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소재한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21년인 560년에 창건된 비구니 사찰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벌써 1,500년 전에 세워진 고찰이다. 이 운문사 경내 만세루 옆에 서식하고 있는 처진 소나무 한 그루는, 수령 500년이 지난 천연기념물 제180호이다. 이 나무의 키는 9.4m에 가슴둘레의 높이는 3.4m 정도이다.

처진 소나무의 밑동 둘레는 2.9m, 가지는 동으로 8.4m에 서로 9.2m, 남으로는 10.3m에 북으로는 10m 정도로 뻗어 30여 평을 뒤덮고 있다. 사방으로 고르게 발달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축 처진 모습을 한 보기 드문 품종이다. 우리나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 된 수많은 소나무 중, 이렇게 가지가 처진 소나무는 몇 그루되지 않는다.


‘삽목(揷木)’으로 새 생명을 얻은 처진 소나무

우리나라에 있는 고목(古木)이나 거목(巨木) 등에는 많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삽목(揷木)’에 대한 전설이다. 삽목이란 말 그대로 나무를 땅에 꽂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삽목의 전설은 고승이나 유명한 인물들과 관련이 지어진다. 이 운문사 처진 소나무 역시 어느 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시든 나뭇가지를 땅에 꽂아 이렇게 큰 나무로 자랐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보던지 삼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자란 운문사 처진 소나무. 아마 이 삽목에 대한 전설은 새 생명을 불어 넣는다는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절 안에 서식하고 있는 수령이 오래 된 나무들은, 거의가 역사적 인물이나 고승들이 마른 지팡이 등을 꽂아 새 생명을 주었다는 삽목의 전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막걸리를 마시는 운문사 처진 소나무

운문사 처진 소나무가 기이한 나무라는 것은 전하는 이야기만 들어도 알 수가 있다. 시든가지를 꽂아 생명을 얻은 이 나무는, 임진왜란 때 절이 모두 불타버렸지만 칡넝쿨이 나무를 감고 있어 살려냈다고 하다. 운문사에서는 1970년대부터 매년 음력 삼월삼짇날이 되면, 막걸리 12말에 물 열두 말을 타서 나무 둘레에 뿌려주는 ‘처진 소나무 막걸리 먹이기’를 펼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처진 소나무에 막걸리를 먹이는 것은, 소나무가 막걸리를 마시면 생육에 도움이 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막걸리에는 많은 영양분을 함유라고 있기 때문에, 나무를 옮겨 심거나 할 때도 막걸리를 주변이 뿌려주고는 한다. 운문사 스님들은 이 나무를 ‘선정(禪定)에 든 나무’라고 한다. 오랜 세월을 스님들의 염불소리를 듣고, 도를 닦아 스스로를 낮추는 나무라는 것이다.



비가 뿌리는 날 만난 처진 소나무, 그대로 춤이었다.

땅 위 2m 정도에서 사방으로 뻗친 가지는 지주를 대고 있다. 아마 이 지주들이 없다면 가지들이 모두 땅에 닿아있을 것이다. 7월 15일 금요일. 아침 일찍 운문사에서 생활을 하고 계시는 25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에게, ‘스님짜장’ 봉사를 하기 위해 운문사로 떠났다. 맑던 날씨가 청도에 들어서면서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운문사에 내려 처음 만난 것이 바로 처진 소나무였다. 운문사는 그동안 몇 차례나 방문한 곳이지만 갈 때마다 새롭다. 비를 맞으면서 처진 소나무 주변을 돌아본다. 호거산 운문사. 주변 산에는 호랑이에 관한 전설도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6,25 때도 방화로 일부 전각을 잃었지만, 이 소나무는 재앙을 피했다고 한다. 그만큼 신령한 나무이기도 하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는 수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처진 소나무 중에는 최고로 친다. 빗물이 떨어지는 가지 밑으로 들어가 본다. 마치 춤을 추듯 늘어진 가지들. 그 모습에서 수많은 무희들이 팔을 뻗쳐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본다. 아마도 새 생명을 얻은 희열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연의 신비. 운문사 처진 소나무를 보면서, 그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에 고개를 숙인다. 비를 맞으며 만난 소나무 한 그루에서, 난 또 다른 자연의 힘을 얻어간다.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겸손과 함께.

감악산 연수사. 그 이름만큼이나 어느 오랜 옛날, 꿈속에서 돌아본 듯한 정겨운 이릉이다. 6월 10일, 한 낮의 온도가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시간에, 감악산 연수사를 찾았다.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에 소재하는 연수사는, 해발 951m의 감악산 기슭에 자리한 절이다. 연수사를 찾은 것은 경내에 있는 수령 600년이 지났다는 은행나무가 보고 싶어서이다.

연수사는 신라 애장왕 3년인 802년에, '감악조사(紺岳祖師}‘가 현 사찰 남쪽에 세우려 했던 절이다. 이 연수사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감악조사가 절을 짓기 위해 서까래를 다듬어 놓았다. 그런데 잠을 자고 일어나니,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큰 통나무 기둥이 사라진 것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 연수사 은행나무

서까래가 옮겨진 곳에 터를 잡은 연수사

아침에 주변을 살펴보니 현 연수사 대웅전 자리에 서까래가 놓여있어, 그 자리에 대웅전은 짓고 가람을 이룩했다고 한다. 연수사는 조선조 숙종 시에 벽암선사(1575-1660)가 사찰을 중수하고, 십여 사원을 지어 불도를 크게 일으킨 절이라고 한다. 연수사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바위 구멍에서 떨어지는 맛 좋은 샘물이 있으며, 극심한 가뭄에도 절대로 마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라의 헌강왕은 이 샘물을 먹고 중풍을 고쳤다고 전해지고 있어, 연수사의 물이 병 치료에 좋기로 소문이 나 있으며, 이 물은 사철 물 온도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이 연수사를 오르기 전에 만나는 일주문을 바라보고, 좌측에 수령이 600여년이 지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여승이 심었다고 전하는 연수사 은행나무

예전이나 지금이나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연수사 은행나무도 애틋한 세상사의 이야기 한토막이 전한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연수사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육백여년 전 어느 젊은 여인이 10살 먹은 자신의 유복자와 이별을 하고 비구니가 되면서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두 모자는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전나무를 심고 어머니는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전나무는 1980년 경 강풍으로 부러져 없어지고 은행나무만 남았다는 것이다. 연수사 은행나무는 높이가 38m에, 밑동둘레가 7m나 되는 거목이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는 동서로 21m, 남북으로 20m 정도에 이른다.



물맞이 시설, 땀을 흘리며 찾아갔는데

연수사 일주문 곁에 있는 은행나무를 돌아보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양편에는 누군가 돌탑을 여러 개 쌓아놓았다. 이렇게 돌탑을 쌓은 사람은, 돌 하나를 놓으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대웅전 우측으로는 호리병에서 물이 흐른다. 아마도 저 샘물이 그 용하다는 물은 아니었는지. 대웅전 뒤편 산비탈에는 크지 않은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절을 한 바퀴 돌아 내려와 일주문 앞 암석에 잠시 다리를 뻗는다. 눈앞에 물 맞는 곳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180m. 천천히 걸어 산길로 접어든다. 아름드리 고목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린다. “딱딱딱딱...” 더운 여름 날 그 소리가 마치 청량음료 한 잔을 마신 듯한 기분이다.

저만큼 강돌로 쌓은 구조물이 보인다. 끈끈한 몸을 물이라고 적실 요량으로 달음질을 쳐 구조물 안으로 들어간다. 한편에는 여탕이라는 간판이 놓여있다. 그 반대편으로 들어가니 입구를 꺾어 안으로 들어가게 조성을 하였다. 당연히 물이 쏟아질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물기 하나 없이 마른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물을 연결한 물길과 호스가 따로 떨어져 있다.




갑자기 목도 마르고 더위가 몰려온다. 괜히 이마에 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이다. 속으로 투덜대면서 돌아 나오는 길에, 저 밑으로 거창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별로 올라온 것 같지가 않은데, 꽤나 지역이 높은가보다. 심호흡을 한 번하고 산길을 돌아 나오니 은행나무가 보인다. 그 오랜 시간 저리고 꿋꿋이 서 있는 은행나무.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음이 후회스럽다. 저리도 불평 없이 오랜 세월을 서 있는데, 나는 그 작은 것 하나에도 순간적으로 혈기를 내다니. 또 한 번의 부끄러움에 허한 웃음을 허공에 날린다.


양양군 현남면 인구리 7번 국도에서 해송천로를 따라 상월천리 방향으로 난 지방도를 따라 가다가 보면, 인구2리 길가에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두 그루 다 처진 소나무와 같이 아래로 가지를 내리고 있다. 이 중 길가에서 볼 때 뒤편에 있는 소나무는 흡사 정이품송을 닮았다.

길을 가다말고도 희귀한 나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차에서 내려 소나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런데 소나무를 보니 가슴 높이 정도에 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인다. 어떻게 된 일인가하여 밑동서부터 자세하게 살펴보니 틀림없는 연리목이다. 두 그루의 나무가 함께 자라다가, 이곳부터 연리목이 되었는데, 밑과 위가 완전히 붙어버렸다.



정이품송을 닮은 소나무의 밑에 구멍이 나 있다

희귀한 연리목, 나무의 생김새도 아름다워

이 나무가 여느 나무와 달라 보이는 것은 모양도 아름답게 생겼지만, 연리목이라는 점이 더욱 특이하기 때문이다. 밑동을 보아도 한 나무인지 두 그루의 나무가 붙어있는 것인지 구별이 쉽게 되질 않는다. 다만 나무의 구멍이 난 부분을 보니 그 안에 표피가 잇는 것을 보아, 이 나무가 한 그루가 아닌 두 그루가 붙어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나무를 촬영하고 난 후, 길 건너 배추밭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마을 분들이게 이 나무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저 뒤편에 소나무가 혹 수령이 얼마나 되었는지 아세요?”
“저희들은 잘 몰라요. 어르신들 이야기로는 500년이 지났다고도 하는데”
“저 나무에 혹 전설 같은 것은 없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나무의 구멍을 살펴보니 연리목인 듯하다.

양양군의 아름다운 나무로 선정되어

더 이상은 물을 수가 없다. 일손을 놓지 않고 대답을 하시는 분에게, 자꾸만 질문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남면사무소에 문의를 하였더니, 양양군 내에 있는 소나무 품평회에서 이 나무가 아름다운 나무로 선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게 자란 소나무가 그리 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이 나무에는 애틋한 사랑이야기 한 편쯤은 전해지고 있지 않을까?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소나무다. 더구나 두 나무가 붙은 연리목이라는 데에는 한 가지 사랑이야기라도 만들어 주고 싶다.


밑동에도 가운데가 떨어진 것이 보인다. 이 나무는 양양군 소나무 품평회에서 아름다운 나무로 선정이 되었다고 한다.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전설을 붙이기를 좋아하는 우리민족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에 마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다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마 이 나무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을 텐데, 혹 잊은 것은 아닐까? 그런 이야기 한 가지 듣지 못하고 떠나는 발길이 내심 아쉽기만 하다.

우리는 어릴 적에 ‘은진미륵’이라는 사진을, 교과서 등을 통해 한 번쯤은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거대한 화강암 석재로 제작이 된 은진미륵은,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로 보물 제218호로 지정이 되었다. 이 관촉사 은진미륵의 공식 명칭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입상의 높이는 l8.12m나 되며, 고려 초기의 거대석불에 해당한다.

은진미륵은 커다란 불상이라는 점과, 불교적이기 보다는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 당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이다.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삼각형이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과 넓은 코, 일자로 꼭 다문 큰 입이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목은 굵고 삼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고리형으로 매달린 느낌을 준다.


후천세계에 중생을 구제할 미륵불

미륵불은 56억 7천 만 년이 지난 다음에, 그 때까지도 구제가 안 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나타날 부처님이다. 흔히 부처와 보살로 불리어지는 미륵불은 미래불이다. 미륵불은 일반적으로 산이나 들 같은 바깥에 세워진다. 관촉사 미륵입상은 몸은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들었다.

자연암반 위에 허리부분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이 보살입상은 정교하지는 않다. 몸통에 비해 얼굴이 강조되어 아름다운 균형미는 반감되고 있으며, 손의 모양이나 전체적인 꾸밈이 매우 투박하다. 오른손은 가슴께로 끌어올려 손을 안으로 향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을 보아 관음보살로 생각이 든다.





어깨에 걸쳐 입은 가사는 어깨에서 양쪽으로 길게 내리고 있으며 가로무늬가 있고, 몸 중앙 부분으로 몇 개의 U자형 옷 주름을 돌렸다. 가슴께는 매듭을 묶고 있어 고려시대에 보이는 이 지역 특징인 거대불상의 초기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저렇게 큰 돌을 어떻게 올렸을까?

관촉사 사적비에 의하면 이 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 19년인 96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목종 9년인 1006년에 완성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륵보살입상을 제작하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38년이나 걸린 셈이다. 이렇게 거대석불을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하반신의 몸체 위에 어떻게 저 큰 상반신을 올린 것일까? 지금처럼 대형 중장비로도 버거운 무게이다. 그런데 어떻게 상반신을 올릴 수가 있었을까?


거대석불을 조성하는 혜명대사가 석불의 상반신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걱정을 하던 차에, 사제촌에 나타난 동자들이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동자들이 커다란 돌을 놓더니, 그 돌의 주변에 모래를 쌓고 딴 돌을 경사진 모래비탈을 굴려 올라가 위에 놓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혜명대사는 크게 기뻐하여 바삐 돌아와 동자들이 하던 그 방법대로 상반신을 올렸다는 것이다.

결국 그 동자들은 누구였을까? 아마 혜명대사가 석불의 상반신을 올리지 못해 속이 타는 것을 알고, 동자들을 보내 깨우침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거대한 석불의 상반신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보았을까? 아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이렇게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늘이 깨달음을 주는 것만 같다. 이렇게 큰 거대석불은 충청도 지역에서 보이는 지역적 특색이기도 하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은진미륵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그 미래불인 미륵이 도래하는 시기가 어서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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