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찾아가는 곳이 바로 궁이다. 이곳저곳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 안에서 벌어졌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억해보곤 하는 일이 좋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구경하다가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멋들어지게 지은 전각들이 지붕을 맞대고 늘어선 궁에, 왕이 묵는 강녕전과 왕비가 기거하는 교태전의 지붕에는 용마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경복궁의 강녕전은 경복궁 안에 있던 왕의 침전이다. 태조 4년인 1395년 사정전의 북쪽에 세웠다. 그 뒤 세종 15년인 1433년(에 중수했으나 명종 8년인 1553년에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다. 이후에도 몇 번 소실이 되고 다시 짓기를 반복했다.

 

 

수차례 수난을 당한 왕과 왕비의 처소

 

경복궁 안에 있던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는 없었다. 세종 25년인 1443년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명종 8년인 1553년에 강녕전과 함께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교태전도 강녕전과 함께 수차례 소실되고 중건하기를 반복했다. 1920년에는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서 헐려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강녕전과 교태전의 지붕을 보면 용마름이 없다. 날렵하게 치켜 올라간 지붕위에 용마름이 없는 지붕은 무엇인가 좀 허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허전함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하게 만든 것이 바로 강녕전과 교태전의 멋이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에는 용마루가 없으나, 강녕전 옆의 건물에는 용마루가 있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이곳 역시 용마루가 없다. 이는 왕과 왕비가 바로 용이기 때문이다. 즉 한 지붕밑에 용이 둘일 수 없다는 사고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왕과 왕비의 침전 지붕에는 용마름을 올리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바로 왕이 용이기 때문이다. 왕과 왕비는 부부니 일심동체고, 당연히 왕비의 침전에도 용마름을 얻지 않은 것이다. 딴 건물과는 달리 용마름이 올려지지 않은 강녕전과 교태전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

 

‘어처구니’는 무엇일까?

 

가끔 TV 오락프로에 보면 궁에 가서 ‘어처구니’라는 것을 갖고 내용을 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궁궐에는 어처구니라는 것이 있다. 흔히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궁궐의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있는 것이다. 서역을 갔다 온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언제 우리의 궁궐로 온 것일까? 이 궁궐 처마에 올라타고 있는 잡상을 어처구니라고 한다.

 

국어사전에서 어처구니를 찾아보면 '상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도 '어처구니가 없다'라고 한다. 이때의 어처구니는 요철도 구멍도 없이 꽉 막혀 도통 통하지가 않는다는 말의 뜻을 갖고 있다.

 

추녀마루에 올라앉은 잡상

 

'어처구니'는 한자어의 요철공(凹凸孔)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들어가고 나옴의 요철과 구멍의 합성어로 된 말인데 이것이 변하여 요철이 '어처'가 되고 공이 '구녕'이 되었다가 다시 '구니'로 되었다는 것이다. 말의 변화야 어찌되었건 앞뒤가 꽉 막힌 사람들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재앙과 화마를 막기 위한 장식

 

이 어처구니가 궁궐의 지붕 위에 있는 잡상이다. 지붕위에 어처구니를 올리는 이유는 이러하다. 궁궐을 지을 때 기와를 올리는데 기왓장의 측면에 계단식의 홈이 한 줄 파여 있다. 이것은 빗물이 새지 않도록 정밀하게 맞물려지도록 하는데 이것을 '어처'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어처가 없다면 기와의 줄을 맞추기가 쉽지가 않다.

 

잡상은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11개 까지 올린다

 

즉 어처구니는 이 ‘어처공’이라는 말이 된다. 이 어처를 막기 위한 것이 바로 흙으로 구워 만든 동물이다. 흔히 잡상이라고 하는 어처구니는 올리는데 순서가 있다. 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태는 취두라 하고, 새 꼬리 모양은 치미, 망새라고 부른다. 용두는 취두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내림마루 끝에 있으며, 그 밑 추녀마루에 잡상을 올린다.

 

잡상이 서 있는 순서를 보면 대당사부라는 삼장법사가 맨 앞에 무릎에 손을 짚고 서 있다. 그 뒤로는 손행자(孫行者)라 불리는 손오공,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사오정),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나토두(羅土頭)의 순이다. 이 장식들은 잡귀들이 건물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잡상은 궁궐의 처마마루에 올려 잡귀들의 범접과 화마를 막았다

 

이 중에서 마화상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잡상이다. 삼살보살은 세살, 겁살, 재살 등 살이 끼어서 불길한 재앙이다. 이것을 막고 있는 잡상이다. 천산갑은 인도, 중국 등지에 분포된 포유동물의 일종이다. 머리 뒤통수에 뿔이 돋아있다고 하는데 이 동물이 잡귀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잡상들은 언제부터 처마에 올라가 있을까? 기와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고조선 말기라고 한다. 그러나 고분벽화 등에 그림에도 잡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삼국시대나 고려의 와편에도 잡상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이후가 될 것 같다. 잡상은 아무집이나 올리는 것이 아니다. 궁이나 그와 관련된 건조물에만 올린다. 적게는 3개에서부터 많게는 11개까지 올린다. 알고 돌아보는 궁궐상식, 아이들에게 자랑삼아 설명을 해주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마곡산 줄기 부처박골에 가면, 마애보살좌상을 선각한 바위 옆에 또 하나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고려중기 이후에 조각된 것으로 설명이 된, <소고리 마애삼존석불>이 있다. 바위 밑에는 누군가 치성을 드린 듯 촛불이 커져있다.

이천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삼존석불을 바라보다가 한참이나 웃었다. 그 모습이 지금까지 보아오던 마애불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마애삼존석불을 보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우리가 흔히 즐겨있던 손오공의 이야기인 서유기가 삼존불 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 만의 생각이겠지만, 이 삼존석불 안에 서유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애삼존석불은 중앙에 본존불을 크게 돋을새김 하였다. 높이는 203cm인데 얼핏 보니 서유기의 손오공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혹은 다시 보면 저팔계와도 닮았다. 원래는 손오공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누군가 코를 쪼아내서 저팔계와 비슷한 모습도 하고 있다.

마애삼존석불이 서유기를 본뜬 것은 아닐까

서유기는 중국 명대의 장편소설이다. 오승은이 지은 책으로 승려인 현장이 천축국인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온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이야기다. 서유기에 나오는 현장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로, 602년에 태어나 664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현장을 따르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각각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삼장법사를 따라 불경을 구하러 인도를 가면서 81차례나 모험을 한 끝에 불경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소고리 마애삼존석불을 보다가 갑자기 서유기가 생각이 나는 것은 왜일까?


이 마애삼존석불은 소고리 부처박골에서 산을 향하고 있다. 모두가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두 다리를 결가부좌한 좌상이다. 본존불과 양편이 협시불, 모두 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좌협시 보살은 60cm, 우협시 보살은 93cm의 크기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본존불은 손오공, 좌협시 보살은 사오정, 우협시 보살은 삼장법사를 닮았다.

마애불의 추정연대가 혹 1500년 이후는 아닌지?

고려중기 이후라고 하면 1150년 이후가 된다. 만일 이 마애삼존석불이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한 것이라면, 손오공을 주인공으로 한 서유기를 지은 시기와는 연대가 맞지를 않는다. 마애삼존석불의 문화재 설명문에는 막연히 고려 중기 이후로만 적고 있다.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마애삼존석불이 혹 150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서유기를 지은 오승은은 1500년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혹 명대의 이 책을 보고, 누군가 그 서유기의 이야기를 마애불로 표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삼존석불은 아무리 보아도 서유기를 도식화해서 만든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애삼존석불의 본존불을 보면 콧구멍을 뚜렷하게 표현했다. 눈이나 생김새도 손오공을 닮았다.

얼핏 보아도 일반적인 부처의 상이 아닌 손오공이라는 생각이다. 함께 동행을 한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중앙에 본존불을 보면 무엇이 생각나느냐고. '손오공'이라는 대답이다. 그렇다면 나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남들도 왜 대뜸 손오공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삼존불 안에 손오공, 사오정, 삼장법사가 있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진 본존불. 고려조나 조선조의 마애불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전혀 다른 조각의 형태. 그리고 토우 등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 등, 이 삼존석불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이목구비도 도식화 되어있으며, 일반적인 불상조성의 규범에서 벗어나 있다. 그저 관 위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두광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협시보살의 형태도 마찬가지다.

좌협시 보살을 보면 높은 관을 쓰고 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삼장법사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고 있다. 본존불과 좌협시 보살이 삼도를 표현한데 비해, 우협시 보살은 삼도가 없다. 머리는 맨머리인데 두건 같은 것을 쓰고 있다. 서유기의 사오정과 같은 모습이다. 마애삼존석불을 돋을새김한 바위도 이 지역에서 보이는 바위와는 재질이 다르다.


바위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있다. 옆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의 돌과는 전혀 다른 석질인 듯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바위가 여기 와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저 마애삼존불이 내 눈에는 서유기의 인물들 처럼 보이는 것일까? 그동안 너무 많이 돌아다녔더니, 이젠 머리까지 이상하게 되어가는가 보다.

인근에는 없는 석회암같이 구멍이 뚫려있는 바위. 그리고 서유기의 손오공, 삼장법사, 사오정과 같은 인물의 표현. 이 마애삼존석불을 떠나면서도 머릿속이 혼돈스럽다. 왜 저것이 서유기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래서 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얻기 위한 여정이 계속되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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