후에는 덕담과 사설, 소리 등을 배워야 한다는 것.

 

 

경기도 굿은 독창적인 지역의 굿이다

 

“경기도 안택굿은 사설이 많아서 어떻게 소리를 해야 잘 할 수 있을까 등도 배웁니다. 거기다가 사람들을 만날 때 해야 하는 예의범절 등까지 배우게 되죠. 그래야 전통 안택굿의 맥을 이어갈 수가 있는 것이죠. 학습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다 허사입니다.”

 

제자들을 배출한 것은 자신이 학습을 하고 난 뒤 10년 정도가 지나서부터 가르쳤단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학습도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고.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선대에게서 배운 학습을 복습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는 것. 요즈음 많은 무속인들이 남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애가 타기도 한단다. 내가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먼저 배워야하는데, 요즈음은 그저 자신도 잘 모르면서 남을 가르친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위험하단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동안 굿을 배운 제자들이 한 120명 장도는 될 거예요. 현재는 18명 정도가 배우고 있어요. 그런데 제자들이 배우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마음이 아파요. 어렵기는 하지만 끝까지 가지 못하고 배우다가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만큼 경기전통 안택굿은 배우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배우겠다고 오는 사람은 가르쳐 주어야죠.”

 

굿판에 들어서긴 했지만, 그렇게 순탄하게 굿을 한 것은 아니다. 제가 집에 굿을 하러 가면 큰 만신들이 안당제석을 하라고 한 후, 굿을 마치고나면 느낌이 없다고 굿을 다시 하라고 한다는 것. 그럴 때면 창피하기도 하고 정말 그만두고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속으로는 울면서 굿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다.

 

“그 때 선생님들은 신복 접는 법을 한번 알려주고, 그걸 따라하라고 해요. 못하면 바로 지청구를 받게 되죠. 정말 힘들게 굿을 배웠어요. 그리고 그렇게 배운 굿이기에 지금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들이 워낙 험하게 다루셨으니 까요. 자존심도 버리고 살아 온 세월이죠.”

 

 

 

8세에 내림굿을 받은 고성주의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는, 고성주의 친고모인 제주 고씨의 신딸이다. 또한 제주 고씨는 당대에 명성을 날린 남양 홍씨를 신어머니로 모셨다. 남양 홍씨는 고성주의 증조모이자, 제주 고씨의 친정어머니이다. 하기에 고성주의 신의 계보는 남양 홍씨 - 제주 고씨 - 경주 최씨 - 고성주로 이어진다. 이들 굿의 세계는 근 100년 이상을 경기도굿을 본바탕으로 이어오고 있는 무가(巫家)의 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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