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까다로운 샘도 다 있다. 샘을 보호하기 위해 샘 위에 전각을 지으면 마을에 돌림병이 돌고, 상여나 시신이 근처로 지나가면 물이 탁해진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샘 이름도 ‘명정(明井)’이라고 한단다. 통영시 명정동에 소재한 충렬사의 입구 길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샘이다.

 

이곳 사투리로 ‘정당새미’라고 부르는 이 샘은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27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우물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그 전부터 있던 샘을 1670년 제51대 통제사인 김경이 중수하여 지금의 샘처럼 조성을 했다고 한다. 샘을 조성한지가 벌써 350년 가까이 되었다.

 

 

 

두 개의 샘이 나란히 자리해

 

샘은 네모나게 조성하여 두 개가 나란히 있다. 위샘은 ‘일정(日井)’이라 부르고, 아래샘은 ‘월정(月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월정 안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 끼어있다. 아마도 청소를 한지가 꽤나 오래 된 듯하다. 월정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두 개의 샘의 물은 맑은 편이며, 샘의 아래쪽에는 길고 네모난 큰 물 가둠 장소가 있다.

 

이렇게 두 개의 샘이 있는 것은 처음에 위샘을 팠는데, 물이 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밑에 샘을 하나 더 팠더니 물이 맑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개의 샘을 판 후 물의 배출량까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샘을 합하여 ‘명정’이라고 부른다. 원래 이 명정은 충렬사에서 전용을 하였으나, 이 근처에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식수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정당새미에 얽힌 전설

 

문화재 담사를 하면서 우물에 얽힌 전설을 많이 들었다. 마을마다 공동우물에는 한 가지씩의 전설은 꼭 있는 법이다. 그 전설 중 가장 많은 것은 ‘샘이 넘치면 마을에 경사가 있고, 마르면 마을에 흉사가 생긴다.’거나 ‘샘의 물자리를 찾는데 지나가는 백발노인이나 노승이 샘 자리를 가르쳐 주었다.’ 라는 등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그런 곳이 없겠지만, 옛날에는 물이 있는 곳에 마을이 생겨났다. 물은 그만큼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하기에 마을에서 사용하는 우물이 탁해진다는 것은, 곧 그 마을의 폐허를 불러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통영의 명정샘에도 이런 전설이 전하고 있다.

 

 

 

명정은 두 개의 우물이 나란히 있다. 일반적인 샘처럼 깊지도 않다. 그러나 물은 얕지만 매우 맑다. 이 우물은 주위로 시신이나 상여가 지나면 물이 탁해진다고 한다. 지금도 이 명정샘 곁으로는 상여가 지나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샘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 개의 샘 위에 팔각정으로 지붕을 만들었더니, 마을에 질병이 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샘은 그대로 노천 샘으로 남아있다. 이 두 개의 샘인 일정과 월정은 그 용도가 다르다. 일정은 충렬사에서 제향을 지낼 때 사용하고, 월정은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우물을 촬영하고 있는데 어느 어르신이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신다. 우물 기사를 쓰려고 사진을 찍는다고 했더니, 얼른 나오라는 것이다.

 

 

 

“다 찍었습니다. 나갈께요.”

“거긴 외부사람이 들어가면 안 되는 우물인데”

“무슨 이유가 있나요?”

“이순신장군의 제향 때 사용하는 우물인데, 외지사람들이 드나들면 부정타거든”

 

그 이야기에 할 말이 없다. 아직도 이곳 우물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명정샘 주변 사람들.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전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마을주민들이 그렇게 영험한 샘으로 믿고 있기에 보존이 잘 되는 것이겠지만.

도솔천(兜率天)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 위에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유순이란 고대 인도의 거리 단위로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대략 11~15㎞라는 설이 있다.

 

도솔천은 육계(六界) 육천(六天) 가운데 제4천으로 미륵보살이 사는 곳이라는 것이다. 도솔천에는 내원과 외원이 있는데,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이며, 외원은 천계 대중이 환락하는 장소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내원과 외원이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 안 깊숙한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도솔산에 자리한 선운사

 

고창 선운사 안으로 들어가면, 선운산 깊숙한 곳에 도솔암이 자리하고 있다. 선운산은 높이 336m이다. 본래 도솔산(兜率山)이었으나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가 유명해지면서, 선운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선운산의 주변에는 구황봉(298m)·경수산(444m)·개이빨산(345m)·청룡산(314m) 등의 산들이 솟아 있다. 선운사를 지나 도솔암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러고 보면 외원에서 내원으로 가는 길인가 싶다.

 

도솔암 극락보전을 지나쳐 위로 오른다. 극락보전은 아미타여래상을 주불로 모시는 곳이다. 흔히 극락전 혹은 무량수전이라고도 명명한다. 조금 오르니 눈앞에 펼쳐지는 기암괴석과 절경들. 순간 자연에 압도당한다. 나한전이 자리하고 있다. 도솔암 나한전은 아라한을 모시는 곳이다.

 

나한은 소승불교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성자를 말한다. 아주 오랜 옛날 이곳 용문굴에 살고 있던 이무기가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혀, 인도에서 나한상을 모셔다가 안치하였더니 이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어진 나한전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천년 세월의 마애불, 그 모습에 압도당하다

 

나한전을 지나면 깎아지른 바위 암벽에 새긴 보물 제1200호인 도솔암 마애불을 만난다. 아마 도솔천을 오르기 위해 이 모든 것이 도움을 주지나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마애불 중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도솔암 마애불은 미륵불로 추정된다. 결국 미륵정토를 가기 위해서는 주변에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연결이 된다는데 놀랍기만 하다.

 

지상 6m의 높이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좌정하고 있는 미륵불. 그 높이가 5m, 폭이 3n나 되며 연꽃문양을 새긴 계단모양의 받침돌까지 갖추고 있다. 마애불의 머리 쪽을 보면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 속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보인다. 아마 이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 있었던 것 같다. 동불암이라는 누각을 세웠던 자리라고 한다. 마애불을 올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기원을 한다. 이 모진 세상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인 도솔천으로 올라가겠다고.

 

 

 

도솔암 내원궁.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전각이 하나 보인다. 마침 사시예불 시간인지 염불소리가 청아하다. 상도솔암이라고 부르는 도솔암 내원궁은 바로 미륵정토인가 보다. 거대한 자연 바위 위에 초석만을 세우고 전각을 지었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다. 주변 경관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해 지장보살을 모신 내원궁. 보물 제280호로 지정이 된 이 지장보살은 고려 후기의 불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사후세계의 주존인 지장보살좌상을 모신 이 내원궁이야말로 인간이 고통 받는 사바세계에서 가장 이상형의 피안인 듯 하다.

 

 

 

누가 세상에 태어나 고통을 받고 싶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사람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복만이라도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도솔암 내원궁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곳이 바로 도솔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마음 하나에 도솔천이 있음을 깨닫는다.

화성 행궁은 마치 미로처럼 연결이 되어있다. 문이 여기저기 수도 없이 많이 있어, 문 하나를 잘못 들면 이상한 곳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처음 화성 행궁을 찾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말이다. “다 비슷비슷해서 특별한 곳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건축의 기법이 비슷하니 다 같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행궁의 건물 하나하나는 그 용도가 다 다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축조된 것이 아니다.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 증측한 것이다. 정조 13년 7월부터 현륭원 천봉을 앞두고 대대적인 구읍치의 관아와 민가의 철거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화성행궁은 팔달산 기슭 아래로 신읍치를 이치하기 시작한 지 2개월 뒤인 정조 13년 9월 말에는, 벌써 신읍에 조성된 관아 건물은 424칸이나 되었다.


화성 행궁 안에 자리한 서리청(위)과 비장청(아래)


행궁을 비롯한 전각이 500칸을 넘어

당시에 행궁 27칸을 비롯하여, 삼문 5칸, 좌변익랑 9칸, 우변익랑 6칸, 서변행각 5칸, 서상고 10칸, 중문 5칸, 내아 34칸, 중문 4처, 객사 20칸, 중문 2처, 향교 51칸, 중문 1처, 군수고 19.5칸, 공수 7칸, 관청 5칸, 창사 60칸, 각처 담장 278칸 등에 이르렀다. 그 뒤 공사는 계속되어 정조 20년에는 화성행궁이 모두 576칸의 규모를 갖게 된 것이다.

정조는 왕위를 양위하고 난 후 이곳에서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또한 이곳을 자신이 추구하던 강력한 왕권의 구심점으로 삼으려고 했을 것이다. 화성 행궁 곳곳에는 그러한 정조의 구상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아마도 서리청이나 비장청도 그 중 한 곳이었을 것이다.

 

서리청(위)과 비장청(아래)의 현판


수라간으로도 사용한 서리청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을 말한다. 서리청은 바로 그 아전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 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2007년 복원하였다.

서리청은 남군영에서 문을 통해 들어갈 수가 있다. 하지만 서리청의 본 문은 5칸의 전각과 마주하고 있는 솟을삼문에 있다. 솟을삼문은 ㄱ자 형으로 되어있으며 중간에 솟을문을 중심으로 우측에 두 칸의 방을 드리고, 한 칸의 문, 그리고 한 칸의 방과 대청을 두었다. 그리고 꺾어진 부분에는 방과 부엌, 그리고 두 개의 방이 있다. 대문채는 모두 9칸이다.


서리청(위)와 비장청(아래) 전각의 측면. 같ㅇ는 5칸이지만 비장청은 서편 한 칸을 마루를 드렸다


화성유수부의 비장들이 묵는 비장청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 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이다.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서리청을 지나 외정리소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정조 13년인 1789년에 세웠는데 정조 20년인 1796년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서리청의 솟을대문과(위) 비장청의 솟을디문(아래). 모두 9칸 ㄱ자로 되어있다


비장청의 규모도 서리청과 흡사하다. 하지만 비장청의 다섯 칸의 건물이지만, 서편 한 칸은 마루를 놓았다. 비장은 조선 시대, 감사나 유수, 병사, 수사, 혹은 견외 사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던 무관을 말한다. 서리청과 비장청은 각각 하나의 기관으로 독단적인 전각을 갖고 있었음도 주시할 만하다.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를 찾아가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이 된 고려시대의 석불입상 한 기가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을 찾아가는 길을 그리 어렵지가 않다. 큰길가서부터 석불입상까지 안내판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으로 세상을 구하러 온다는 부처이다. 미륵불은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석리의 석불입상은 부처로 표현을 하였다. 마을 안에 버티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지나가면서도 쉽게 발견을 할 수가 없다. 높이 4,32m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두 덩어리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허리 아래까지가 한 개의 네모난 석재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밑으로 발까지가 또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사각석주와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된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은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느낌은 한 마디로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가 봄눈 사라지듯 사라졌다고 표현을 하고 싶다. 그 정도로 안면에 온화한 미소가 흐른다. 석불입상의 수인은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다. 가슴 앞으로 표현을 한 손 모양이, 조금은 어색하고 투박해 보인다.

이러한 투박한 모습의 석불들이 고려시대 경기, 충청지방에서 보이는 석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양발의 발가락이 뚜렷하게 보이게 조성한 아래로는, 꽃부리를 위로 향한 연꽃무늬가 새겨진 앙련을 조각한 연화대좌가 있다.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혀있는 이 연화대좌는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이기도 한다.

찬 돌속에 편안한 온기가

석불입상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팔각의 보개석을 이고 있다. 이 석불을 보면서 저 보개석이 인간의 고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석불입상의 커다란 짐을 올려놓은 까닭은, 인간의 수많은 고통을 저리 부처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계신 것이나 아닌지. 그 고통을 이고도 저리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석불입상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억만겁 세월, 스스로를 달굼 질한 수행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어석리 석불입상은 네모난 얼굴에 뺨과 턱이 둥글게 표현이 되고, 눈은 길게 꼬리가 뻗어있다. 오뚝한 코에 작은 입, 그리고 입 주위를 둥그렇게 원을 만들었다. 생명이 없는 찬 석재를 갖고도, 저리 온화한 미소를 표현할 수가 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이 미륵입상을 조성한 석공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네모난 석주처럼 보이는 석불입상. 커다란 돌을 갖고 이렇게 깎아내고 다듬기까지, 석불을 다듬은 장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땀은 또 얼마나 흘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보면 절로 마음속에 고통을 잊게 된다. 아마 이 불상을 조각한 석공이 바로 부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전각은 사라지고 주추만 남아

석불입상 주변을 보면 사방으로 네모 난 장초석이 서 있다.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이 선돌들은 주추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석불입상은 전각 안에 있었다는 것이고, 근처 어딘가에 절이 있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는 고려시대의 미륵불이 유난히 많다.

그것은 통일신라 후기에 일어난 궁예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스로 미륵이라 자처한 궁예가 미륵정토를 염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질문을 쏟아내다가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다. 그런 마음속의 생각으로 인해 잠시 세상의 고통을 잊는다. 아마도 석불입상이 우리에게 주는 마음의 행복이, 결국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법문 한 자락 내린 것이나 아닌지.

비천도(飛天圖). 손목에 묶은 ‘표대’(혹은 복대라고도 한다)를 바람에 날리며, 그 표대로 하늘을 날면서 바람의 방향과 이동하는 방향을 알 수 있게 만든다. 생명에 없는 차디 찬 돌에 새겨진 비천도로 인해, 돌이 생명을 얻는다. 아마 비천인들은 그린 많은 화공이나 조각을 하는 장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늘을 날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천도는 범종에 많이 장식되지만, 법당의 천정이나 석등, 부도, 불단, 또는 전각의 외부 단청 등에도 나타난다. 비천은 ‘불국(佛國)’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춘다. 때로는 두 손에 공양물을 받쳐 들기도 하고, 꽃을 뿌려 부처님을 공양을 찬탄한다.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에 떠 있는 비천상은, 도교 설화 속의 선녀를 연상케 한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에 새겨진 비천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 온 비천상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인 허균의 글에 따르면(2005, 1, 14 불교신문) 2000여 년 전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전래될 때 비천도도 그 뒤를 따랐다. 불교의 중국 전래의 통로였던 돈황 막고굴 벽에 그려진 비천은, 인도신화의 건달바나 긴나라의 괴이한 모습이 아닌 도교의 여신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상반신은 배꼽을 드러낸 나체이고, 하반신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속옷 차림이다. 표정 또한 요염하고, 손동작은 유연하고 섬세하다.

이렇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신한 비천상이, 4세기 말경 우리나라의 삼국 시대에 불교와 함께 전해졌다. 불교미술에 수용이 된 비천상은 약간의 양식적 변천을 거치며 한국적 비천상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이후 한국 불교의 모든 곳에서는 비천상이 불교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으면서 나름대로 변화를 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 용주사 보물 범종에 새진잰 비천인

비천상은 나름대로 중요한 우리 미술의 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으며, 어느 절을 찾아가도 비천도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불화 중의 하나다. 이 비천도가 요즈음에는 현대적인 것과 우리 전통예술과 접목이 되면서 나날이 변화를 하고 있다. 요즈음에 그려지는 비천도는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고 있다.

동종에 새겨진 비천도를 보고 반해

아름다운 천인을 그려내는 비천도는 불교미술에서는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야 미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니, 어디 이렇다 저렇다 할 자격이야 있겠는가? 그저 보고 느낀 바를 적는 것이다. 내가 비천도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상원사 동종 등 사인비구가 제작한 보물 제11호 동종에 나타나는 비천도를 보고나서 부터이다.

작가 김선옥의 그림 비천인(2007년 작)

그 다음 절마다 찾아다니며 비천도를 유심히 보고 사진에 담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인가 절집에 들리면 먼저 벽화며 탱화에 그려진 비천도를 찾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은 비천도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나 자신이 천인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음악을 전공한 나로서는 부처님을 찬양하는 천인상이라는 비천도가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가 요즈음 현실적으로 많이 발전한 비천도를 보면, 비파를 타거나 횡적을 불거나 아니면 춤을 추는 비천도도 있다. 심지어는 무당춤을 추는 비천도까지 그려질 정도니, 나날이 변화를 해가는 천인상인 비천도는 이제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장르로 발전을 하는 것인 아닌지 모르겠다.


비천도를 보며 마음은 불국토를 향해

비천도 그 자체만 보면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저 표대를 바람에 날리며 때로는 앉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날아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그 비천상이 주는 느낌은 볼 때마다 달라진다. 어느 때는 그 비천상을 바라보며 함께 하늘을 날기도 하고, 어느 때는 비천인과 함께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런 비천상을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기분은, 스스로의 마음이다. 비천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당시의 느낌이 바로 나란 생각이다. 불교의 교리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그저 전각에 들어서면 절로 머리를 조아리고 참례를 한다. 그리고 비천상을 물끄러미 쳐다보기가 일쑤이다. 하늘을 날고 있는 그 비천인의 모습에서, 굳이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불국토가 따로 있겠는가? 그 비천상을 따르는 마음 하나가 불국토가 아닐는지. 오늘도 마음 한 자락 허공에 띄워 비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세속의 답답함을 훌훌 떨쳐내고, 어디론가 가을바람에 실려 떠나가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려니.(위 사진은 고기와에 그려진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인/ 김선옥 작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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