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완산구 교동 105-4에 소재한 학인당. 현재 전북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곳을 일컬어 '서울 북촌에 윤보선 고택이 있다면, 전주 한옥마을에는 학인당이 있다'고 할 만큼 격식을 갖춰 지은 집이다. 한옥마을에 있는 많은 한옥을 대표하는 학인당은 100년이 지난 대형 한옥으로 건축 당시에는 2000평의 대지에, 건평만 99칸의 집으로 지은 집이다.

 

학인당은 조선조 말 왕조가 퇴락하자 반가의 상류층에서는 한국 전통 건축기술을 이어받은 도편수와 목공 등을 청해 집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다. 학인당은 당시 궁중건축양식을 민간의 가옥에 도입한, 상류층 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집으로 그 가치가 높다. 연인원 4280명이 압록강과 오대산 등지에서 구입한 우리 목재를 이용하여 28개월 끝에 완공을 했다는 학인당. 당시 돈으로 백미 4000(8000가마)을 들여 지었다는 학인당의 규모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백낙중은 효자로 소문이 나 고종황제는 특별히 그의 효행을 높이 사 '승훈랑'이란 벼슬을 내려주었다. 백낙중은 이 집을 장남 백남혁이 태어남을 기념하여 1905년에 부친 백진수에게서 물려받은 대지에 지은 것이다. '학인당'이란 명칭은 백낙중이 서거 후 그의 호인 '인재(忍齎)'에서 ''자를 따서 지은 명칭이다.

 

6·25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는 안채와 행랑채를 매각. 했다. 1970년대에는 용인민속촌에 이 집을 통째로 옮기기 위해,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이 거액을 제시하며 두 차례나 팔기를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몇 번의 권유가 있었으나 백남혁 부친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힘을 썼다고 한다.

 

 

전북 예술의 산실 학인당

 

부친 백낙중의 서거 후에 일본에서 돌아 온 백남혁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재력으로 전북 예술인들의 후원에 힘을 쏟는다. 심농 조기석, 유당 김희순 등의 서예가와 청천 이상범, 금추 이남호 등을 후원했으며, 소리꾼인 남전 허남옥을 비롯하여 만정 김소희, 박녹주, 김연수, 박초월 등의 명창들을 지원했다. 학인당은 일제치하에서 전북 예술을 지켜가는 문화교류의 장이었다.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절. 예술인들은 많은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그 끈질긴 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학인당과 같은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 있기 때문이다. 학인당은 해방 후에는 영빈관으로 사용이 되기도 했다. 김구 선생이 전주를 방문하면 학인당에서 묵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학인당은 전북 모든 분야에서 구심점이 되었다.

 

 

변화된 모습의 학인당

 

학인당의 솟을 대문에는 '영릉 참봉 수원 백낙중지려'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전통문화 체험장으로 개방된 학인당에는 최근 전통찻집 '선다원'이 문을 열었다. 학인당에서 차 한 잔 여유와 휴식을 즐길 수가 있다. 학인당을 찾았다. 대문이 걸려있는데 집 앞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전화를 걸었더니 쪽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작지만 아름답게 꾸며 놓은 정원이 있고, 뒤편 학인당의 대청에는 주인과 객들이 차를 마주하고 담소를 하고 있다.

 

신문시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안주인인 듯한 분이 손수 나와 반기며 학인당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200년간이나 이 집터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정원에는 계단을 내어 깊은 곳에 물이 고여 있다. 지하샘이라고 하는 이곳은 원래 식수로 사용한 것이었는데, 현재는 김치 저장고로 사용하고 있단다. 계단 입구가 용꼬리가 되고 지하샘 위쪽이 용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 하나의 설명만으로도 이 집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다.

 

 

학인당 앞에서 대문채를 보니 양편에 방을 드렸다. 대문을 팔작지붕으로 꾸민 것도 특이하다. 그 한편으로 건물 한 동이 있고, 학인당의 뒤편과 좌측에도 한 동이 있다. 학인당이라는 현판을 건 본채는 팔작집으로 지붕 처리가 남다르다. 지붕의 팔자로 갈라진 아랫부분에는 문을 내고, 끝부분의 둘레를 동판으로 싸 비바람을 막게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잘 꾸며진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안채와 행랑채 등 예전의 99칸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면, 주변에서는 보기 힘든 저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다 보니 100여 년 전 상류층 사회의 집 구조가 옛 고택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서울 북촌의 윤보선 전 대통령의 집과 비길 만 하다는 학인당.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전통문화 체험을 하면서 또 다른 즐거움을 느낄 것 같다.

 

‘하마비(下馬碑)’라는 것이 있다. 하마비는 궁궐이나 향교, 혹은 사찰이나 옛 고택 등의 앞에도 서 있다. 이 하마비가 서 있으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하마비의 한편이나 뒤쪽을 보면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적혀있다.

 

여기서 ‘대소인’이란 당하관인 종 3품 이하의 관원을 뜻한다. 또한 원(員)이란 당상관을 말한다. 우리가 옛 각판 등에서 볼 수 있는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개(皆)’는 ‘모두 다’ 라는 뜻이니, 결국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이 하마비가 서 있는 곳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란 뜻이다.

 

자연석을 이용한 하마비도 있어

 

물론 전국에 있는 하마비는 거의 위와 같은 ‘대소인원개하마’라고 각자를 했다. 하지만 가끔은 예외도 있다. 고을의 방백 등이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직급을 적고 그 밑으로는 다 말에서 내리라고 적은 글귀도 보인다. 이런 예외인 하마비는 고을의 수령이 근무를 하는 입구에 놓여있기도 하다.

 

이러한 하마비는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가 있다. 하마비는 대개 일석으로 조성을 한다. 길게 세운 위를 둥그렇게 조형을 해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하마비의 모습이다. 하지만 특별하게 만든 하마비도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하마비를 만든 곳도 있고, 돌에다가 하마비라고 각자를 해 놓은 것들도 보인다.

 

 

하마비는 조선조 태종 3년인 1413에 종묘의 궐문 입구에 표목을 세운 것이 처음이다. 이곳에는 ‘대소관리과차개하마(大小官吏過此皆下馬)’라고 적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한다.’ 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이나 종묘, 문묘, 왕장이나 성현, 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졌다.

 

전주 경기전 앞의 하마비는 특이해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번지에 소재한 경기전은 ‘어용전(御容殿)’이다. 어용전은 조선 태종 10년인 1410년에 완산과 계림, 평양에 건물을 짓고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으로 세종 24년인 1442년부터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다고 한다. 경기전은 전주에 있던 어용전을 가리키는데 선조 31년인 1598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고쳐지었다.

 

경기전 입구에 보면 특이하게 생긴 하마비가 서 있다. 일반적으로 하마비는 일석으로 조성을 하는 것에 비해, 경기전 앞의 하마비는 밑에 두 마리의 행태가 비를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두 마리의 해태가 사각형의 넓은 판석을 이고 있으며. 그 위에 하마비를 세웠다. 판석에는 사방에 안상을 새겨 넣었다.

 

 

하마비의 표석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적혀있다. 즉 이곳에 이르거든 누구나 다 말에서 내려야 하며, 잡인을 일체 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이 하마비는 1614년에 세웠으며, 그 후 1856년에 증각을 하였다.

 

하마비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 대개는 비의 중앙에 ‘하마비’라고 음각을 한 후, 한 편에 대소인원개하마란 글귀를 적어 놓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경기전 앞에 서 있는 하마비는 하마비라는 글자를 음각하지 않고, 양편으로 나누어 글귀를 내리 음각했다. 아마도 이 경기전이 태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특별한 하마비를 세운 듯하다.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많은 곳에서 만날 수 있는 하마비. 때에 따라서는 하마비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도 들을 수가 있다. 이제는 이와 같은 하마비도 훌륭한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지난 11월 1일(목) 전주 풍남문 광장에서 9시부터 열린 세계순례대회의 시작은 4대 종교의 지도자들과 김완주 전라북도 도지사, 전주시장, 김제시장, 완주군수 등의 지자체장들이 모여 총 240km인 600리를 걷는 순례대회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 순례길은 각 종교의 역사적인 지역을 연계하는 길로 11일 순례포럼과 전북도청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닫는마당까지 이어졌다.

 

11월 1일(목)에는 1코스인 한옥마을~송광사구간인 26.1km를 원불교 전북교구장인 고원선 교무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소태산 대종사를 기억하며’린 부제를 달고 있다. 11월 2일(금)에는 2코스 송광사~천호구간으로 27.1km 에 달한다. 금산사 회주인 도영 큰스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벽암대사를 기억하며’라고 부제를 달았다

 

가수 김태원이 스님짜장을 볶고 있다(위) 빼마 친조르(Pema Chinjor) 티베트망명정부 종교문화부장관도 함께 짜장을 볶으면서 즐거워하고(아래)

 

11월 3일(토)에 걷는 3코스는 천호~나바위 구간으로 24.1km 달하며 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총무인 이영춘신부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며’라고 했으며, 4일 째인 11월 4일(일)에는 4코스인 나바위~미륵사지까지 23.6km를 이상원 길 매니아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허 균을 기억하며’로 테마를 잡았다.

 

11월 5일(월)에는 5코스인 미륵사지~초남이 구간 25.5km 걸었으며, 원광대 나종우 교수와 지광 스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주왕을 기억하며’란 부제를 달았고, 11월 6일(화)의 6코스는 초남이~금산사로 25.9km에 달한다. 이 구간은 백남운 목사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진표율사를 기억하며’이다.

 

11월 7일(수)에 걸은 7코스는 금산사~수류의 14.5km의 순례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7대 교구장인 원행스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처영대사를 기억하며’ 란 주제를 갖고 있다. 11월 8일(목)에는 8코스인 수류에서 모악산까지 21.2km의 걷기구간으로 사람과 자연이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이었다.

 

 11월 10일 전주 승암산(치명자산) 광장에 모인 순례단(위) 김태원과 4대종교지도자들이 순례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아래)

 

11월 9일(금)에는 9코스 인모악산에서 전주 한옥마을까지 27.5km를 전주지역 장로교 연합회장인 박진구 목사와 천주교 전주교구장인 이병호 주교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순례길로 ‘선교사들을 기억하며’라고 하였다. 11월 10일(토)에는 어울림 큰마당인 순례 음악회로 꾸몄는데, 승암산(혹은 치명자산) 광장에서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부활의 김태원 등도 함께한 순례길

 

10일 승암산(치명자산) 광장에는 그동안 걸어 온 순례길에 대한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이 날은 종교지도자들이 순례를 한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세족의식도 함께 하였으며, ‘사람실은 스님짜장’으로 500여명의 순례단이 점심을 들었다.

 

 순례단의 발을 씻기는 원행스님(위)와 한 종교지도자가 김태원의 발을 씻기고 있다(아래)

 

아침 일찍 승암산 광장에는 차일을 치고, 짜장면을 볶을 솥을 걸었다. 짜장을 볶을 때는 순례대회에 참가한 빼마 친조르(Pema Chinjor) 티베트망명정부 종교문화부장관도 함께 짜장을 볶으면서 즐거워하기도. 부활의 김태원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짜장을 볶기도 해, 기자들의 열띤 경쟁을 불러일으키기도. 이 순례길에 참가를 했다는 이아무개(여, 42세 전주)는 이 날 행사가 정말 즐겁다고 한다.

 

“정말 이렇게 모든 종교를 망라하는 순례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전라북도는 모든 종교의 소통창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10일 동안 240km를 걸으면서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즐거웠지만, 오늘 이렇게 스님짜장을 세계 각국에서 참가한 분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큰 행복입니다. 늘 이런 축제 때마다 함께 해 주시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순례기간 중 4회에 걸쳐서 1,200명 정도에게 짜장봉사를 한 운천스님(남원 선원사 주지)은

 

“이리저리 다니느라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부활의 김태원과 티베트의 장관까지 함께 동참을 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역시 봉사란 것은 강요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남을 위한다는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 같다”고 한다.

 

 

‘아름다운 순례, 홀로 또 함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세계순례대회. 1만 여명이 넘는 순례객이 이 길을 걸었으며, 4대 종교가 한 자리에 모여, 서로를 감싸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세계순례대회의 대장정은 11월 11일 전북도청에서 가진 ‘세계순례포럼’를 끝으로 막을 내렸으며, 이 자리에는 김완주 전북도지사를 비롯해 이병호 주교, 박진구 목사, 원행 스님, 고원선 교무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정자 앞을 흐르는 물이 차고 희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 한벽당. 1404년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600년 가까이 되었다. 한벽당은 호남의 정자 중에서도 수일경이라 하는 곳이다. 앞으로는 작은 물고기가 노니는 맑은 물이 흐른다. 사시사철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맑았기에 한벽당이라 불렀을까?

 

전주천 맑은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벽당.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들려 사시사철 그 이름다움에 취했던 곳이라고 한다.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깎아내고 새웠다. 조선조 건국시 개국공신인 월당 최담이 태종 4년에 처음으로 건립을 했다고 하니, 벌써 600년 가까이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전주천을 바라보는 정자

 

한벽당은 운치가 있다. 물빛 고운 전주천에서 잡히는 물고기를 이용해 끓여내는 오모가리 매운탕 한 그릇을 들고 한벽당 밑으로 나가면 한 여름이 훌쩍 지난다. 까마득한 지난 날 아마 우리의 선인들도 그런 맛에 취해서 한벽당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벽당 곁에 붙어지은 요월대가 있어 낮에는 한벽당에서 밤이면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는 요월대에서 즐겼을 것이다. 어찌 짧은 시 한수 나오지 않을 것인가? 이곳을 찾아들었던 사람들도 그런 절경에 취해 거나하게 탁주 몇 잔을 마셨을 것이다.

 

 

 

주변이 모두 절경과 볼거리

 

한벽당 주변에는 볼거리가 많다. 오랜 세월 묵묵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주한옥마을을 비롯하여 커다란 고목이 된 은행나무들이 경내에 즐비한 전주향교 등이 있다. 요즈음에는 주변에 전주전통문화센터에서 많은 공연을 하기 때문에 즐기고 먹고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명소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전해지는 것인가 보다.

 

한벽당은 사시사철 아름답다. 봄이 되면 건너다보이는 산에 산벚꽃이 피어나는 모습이 아름답다. 여름이면 정자 앞을 흐르는 차디찬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더위가 가신다. 정자 주변에 있는 고목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더 더욱 시원함을 더한다. 가을이면 전주천을 덮는 억새가 하늘거린다. 찬 겨울이라도 정자는 언제나 운치가 있다. 경치만 놓고 가늠하자면 가히 선계라 할 만하다.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 한벽당. 맑은 물빛이 고운 정자다. 한벽당 가까운 곳에는 월당 최담의 비가 서 있어, 이곳이 유서깊은 정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멋스럽지만 난해하지 않고, 아름답지만 화려하지 않은 정자. 물빛 고운 한벽당은 그렇게 속으로 멋스러움을 감추고 있는 정자이다

삼국지에서 출연하는 명장 가운데 한 사람인 관우(關羽, 160년~219년)는 3세기경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유비, 장비와 더불어 도원결의를 맺고 수많은 공을 세운다. 삼국지에 나타나는 관운장은 청룡연월도를 빗겨들고 적토마에 올라 적군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다. 이 관운장이 우리나라에 와서 왜 무신(武神)으로 신격화되어 숭배를 받는 것일까?

 

임진왜란 때 진인이 세운 신상이 효시

 

관우를 우리나라에서 신성시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진인이 서을 남묘에 관우를 조각한 신상을 모신 것이 그 효시로 보여진다. 그 뒤 관우는 전국에서 관왕묘, 관제묘 등의 명칭으로 불리면서 신격화됐다. 관우를 가장 신성시하는 것은 역시 무속인들이었다. 무속에서는 관우를 무신으로 신성시하고, 집집마다 모셔둘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추앙을 받았다.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남고산성 안에도 주왕묘, 관성묘 또는 관제묘라 부르는 관우를 모신 사당

 

관우에 대한 전설은 많이 전해진다. 그것은 신격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도 있고, 명나라 장수 진인의 활동이 관우와 혼동이 될 수도 있다. 처음에는 남묘에 모셔졌던 관우가 현재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소재한 보물 제153호 동묘(동관왕묘)로 옮겨졌다. 이렇게 동묘로 옮겨진 것은 관우의 영험이라는 전설이 한 대목 전한다.

 

전설 속에서 우리나라를 구한 관우

 

'임진왜란 때 한양이 왜병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한양 남대문 앞에 왜병들이 다다르자, 적토마를 탄 장수 한 명이 수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왜병들을 맞아 일전을 벌였다. 적을 물리친 장수는 남산의 한 굴속으로 사라졌는데, 나중에 그곳을 가보니 대나무 잎만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한다. 후에 한 조정 대신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동묘로 가자, 동묘로 가자'라고 하였다. 그래서 관우의 조각상을 동묘로 옮겼는데, 그날 밤에 남묘에 불이 나 다 타버렸다.'

 

 

 

 관성묘 입구의 솟을대문과(위)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하)

 

대개 전설은 이와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이 내용을 살펴보면 관우를 신격화하기 위한 전설임을 알 수 있다. 동묘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왜병에 의해 파괴가 되었다. 명의 신종은 친히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보내와, 1599년부터 새로 짓기 시작하여 1601년에 완성을 하였다. 이 때 서묘와 북묘가 함께 건축이 되었으며, 현재는 동묘만 남아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동묘로 가자'고 했다거나, 남묘가 불이 나 타버렸다는 것은 관운장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설화로 보인다. 정작 임진왜란 때 파괴가 된 것은 동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대문에서 관우가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것도, 남대문 밖에 남묘가 있기 때문에 나타난 설화로 볼 수 있다.

 

전주 남고산성 안에 자리한 관성묘

 

동남아 일대에서는 관우가 가장 추앙받는 장수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관우를 모셔놓은 사당이 보이는데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남고산상 안에도 주왕묘, 관성묘 또는 관제묘라 부르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 있다. 이 관성묘는 고종 32년인 1895년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남고산성을 책임지던 무관 이선문이 제안하여 건립했다.

 

 

 관우의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에도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부귀공명과 자손들의 창성을 기원하고 있다

 

전주 '관성묘'를 찾았다. 남고산성 안으로 들어가 하마비를 지나면 주변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돌계단 위에 솟을대문이 보인다. 대문의 현판에는 '관성묘'라고 적혀있다. 솟을대문은 모두 5칸으로 축조되었으며, 중앙의 세 칸 밖으로 좌우에 한 칸씩이 더 달렸는데, 그 안에는 말을 끌고 있는 무장을 조각해 놓았다. 이 조각이 관우를 조각한 것인지, 아니면 사당을 지키는 무장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위로 오르는 돌계단에 또 하나의 중문이 보인다. 이도 역시 솟을대문으로 꾸며 관우가 신격화돼 있음을 짐작케 한다. 사당으로 오르는 좌측에는 사당을 지키는 사람이 사는 집인 듯, 한 채의 가옥이 있다. 돌계단에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신격화된 관우의 영험으로 안과태평을 기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전각 안에 그려진 '관우의 적벽대전'과 그림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문화재

 

계단을 오르면 앞으로 부속건물을 달아낸 사당이 있고, 그 좌우에는 살창으로 앞을 막은 전각이 있다. 그 안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내용들을 포함, 관우의 활약상이 그려져 있다. 사당은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안을 볼 수가 없다. 안에는 관우의 상을 모셔 놓았다는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양편에도 조각상들이 보이고, 중앙에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굳게 닫힌 사당안을 문 틈으로 보니 무신상들이 보였다

 

관우가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그의 충정이다. 그리고 몸을 도사리지 않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이다. 그렇기에 무관들이 주축이 되어 지어진 관성묘가 아닐까? 아마 무관들에게는 관우가 그 누구보다도 숭앙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문화재는 보존이 중요하다. 문화재가 올바로 지켜질 때 그 가치가 높은 것이다.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고 누구나 찾아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사람들은 그 문화재의 가치를 더 높게 보지 않을까? 관성묘의 제대로 된 보존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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