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제355호인 전주 삼천동의 곰솔. 이 소나무는 볼 때마다 가슴이 갈래갈래 찢기는 것 같다. 몇 년 전인가 이 곰솔을 보고 멍하니 그 자리에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 농약으로 곰솔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살려놓은 곰솔은, 한편으로만 자라나는 기형의 나무가 되었다.

곰솔은 껍질이 흑갈색이다. 곰솔은 그 분포지가 바닷가이기 때문에 ‘해송’이라고도 부르고, 껍질이 검다고 하여 ‘흑송’이라고도 부른다. 전주 삼천동의 곰솔은 내륙에서 서식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모양이 특이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소중한 식물자원이다.

현재 삼천동의 곰솔은 높이는 12m 정도에, 가슴높이의 둘레가 10m 가까이 될 정도의 큰 소나무다. 한창 생육이 좋을 때 동서의 길이가 34.5m, 남북의 길이가 29m에 이르는 아름다운 나무였다.



인동 장씨 선산의 경계표지목

이 곰솔은 서 있던 자리는 원래 인동 장씨 장령공파의 선산이었다. 장씨들이 전주에 내려와 자리를 잡으면서 선산의 조경수로 심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곰솔의 수령은 270년 가까이 된 것으로 추정하며, 아래에서 보면 하나의 줄기가 위로 올라가는 듯하다. 높이 2m 정도부터 수평으로 가지가 펼쳐져, 마치 한 마리의 학이 땅을 차고 날아가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2001년도인가 누군가 이 나무에 독극물을 주입하여 ⅔ 정도의 가지가 죽어, 마치 한편으로만 자라난 것처럼 보인다. 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안타깝다. 어떻게 저 아름다운 나무를 독극물로 죽일 생각을 한 것일까? 일을 마치고 불현 듯 생각이 나서 찾아간 삼천동 곰솔. 해가 넘어갈 시간에 석양을 받은 곰솔의 모습은 신비롭기만 하다.




독극물에 의해 한편이 죽어버린 곰솔. 이제는 가지가 늘어져 땅에 닿을 듯하다.
 
그래도 살아남은 끈질긴 생명력

중간부분과 한편을 뭉텅 잘라낸 곰솔. 그 상처의 흔적이 애처롭기만 하다. 만일 저 가지가 저렇게 잘라내지만 않았다고 한다면, 그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직도 주변에 남아있는 가지를 받치고 있던 기둥을 보면 그 모습이 그려진다. 저렇게 옆으로 실하게 자라나던 곰솔이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면서, 스스로 나무의 제왕처럼 자태를 자랑했을 것이다.

잘려나간 흔적은 차마 바라다보기가 민망하다. 인간들의 모자람이 이렇게 아름다운 곰솔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두세 가지가 한편으로 자라나간 모습이 괴이하기까지 하다. 밑동은 저리도 거북등처럼 갈라져 그 세월의 흔적을 보이고 있건만, 한번 죽은 가지는 소생할 기미조차 없다.

나무가지를 받쳤던 기둥을 보는 것도 아픔이다. 
안타깝게 살아남기 위해 잘려나간 가지들의 흔적

누가 말했던가? 세상의 모든 것은 돌고 도는 것이라고. 그러나 삼천동 곰솔은 겨우 살아남은 가지만을 뻗고 있을 뿐이다. 몇 년 전보다 가지가 많이 자란 듯하다. 가지 끝이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걱정이 앞선다. 괜찮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가지만 늘어져도 걱정이다.

잘려나간 가지의 끝을 보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그 곁에 가지를 받치고 있던 기둥은 왜 방치를 하는 것일까? 그렇게 큰 나무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좋지만, 그런 아픔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 또한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거늘. 몇 년 만에 만나 본 천연기념물인 삼천동 곰솔. 그때나 지금이나 가슴이 미어지기는 매한가지이다.

그제인가. 아침에 사무실 근처 우체국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우체국 주변에 모여 있는 여성분들을 보았다. 이곳은 특별한 사무실도 보이지 않는데, 이른 시간부터 여자들이 많이 모여 있고는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력시장이라는 것이다. 이른 시간부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그만큼 일자리를 찾기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니 50~6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가끔은 70대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얼마나 일찍 이곳을 찾는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여 어제 이른 5시에 다시 나가보았다. 이른 시간인 새벽 5시인데 사람들이 모여든다. 남들보다 일찍 나와야 이른 시간에 인력을 찾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오늘(9, 29) 새벽 5시에 나가보았다. 벌써 일자리를 찾아 나와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점점 일자리가 줄어드네요.”

이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대개 8시가 넘으면 자리를 뜨지만, 그중에는 9시가 넘어서 까지도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도 있다. 하루를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기에,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혹 뒤늦게 찾는 사람들이 있을까 보아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가 보다.

아침 일찍 이곳에 나와 일자리를 찾는 여인들. 생활이 넉넉지 않으니 그나마 하루하루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나오는가 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시간을 보내며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혼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힘없는 발길로 집을 향하는 사람들도 있다.

몇 날을 그렇게 보았지만, 매번 일자리가 나타나지는 않는 것만 같다. 9시가 다 되도록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그날의 일자리를 기다리는 여인들. 말이 인력시장이라고 하나, 마땅히 모여앉아 있을 공간도 없이 길가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 나오신지 오래되셨어요?”
“아침 5시 반이면 나오니까. 꽤 시간이 되었네요. 오늘도 일자리가 없네요. 들어가야지”
“매일 이렇게 나오시나 봐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이렇게 나오지 않으면 먹고살기가 힘든데 어쩌것소, 나오지 않을 수가 없지.”
“그냥 돌아가시는 분들이 꽤 많은가 봐요?”
“점점 찾는 사람들은 줄고, 나오는 사람들은 많으니...”

올해 나이가 ‘60이 넘었다’고만 밝히시는 한 분은 끝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그렇게 쓸쓸히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한다. 벌써 이곳을 찾기 시작한지도 1년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먹고 나니 이제는 찾아주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어두운 새벽길을 걸어 모여드는 여인들. 일자리가 점점 줄어든다고 한다.

“그래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해왔는데, 나이가 웬수죠.”
“일주일이면 며칠이나 일터를 찾아가세요.”
“운이 좋으면 한 3일은 가는데, 그나마 이젠 그것도 힘들어요.”
“대개 어떤 일을 하러 가세요?”
“어떤 일이란 것도 없어요. 밭일부터 이것저것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것이니까”
“이곳에는 남자들은 안 오시나 봐요”
“모르겠소. 오는지 안 오는지”

대답조차 짜증스러운 모양이다. 며칠 째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괜히 자꾸만 질문을 해대는 나도 미안하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며 깔고 앉았던 신문지를 접는 분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하다. 집에는 먹을 것은 있는 것인지. 돌아간다는 집에 또 다른 가족들은 있는 것인지. 힘없이 처진 어깨가 더 힘들어 보인다.

“일감도 없고 살기가 이렇게 힘이 드네요.”

매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그렇게 말 홍수만 쏟아 놓을 것이 아니라, 이런 분들이 다만 얼마간이라도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곳은 없는 것인지.  한마디를 남기고 길을 건너 걸어가는 뒷모습. 그 모습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다. 그저 아무런 일이라도 만들어 일감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침마다 인력시장을 찾는 여인들. 그리고 몇 시간을 기다리다가 힘없이 돌아서는 발길. 그것이 지금 우리 곁에서 사는 또 한 무리의 삶의 모습이다.

승광재. 조선의 황손인 이석씨가 사는 곳이다. 한옥마을 최명희 문학관 인근에 있는 승광재는 2004년 8월 경에 지어진 집이다. 이곳은 조선황실의 마지막 황손이라는 이석씨가 거주를 하고 있으며, 전통예절을 가르치는 설예원과 함께 있다. 현재 전라북도 도지사인 김완주 지사가 전주시장으로 재직시 이 승광재를 지어 이석씨를 머물게 했다는 것이다.

승광재는 한옥마을의 한편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긴 흙담 사이로 난 골목 안에 일각문이 보이고, 그 문 위에는 ‘승광재’라는 현판을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는 설예원이 있고, 우측으로는 ㄷ 자로 꾸며진 승광재가 자리한다. 승광재는 ㄱ 자 집 두 채를 연결해 ㄷ 자로 꾸민 집이다. 승광재에는 황실 사람들의 사진과 황실에 관련된 내용들이 진열이 되어있다.




지난 해 명성황후 생가에서 만나보다.

내가 황손 이석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10월 8일 명성황후 생가에서이다. 명성황후의 추모제를 마치고 그 자리에 참석한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본명 이해석)를 생가 마루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올해로 벌써 70세인 이석 씨는 한 때 가수로도 활동을 했으며, 터전을 잡지 못해 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종 황제의 손이고 아버지는 의친왕이다. 하기에 명성황후는 이석 씨의 할머니가 된다.


지난 해 명성황후 생가에서 만나 황손 이석씨. 그리고 현재 한옥마을의 승광재

황손 이석 씨는 1941년 음력 8월 3일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사동궁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결국 궁에서 나오게 되고, 대한제국이 막을 내리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1979년까지는 그나마 전 박정희 대통령의 안배로 서울 궁정동 청와대 옆, 칠궁에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5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곳에서도 쫓겨나 1년이면 12번도 더 이사를 다녔단다.

중앙시장과 동대문시장에서 국수장사, 자장면 장사 등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는 황손 이석 씨였다. 한 낮에 찾아 든 승광재에는 문이 닫힌 채 나그네들만 왁자하니 집안을 돌아보고, 예절을 배우러 온 아이들인지 소리를 치면서 뛰어다닌다.

요즈음 한창 인기리에 방영이 되고 있는 사극을 보면서, 만일 일본과의 그런 개탄스런 과거가 없었다고 한다면 어찌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나 있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승광재가 조금은 남다른 집일 것만 같다. 오래된 고옥도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서 조용하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도 아니다. 그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시끄럽게 만든다. 그 한편에 숨을 죽이듯 엎드려 있는 승광재를 보면서, 세월의 무심함이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승광재와 설예원(아래)

오늘 황손의 집은 낯이 설다. 언제나 그렇듯 이곳도 결코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도 이나마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고맙다는 황손의 말을 되새겨본다. 글쎄다,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오늘 한옥마을 한 끄트머리에서 만난 황손의 집에서, 가슴 한편이 싸한 느낌이다.


위는 영조의 가계도, 아래는 고종황제의 가계도(전단지 전사)

경술국치일, 1910년 8월 29일은 한일합방이라는 역사에 부끄러운 일을 당한 날이다. 이제 2010년 8월 29일은 국치를 당한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전주 경기전 앞에서는 다시는 이러한 치욕적인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국치일을 되새기기 전시회가 열려 눈길을 끌고 있다.
 
‘국치 100년 특별전.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라는 타이틀로 8월 20일부터 29일까지 전시가 되는 이 특별전은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에서 주최를 한다. ’전주이기 때문에 이런 전시도 하네‘라는 관람자의 말대로, 전주는 바로 경기전이 있는 곳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어용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계의 조상들이 이곳 전주 이목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당시를 그릴 수 있는 뜻 깊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항일과 반일을 캐리캐처로 그려

이 전시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캐리캐처로 그려진 사람들이다. ‘한 시대의 다른 삶, 항일과 친일’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그림들은 각계의 사람들 중 친일인사와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인물들은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친일과 항일을 구별한 것이다.



항일을 한 사람과 친일을 한 사람들이 캐리캐처로 그려져 있다

경기전을 관람하러 온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차분하게 들여다본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적 인물이지만 그들이 새삼 일본에 협조를 한 친일인사라는 것에 입맛이 씁쓰레해진다. 이 외에도 수탈의 현장, 항일운동을 한 의병들의 공개처형 장면 등 당시를 생각할 수 있는 사진들이 전시가 되어있다. 그 뒤 한편에는 한국의 대표언론이라는 신문사가 일장기를 제호 위에 달고 전쟁을 성전이라고 독려하는 사진도 보인다.



경기전 벽에 붙은 대형현수막 앞에서 사람들은 걸음을 멈춘다.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일본 후쿠다 총리와 이명박 대통령의 회담 내용의 진실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일본의 언론들도 그 말이 사실이라고 보도를 했다는 내용도 함께 전시가 되어있다. 사람들은 ‘설마’라는 말로 위안을 삼아보지만, 그 진실은 오직 당사자만이 알 일이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를 묻고 있다

돌아보던 어린이 ‘정말 나쁜놈들이예요’

‘해방,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라고 외친다. 과연 우리는 완전한 해방을 맞기는 했을까?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일본의 대기업인 미쓰비시가 10만 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고, 65년이나 밀린 임금을 후생연금이란 명목으로 고작 99엔(한화 1,300원)을 지불하겠다고 했다는 내용에 격분하고 있다. 그 한편에는 ‘성노예로 끌려간 소녀들’, ‘총알받이로 끌려간 조선 청년들’의 이야기와 창씨개명 등 조선말살정책을 편 일본의 만행을 적고 있다.





한편에는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을사오적(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정미칠적(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과 한일병합 조약인 경술국적(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 등이 조선을 넘겨주고 일본에서 받은 상금과 직위 등을 소개하고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국치의 잔재. 과연 완전한 해방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을 하게 만드는 이 전시를 보면서 마음 한편이 착잡하다. 언제라야 정신대 할머니들의 응어리진 속이 조금이나마 풀리려나? 하는 생각에서.

길은 어디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길을 이용한다. 지금이야 차를 갖고 다니기 때문에, 차를 타고 휑하니 달려가 볼일을 보고는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걷거나 말을 타지 않으면 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니던 길이 이제는 나름대로 멋진 이름을 붙여 다시 태어나고 있다. 그 길을 걷는 재미에 빠지면, 길이 다시 보인다.

전주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살던 곳이다. 시조인 이한 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으로, 조선개국을 칭송한 「용비어천가」에 이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금강으로 침입한 왜구는 군선 5백 척을 진포(군산)에 대놓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우왕은 수군을 총지휘하던 최영에게 명하여 이를 무찌르게 하였는데, 패전한 왜군은 퇴로를 찾아 남원으로 내려왔다. 이성계는 이들을 맞아 운봉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오목대에서 개선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한다.


조선개국의 뜻을 품은 길

한옥마을에서 오목대를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조성을 하였다. 오목대길은 가끔 산책을 나가기도 하는 곳이지만, 하필 가장 찜통이라는 날을 골랐다. 그래도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천천히 계단을 오르면서 돌아보니, 한옥마을의 지붕들이 줄을 지어 보인다. 사람들은 연신 한옥마을을 촬영하느라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마을을 찍기 좋은 장소를 골라, 사진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한 마음이 따듯하다.




이목대로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이다. 위로 오르면 한옥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다.
한옥마을이 옛날 이야기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낮은 야산이지만 숲이 좋은 길이다. 여기저기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배려를 해놓았다. 오목대로 오른다. 그 옛날 이성계가 운봉으로 출동하여 황산에 진을 치고 적과 싸우다가, 왜장 ‘아지발도’를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성계는 승전을 하고 귀경 도중 전주에 있는 종친들을 모시고 승전축하연을 이 오목대에서 베풀었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이 자리에서 한고조가 불렀다는 ‘대풍가’를 불렀다. 대풍가는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고향에서 종친을 모시고 읊은 시가 아니던가. 바로 한나라를 세우겠다는 마음을 은연중 내비친 시이다.

오목대를 비켜서면 이목대가 있다. 보호책을 둘러놓은 이목대 전각 양편으로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문지기라도 된 양 꽃을 피우고 있다. 전각 안에 비석은 바로 고종황제가 친필로 썼다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 쓰여 있다. 결국 이곳 이목대와 오목대는 조선이라는 한 나라가 출발하는데 있어, 그 뜻이 모인 곳이다.




오목대와 이목대. 오목대는 이성계가 승전을 하고 잔치를 벌인 곳이며,
이목대는 이곳이 이씨들이 살던 곳임을 알려주는 표지이다.

매미소리 시원한 당산 길

이목대를 지나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시원한 숲길에서 매미소리가 시끄럽다. 아마 마지막 더위를 아쉬워하는 듯하다. 내리막길에 커다란 당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500년 동안 전주 한옥마을의 안녕을 기원해 온 나무이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이곳에서 정결하게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올리는 당산나무

다시 한옥마을 들어가기 전에 양산재 길로 향한다. 여기저기 목책의자들이 정겹게 놓여있다. 이 찜통더위에 잠시라도 숨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 않는다. 여기도 역시 낙서는 빠지지 않는다. ‘윤진아 사랑해 - 남편’이란 글이 시야에 가득찬다.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 이런데 낙서를 하면 그 사랑이 깊어지는 것일까? 괜한 헛웃음만 허공에 날리고 있는데, 더위에 날기를 지친 나비 한 마리 나뭇잎에 숨을 고른다.



쉴수 있도록 마련된 나무의자. 이 길에는 나무의자들이 많이 있다.
누군가 한 낙서와 따라오던 나비 한 마리가 같이 날개를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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