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기는 정월의 민속놀이이다. 장치기가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1920년 동아일보에 보면 수원군 황구지천에서 전국의 남녀 32개팀이 보여 시합을 벌였다고 적고 있다. 수원에서는 현재 수원농생명과학고의 전신인 수원농고 학생들이 수원장치기를 연습하여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를 하기도 했다.

 

장치기 시합을 하는 도중에 반칙을 범해 밖으로 나가 벌을 학생들의 모습도 재미있다. 경기를 마친 다음에는 이구동성으로 지역 학교에 많이 알려, 장치기 경기 한마당을 벌였으면 좋겠다고들 한다. 수원시에서 재현이 되어 경기도 여러 곳에서 재현이 된 우리 전통의 공놀이 장치기는 정월의 흘겨운 민속놀이 한마당이다.

 

 

 

 

 

 

 

 

서구화된 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조선조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의 강압적인 우리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해 수없이 사라져간 우리의 풍속들. 그 안에는 상원일이라고 하는 정월 대보름의 놀이들이 있었다. 공동체를 창출하고 마을과 마을 간의 단합을 일구어 낸 수많은 놀이들이, 단지 옛것이나 미신이라는 폄하로 인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실 정월 대보름은 우리민족에게는 4대 명절 증 하나였다. 설날, 추석, 동지와 함께 정월대보름을 큰 명절로 잡은 것이다. 이렇게 정월 대보름을 큰 명절로 잡은 이유는 정월 초사흘부터 시작한 각종 공동체놀이들이, 정월 대보름을 기해 마무리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월 초하루에 설을 쇤 사람들은 초이틀은 귀신 날이라고 해서 근신을 하다가, 하늘에서 평신(平神)이 하강한다는 초사흘부터 지신밟기 등 각종 놀이를 즐기기 시작한다.

 

두레싸움은 서로 상대마을의 두레기에 달려들어 꼭대기에 꽂힌 꿩장목을 빼앗는다

 

3일부터 시작하는 대동놀이들

 

음력 초3일되면 각 마을마다 두레패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한다. 지신밟기는 마을마다 한 집도 빠짐없이 다니면서 고사덕담(告祀德談)’인 축원을 해주는데, 문굿서 부터 시작을 해 우물, 마구간, 부엌, 장독대 등을 돈 후 대청에 마련해 놓은 고사상 앞에서 덕담을 한다.

 

고사덕담은 그 집이 일 년 동안 안과태평하기를 바라는 축원굿으로 일 년 간의 액을 막아내는 홍수풀이부터,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농사풀이 등 창자의 능력을 따라 다양한 소리를 한다. 지신밟기를 마치면 대청에 마련한 술과 떡을 나누고 난 뒤, 고사상에 올려 진 쌀과 돈을 갖고 다음 집으로 향한다. 그 쌀과 돈은 마을의 기금으로 사용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먼저 지신밟기를 하기 위해 풍물패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고 하니, 우리민족은 정월에 하는 놀이가 풍농과 안과태평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만 같다. 이렇게 마을을 돌면서 지신밟기를 하던 두레패들이 길에서 만나게 되면, 상대방에게 먼저 기를 숙여 인사를 하라고 소리를 친다. 그러다가 급기야 상대 두레기의 기의 상단에 꽂힌 꿩장목을 뽑게 되는데, 이것이 정월에 열리는 '두레싸움'이다.

 

두례싸움에서 먼저 꿩 장목을 빼앗긴 마을은, 상대방의 마을을 '형님마을'로 일년간 대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긴 마을에서는 빼앗은 꿩장목을 기에 함께 달고 다니기도 했다. 진 마을에서는 일 년 동안 장목이 없는 두레기를 들고 다녀야만 한다. 

 

수원 고색동 코잡이 놀이( 사진 / 이용창)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줄다리기 

 

음력 정월 14일 밤이나 보름날 마을에서는 줄다리기를 벌인다. 줄다리기는 풍농과 다산, 마을의 안녕 등을 기원하는 기원성 대동놀이이다. 이 줄다리기는 처음부터 큰 줄을 갖고 줄다리기를 하기도 하지만, 처음에는 마을마다 작은 새끼줄을 갖고 줄을 당기고, 진 마을의 줄을 이긴 마을 줄에다가 더하게 된다.

 

그 줄을 갖고 이웃의 이긴 마을끼리 서로 줄다리기를 하면 조금 굵은 줄이 된다. 그것이 또 다른 마을과 시합을 하면서 자꾸만 더해져, 나중에는 얌용과 숫용이라는 거대한 줄이 된다. 이 줄을 암용의 용두는 넓게 하고, 숫용은 가늘고 뾰족하게 제작한다. 이 숫용의 용두를 암룡의 용두에 밀어 넣어 비녀라고 부르는 장목으로 고정시킨다.

 

이렇게 제작된 용을 당기게 되는데, 줄을 당기게 되는 이유와 용도는 마을마다 차이가 난다. 어느 곳은 여자와 남자로 나누어 당기기도 하는데, 이 때는 여자가 이겨야 풍농이 든다고 한다. 다산과 풍농이 필요한 시기에 나타난 속설이다. 또 이 줄을 마을 입구에 놓아 액을 막거나, 줄을 이용해 보를 막기도 한다. 어느 곳에서는 이 줄에 액송기를 꽂고 물에 떠내려 보내, 모든 액을 막아내기도 했다.

 

우리고장 고색동에는 코잡이놀이라고 하여 줄다리기가 전해졌다. 한 때 중단되었던 고색동 줄다리기는 인근 12개 마을에서 풍물패가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삭전(索戰)이라고도 부르는 줄다리기의 기원은 아주 오래전에 기인한다. 고색동 줄다리기도 언제부터 시작하였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무척 오래전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1796년 수원 화성의 축성 이후에는 양반과 평민이 나누어 줄을 당겼다고 전해지고 있는 고색동 줄다리기는, 일제 강점기는 1960년대 까지도 전승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의동 길마재줄다리기 역시 영통구 길마재와 용인시 수지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줄다리기를 하였다. 남자들은 동쪽 줄인 숫줄을 잡고 여자와 이이들은 서쪽 암줄을 당겼는데, 결과는 늘 암줄이 이겼다고 한다. 이는 여자들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장치기는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활달하게 하기 위한 놀이였다

 

한 겨울의 움츠려든 몸을 푸는 장치기

 

장치기는 마상유희인 격구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정조대왕 당시 펴낸 <무예도보통지>의 무예 24기에도 마상무예 중 격구가 포함되어 있다. 격구는 고려조에 들어서 여자들도 즐겼으나, 너무나 요란한 치장으로 인해 중지를 시키기도 했다. 그러한 격구가 민간놀이로 변하게 된 것이 장치기라고 본다.

 

장치기는 간단하게 공을 몰고 다니는 이라는 나무막대와, 소나무공이나 짚을 이용해 만든 얼레공만 가지면 누구나 즐길 수가 있다. ‘얼레공치기라고도 부르는 장치기는 수원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3121일자 <동아일보>는 서탄면 황구지천에서 전국의 32개 남여 팀이 참가한, '전 조선 얼레공대회'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사보 124일자부터 30일자까지에는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얼레공대회를 개최한다는 예고가 실렸으며, 참가할 각 팀의 선수는 5명으로 한다고 하였다.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열기로 한 전조선얼레공대회에, 구경꾼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장소를 서탄면 황구지천으로 이동을 했다는 것이다. 예전 수원은 장치기를 재현시켜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 겨울동안 움츠려들었던 몸을 풀고, 봄을 맞이하여 농사를 지을 힘을 비축하기 위한 놀이로도 많이 이용을 한 것이 장치기였다.

 

액송기를 꽂은 줄을 강물에 띄워보내는 액송의식 

 

그 외에 사라진 놀이

 

정월 열나흘이 되면 마을의 공터에 달집을 세운다. 대나무와 솔가지, 짚을 이용해 쌓은 달집은 보름을 맞아 농사를 짓기 전에 해충을 없애는 기능을 갖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해동(解冬=겨울을 녹인다)’의 뜻이 더 깊다. 쥐불놀이와 함께 대보름을 맞이하기 전에, 모든 재액을 태워버린다는 속설을 갖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라는 짚단으로 만든 것을 손에 들고 있다가, 달이 뜨기를 기다려 제일먼저 달이 뜬 것을 본 사람이, ‘망월(望月)이여를 외치면서 달집으로 달려가 불을 붙인다. 달맞이를 할 때는 임산부인 여자가 먼저 보면 남자아이를 낳고, 병자가 먼저 보면 병이 완쾌된다고도 한다. 처녀가 먼저 보면 시집을 가고, 총각이 먼저 보면 장가를 간다고도 한다.

 

달집태우기(사진 / 이용창)

 

이렇게 다양한 우리들의 상원일의 놀이는 이 외에도 마을과 마을이 벌이는 횃불싸움이나, 수원의 여러 마을에서 나타났던 석전(石戰=돌싸움), 그리고 일 년 동안 건강한 몸과 다리를 튼튼하게 한다는 다리밟기 등 많은 놀이가 전해지고 있었다.

 

정월 보름날 아침에는 연에다가 서원을 적거나, 집안의 애환을 적어 날려 보내는 액연날리기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정월 대보름의 놀이들은 모두가 풍농과 풍어, 마을의 안녕, 가내의 안과태평 등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민족은 그 안에서 공동체를 창출했으며, 놀이를 하면서 이웃과 하나가 되는 우리라는 단단한 결속력을 다졌던 것이다.

 

그러나 작금에 들어 재현이 되는 많은 놀이들을 보면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는 사라진 채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전시성민속이 되어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민족의 상원일의 놀이는 단순한 연희가 아닌, 그 내면에 깊은 사고를 지닌 놀이였기 때문이다.

'장치기' 또는 '얼레공치기', '짱치기'라는 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193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연희가 되어왔던 놀이니, 중단된 지가 그리 오래지 않다. 이 장치기를 시합으로 할 때는 '장치기'라 하고, 놀이로 할 때는 '장채놀이'로 부르기도 한다.

 

1931년 2월 1일자 <동아일보>는 서탄면 황구지천에서 전국의 32개 남여 팀이 참가한, '전 조선 얼레공대회'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또 <동아일보> 사보 1월 24일자부터 30일자까지에는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얼레공대회를 개최한다는 예고가 실렸으며, 참가할 각 팀의 선수는 5명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장치기는 우리 민속 중 유일하게 나타난 구기종목이기도 하다. 장치기는 놀이방법이나, 놀이를 할 때 사용하는 기구 등이 간단하다. 놀이를 하기 위해선 짚이나 나무공이를 이용해 만든 '공'과, '장'이라고 하는 나무로 만든 채만 있으면 된다. 공은 짚을 엮어서 만드는 방법을 택했으며, 장은 물푸레나무 등을 이용해 길이가 3~5자 정도에, 끝이 45도 앞으로 휘어져 10~15cm 정도 되는 것을 사용한다.

 

모두가 즐겨하던 전통 공놀이

 

 

. 얼레공은 짚을 꼬아 둥굴게 만들고. 장은 물푸레 나무 등으로 만든다

 

 

 

장치기는 1950년대만 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놀이였다고 한다. 어른들은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넓은 논바닥에서 마을끼리 대항을 하기도 했단다. 장치기 놀이에는 특별한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몇 명이라도 모이면 편을 갈라 하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치기가 꼭 놀이로서만 전승되어 온 것은 아니다. 장치기는 겨울에 운동량이 부족할 때, 몸을 움직여 원활한 신진대사를 돕기위해 하는 '운동'이 되기도 한다. 또 일부 마을에서는 얼레공을 자신의 마을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마을로 복을 끌고 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얼레공을 짚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것이 풍농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간단한 도구를 갖고도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놀이. 장치기는 그저 공터만 있으면 연희가 가능한 놀이다. 1932년 전국에서 남녀 32개 팀이 모였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전역에서 보편화 된 놀이였음을 방증한다.

 

장치기는 어떻게 전해졌을까?

 

 
장을 이용해 짚을 꼬아만든 장을 쳐낸다
 
 
장은 끝이 구부러져 얼레공을 몰아가기에 편하다. 필드하키와 흡사하다.

 

어떠한 놀이든지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다. 장치기도 예외는 아니다. 장치기의 원조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진 '격구'로 본다. 고려 태조 1년인 937년 기록에 격구장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격구는 그 이전부터 성행한 놀이임을 알 수 있다. 고려 때는 여자들이 말을 타면서 하는 마상격구를 할 때, 그 치장의 화려함이 지나쳐 한 때 금지시키기도 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태조와 정종이 격구를 즐겼으며, 세종 7년인 1425년엔 무예연습의 필수과목으로 격구를 선택하기도 했다. 정조는 격구를 24기 무예의 한 종목으로 택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안에 수록하였다. 이러한 반가의 대표적 놀이인 격구가, 언제부터 민간으로 전해져 장치기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조선조 중기 이후에 급격히 쇠퇴한 반가의 놀이인 격구가 이때를 전후해 민간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본다.     

 

우리 놀이를 되살릴 수는 없을까?

 

 
양팀의 사람들이 서로 얼레공을 빼앗기 위해 채로 얼레공을 쳐내고 있다.

 

나는 오래 전에 수원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장치기를 가르쳐 재현시킨 적이 있다. 경기도민속경연대회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까지 참가를 시키기도 했는데, 장치기는 누구나 손쉽게 배울 수가 있어서, 청소년들의 놀이로 장착을 시켜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드하키와 비슷한 놀이인 장치기는 장이라는 나무막대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때로는 격한 몸싸움으로 부상을 입기도 한다. 그러니 그런 부상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만 보완한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우리 전통의 놀이다.

 

연세가 80세 이상이신 분들 중에는 아직도 장치기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장치기 놀이에는 별도의 골문이나 골키퍼가 있진 않다. 그저 넓은 공터 양편에 돌을 놓아 문을 만들고, 편을 갈라 얼레공을 몰고 가 그 문 안으로 들여보내면 된다. 사라지는 우리 전통놀이인 장치기.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아이들의 체력을 위할 수 있는 우리 전통놀이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좀 더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갖게 되지 않을까?

 

일 년 내내, 계절에 구애를 받지 않고 들에서 뛰어놀던 장치기. 우리의 전통 공놀이인 장치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쳐, 예전과 같이 전국의 남녀 팀이 모여 함성을 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한이 많은 민족이라 새도 울고, 바람도 운다고 표현을 한다.’ 정말로 그런 표현을 한다. 모든 것을 운다고 표현을 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운다는 표현이 정말로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것을 표현하는 것일까? 그런 표현으로 인해 우리민족이 한의 민족이라는 것이다.

또 한 예는 요즈음 성시를 누리고 있는 노래방을 이야기한다. 가슴 속에 맺힌 한이 많아서 그것을 풀기 위해 노래를 하다가 보니, 그렇게 노래방이 수도 없이 들어차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들은 흔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한이 많아서일까?

2010년 남한강 정월대보름 한마당에서 기싸움을 펼치고 있다. 이렇게 역동적인 놀이가 바로 우리의 민족성이다.

우리민족은 원래 강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민족처럼 강한 민족도 드물다, 이웃 나라들과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꿋꿋하게 지켜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월에 따라 통치자에 의해 명칭은 바뀌었지만, 그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딴 나라들처럼 이민족에게 나라를 넘겨주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것 하나를 보아도 참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 민족이다.

이러한 우리민족의 성정은 늘 강해야만 했다. 그 강함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전래놀이들이다. 그 놀이 안에 보면 공동체가 살아있다. 나를 위하기보다는 남을 위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 민족성이 놀이 안에도 잘 나타난다. 우리 놀이들을 보면 경쟁이 심하다. 말은 경쟁이라고 할지 몰라도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투쟁의 심성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 때는 여자들이 말을 타고 격구를 즐겼다. 그 사치가 지나쳐 나라에서 금지를 시키기도 했지만, 적어도 고려 때까지는 우리민족이 그런 한을 갖고 사는 민족이 아니었다. 고대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3일 밤낮을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그 노래가, 그 춤이 과연 한이었을까? 아니다.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을 올렸을 것이다. 한이 아닌 흥이란 뜻이다.


장과 얼레공을 갖고 하는 장치기는 승부성 민속이다. 격구가 변해서 민속 장치기로 변했다고 한다.

왜 한(恨)스런 민족으로 바뀌었을까?

고려 때까지만 해도 역동적이던 우리민족은, 조선조에 들어서 여성들이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개방적이던 여성들이 울안에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반상의 차가 커지면서 양반가의 여인들은 ‘남존여비’라는 논리에 얽매어 문밖출입을 삼가고, 담장 안 생활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 민초들은 양반가의 수탈로 인해 하루하루를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양반가의 수탈이 결국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또한 힘든 삶의 연속이다 보니, 여인들이 살림을 꾸려가기가 점점 버거워졌다. 그런 연유로 여인들은 점점 늘어간 것이 한숨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많은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여인들로서는, 나오느니 한숨이요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시집살이’ ‘꼬댁각시‘ 등 한탄조의 노래가 절로 흘러나오고. 작업요의 대부분이 한탄조의 가사와 음률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보니 생활의 고통, 여자를 천시하는 풍조, 이런 것들이 자연 ’흥‘에서 ’한‘으로 변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줄다리기 역시 역동적이다. 그리고 승부성 민속이기도 하다.

우리민족은 원래 역동적이다

우리민족이 ‘흥겨운 민족이냐?’ 아니면 ‘한스런 민족이냐?’는 간단하다. 원래는 지극히 흥겨운 민족이었고, 그 흥이 곧 삶이었다고 본다. 우리들의 각종 놀이에서 나타나는 동작이나 내용을 보면, 지극히 역동적이다. 그러한 놀이문화는 정월 대보름에 나타나는 줄다리기, 장치기, 기싸움 등 모두가 승부성 민속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 내면을 보면 풍농의 기원이나, 겨우내 사용하지 않던 힘을 비축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의 대부분이 승부성 놀이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민족의 삶이 강하고 패기가 넘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민족이 왜 그렇게 한스런 민족으로 변한 것일까? 그것은 조선조에 들어 양반의 세에 억눌리고, 오랜 외침에 찌들어버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조에 들어서 수없이 많은 외침과, 당쟁, 그리고 남존여비 사상. 이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만들었고, 수없는 환란 속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연 소심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러한 소심함이 한과 연결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성정이 바뀐다고 한다. 불안한 환경이 바로 우리민족이 한의 민족이 되게 만든 요인이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혹은 “밤새 안녕하십니까?” 라는 인사말은, 바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에서 나타난 인사라고 본다. 밤이 지나고 나면 주변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는 “흥”이 사라지고 만다.

때로는 격한 승부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한다. 바로 우리 민속이 갖는 흥의 결정체이다.

한은 외적인 영향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런 영향을 이겨내지 못할 때, 스스로 한을 도출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적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외침과 내란, 그리고 일제의 침탈과 한국전쟁, 그리고 불안하기만한 삶의 연속. 이런 것들이 바로 한을 만들어 낸 요인이다. 이런 것을 배제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우리의 본 모습인 ‘흥겨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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