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만의 공간인 사랑채와 외별당

99칸 양반집은 독립된 전각만 해도 9동이나 된다. 그 독립된 건물들이 대지의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나름대로의 특성에 맞게 건물이 지어졌다. 현재는 한국민속촌 안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이 많은 건물들이 수원 팔달산을 배경으로 남아있었다고 하면 장관이었을 것이다.

2월 18일 답사를 한 한국민속촌. 사진을 촬영하면서 양반집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만도, 아마 족히 한 시간은 더 걸린 듯하다. 솟을대문을 들어가 우측으로 바라보면 바깥사랑채와 줄행랑이 이어진 곳이 있다. 그곳에 문이 있으며, 그 문을 나서면 사랑채가 있고, 담장을 사이로 외별당이 있다.

사랑채

바깥사랑채 뒤편

교육과 생활을 위한 사회적 공간


사랑채는 ㄱ 자형이다. 9칸 정도의 큰 공간을 마현한 사랑채는 집안의 가장이 사용하는 곳이다. 이곳은 바깥사랑이 손님들이 묵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사랑채는 집 주인이 기거를 하면서 자녀들의 교육을 시키는 곳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이곳은 남자의 사회적 공간이다.

99칸 집의 사랑채는 큰 대청을 사이에 두고 사랑방인 큰 방과 건넌방이 있다. 큰 방 아래는 복도를 통해 마루방으로 된 서고가 있으며, 옆에는 상노가 거처하는 작은 온돌방이 한 칸 마련되어 있다.

너른 대청과 마루방을 둔 사랑채

건넌방 끝에도 마루방을 두고 있다

일각문을 통해 대문을 거치지 않고도 출입이 가능했던 사랑채

이 사랑채의 특징은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은 맞배지붕이다. 큰 방인 사랑방은 주인이 사용하지만, 건넌방은 자녀들 중 남자아이들이 이곳에 묵으면서 학습을 하던 곳이다. 건너방 옆으로는 넓은 마루방이 또 마련되어 있다. 일반적인 반가의 사랑채보다 그 규모가 더 크기 때문에, 6,25 한국전쟁 뒤에는 이 사랑채를 검찰청으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풍류를 즐기던 외별당

아마 이 99칸의 남창동 양반집에서 가장 멋스러운 건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외별당이 될 것이다. 외별당은 남자들의 공간이다. 사랑채에서 일각문을 통해 담장 너머로 있는 외별당은 안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풍류를 즐기던 곳 외별당

외별당 앞에는 무정과 연못 등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세운 외별당은 양반집 안에서 가장 멋지게 구성이 되었다 

외별당은 ㄱ 자형의 마루 중심의 건물이며, 온돌방과 대청, 누마루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 외별당은 한편에 작은 방 4개를 꾸며놓고, 대청과 누마루를 드렸다. 이 집에 이렇게 작은 방이 많거나 대청을 넓게 둔 것은, 특별한 손님을 맞이하거나 모임, 풍류 등을 즐기던 곳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외별당은 주인의 사회활동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날렵하게 처마가 솟아오른 팔작지붕도 아름답지만, 외별당 앞에는 누정과 연못을 두어 온치를 더했다. 누마루는 장초석을 밑에 놓고 올려 지었으며, 남은 면은 기단을 높이 쌓아올려 외별당을 지었다. 외별당은 또 다른 특별함이 있다. 바로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돌계단을 놓아 어느 곳에서나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풍류를 즐기다가 쉽게 건물의 밖으로 이동을 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팔작지붕의 날렵한 처마 끝이 아름답다

풍류를 즐기던 외별당은 사방에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별한 남성들만의 공간인 외별당. 독립적인 공간으로 가장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곳이다. 수원 남창동 팔달산 밑에서는 한 때 이 외별당에서 흘러나오는 풍류소리가, 팔달산을 울리지나 않았을까? 괜스레 외별당 주위를 맴돌면서 별별 생각을 다해본다.

화성행궁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신풍루(新豊樓)’이다.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정조 14년인 1790년에 세운 누문이다. 처음에는 6칸으로 된 문을 세우고 조심태가 편액을 써서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정조는 1795년에 문의 이름을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명칭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정조는 이름을 고치고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를 벌리기도 했다.



2월 13일, 신풍루에 오르다

정조 18년인 1794년 가을 행궁을 대대적으로 증축할 때는 누대 양편에 군영을 설치하고, 정조 19년인 1795년에는 누문 앞으로 길이 114척, 넓이 35척의 돌다리를 설치하여 ‘신풍교’라 이름하였다.

2월 13일(월) 화성 행궁을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간 곳이지만, 신풍루는 아래에서만 사진을 찍었을 뿐, 위로는 한 번도 올라가지 못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출입을 금한다는 푯말 때문이다. 화성사업소에 들려 신풍루를 촬영하겠다고 허락을 받고 신풍루로 올랐다.

1907년 헤르만 산더의 사진


신풍루는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123번지에 소재한다.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중인 1907년 헤르만 산더의 사진에는 신풍루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신풍루 위로 올라보니, 팔달문 밑으로 놓인 행궁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문밖으로는 팔달문에서 장안문으로 가는 도로와, 건너편 창룡문 쪽으로 가는 도로가 보인다.

아마도 이 행궁을 짓고 난 정조 당시에도 이곳 신풍루 앞은 이렇게 길이 나 있었을 것이다. 뒤로는 팔달산을 끼고, 앞으로는 넓은 도로를 볼 수 있는 곳, 이 신풍루의 누각에 올라 정조는 마음속에 담은 큰 뜻을 펼치려고 했을 것이다.




장초석으로 바친 기둥, 장엄함의 상징

6칸 규모의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신풍루는 위로는 누마루를 놓고, 아래는 3개의 얼문을 설치하였다. 정조는 나중에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내려와 살 생각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행궁의 정문 또한 남다른 신경을 써서 축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어른 키만한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려 이층 누각을 받치게 하였다. 안쪽으로는 바깥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장초석을 사용하여 웅장함을 더했다. 삼문은 판문으로 해서 달았으며, 문의 좌우에도 판벽을 둘렀다.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누각은 가파르다. 그만큼 누각을 높였다는 것이다. 누마루를 깐 이층에는 사방을 둘러 난간을 달아냈다.


이층 누각으로 오르면 좌우로는 남군영과 북군영의 지붕들이 보이고, 팔달산 쪽으로는 시원하게 공간을 내어 정전의 바깥 출입문인 좌익문을 만나게 하였다. 화성 행궁은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그 행궁의 문인 신풍루. 아마도 이 신풍루의 이름을 직접 지은 정조는, 이 누각 위에서 강한 군주가 통치하는 나라를 그렸을 것이다.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를 찾아가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이 된 고려시대의 석불입상 한 기가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을 찾아가는 길을 그리 어렵지가 않다. 큰길가서부터 석불입상까지 안내판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으로 세상을 구하러 온다는 부처이다. 미륵불은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석리의 석불입상은 부처로 표현을 하였다. 마을 안에 버티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지나가면서도 쉽게 발견을 할 수가 없다. 높이 4,32m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두 덩어리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허리 아래까지가 한 개의 네모난 석재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밑으로 발까지가 또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사각석주와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된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은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느낌은 한 마디로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가 봄눈 사라지듯 사라졌다고 표현을 하고 싶다. 그 정도로 안면에 온화한 미소가 흐른다. 석불입상의 수인은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다. 가슴 앞으로 표현을 한 손 모양이, 조금은 어색하고 투박해 보인다.

이러한 투박한 모습의 석불들이 고려시대 경기, 충청지방에서 보이는 석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양발의 발가락이 뚜렷하게 보이게 조성한 아래로는, 꽃부리를 위로 향한 연꽃무늬가 새겨진 앙련을 조각한 연화대좌가 있다.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혀있는 이 연화대좌는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이기도 한다.

찬 돌속에 편안한 온기가

석불입상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팔각의 보개석을 이고 있다. 이 석불을 보면서 저 보개석이 인간의 고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석불입상의 커다란 짐을 올려놓은 까닭은, 인간의 수많은 고통을 저리 부처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계신 것이나 아닌지. 그 고통을 이고도 저리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석불입상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억만겁 세월, 스스로를 달굼 질한 수행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어석리 석불입상은 네모난 얼굴에 뺨과 턱이 둥글게 표현이 되고, 눈은 길게 꼬리가 뻗어있다. 오뚝한 코에 작은 입, 그리고 입 주위를 둥그렇게 원을 만들었다. 생명이 없는 찬 석재를 갖고도, 저리 온화한 미소를 표현할 수가 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이 미륵입상을 조성한 석공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네모난 석주처럼 보이는 석불입상. 커다란 돌을 갖고 이렇게 깎아내고 다듬기까지, 석불을 다듬은 장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땀은 또 얼마나 흘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보면 절로 마음속에 고통을 잊게 된다. 아마 이 불상을 조각한 석공이 바로 부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전각은 사라지고 주추만 남아

석불입상 주변을 보면 사방으로 네모 난 장초석이 서 있다.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이 선돌들은 주추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석불입상은 전각 안에 있었다는 것이고, 근처 어딘가에 절이 있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는 고려시대의 미륵불이 유난히 많다.

그것은 통일신라 후기에 일어난 궁예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스로 미륵이라 자처한 궁예가 미륵정토를 염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질문을 쏟아내다가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다. 그런 마음속의 생각으로 인해 잠시 세상의 고통을 잊는다. 아마도 석불입상이 우리에게 주는 마음의 행복이, 결국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법문 한 자락 내린 것이나 아닌지.


강릉 선교장. 우리 전통가옥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고택이다. 선교장은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에 소재한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효령대군의 11대 손인 가선대부 이내번이, 전주에서 이곳으로 이주를 해와 1703년에 건립한 집이다. 벌써 300년이 지난 고택이다.

조선조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평가받고 있는 선교장은, 안채, 열화당, 행랑채, 서별당, 동별당, 곳간채와 솟을 문 앞에 따로 떨어져 선교장의 품위를 높이는 정자인 ‘활래정’으로 꾸며졌다. 10대에 걸쳐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전통가옥으로 유명한 선교장. 그 앞에 서 있는 활래정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정자일까?


100년이 지난 뒤에 건립한 활래정

활래정은 선교장을 짓고 난 뒤 100여년이 지난 1816년에 건립이 되었다. 선교장 안에 있는 사랑채인 열화당으로서는 아마도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에는 부족했었는가 보다. 앞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 선교장의 멋을 한층 더 높게 만들고자 했던 마음이 그대로 반영이 된 정자이다.

서쪽 태장봉에서 흐르는 맑은 물. 그 물을 그대로 경포호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까웠는지도 모른다. 선교장의 동별당보다 아래편에 연못을 파고, 그 물을 가둔 것이 오늘 날 활래정이 있게 만들었다. 태장봉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활래정에 잠시 머물다가, 경포호로 빠져 나간다. 결국 활래정은 항상 맑은 물이 고인 것이 아니라, 흐르고 있다고 표현을 해야 맞을 것이다.



손님을 맞는 다실도 겸해

활래정이 딴 정자보다 운치가 있다는 것은, 그 안에 다실을 두었다는 점이다. 물론 어느 정자나 그 안에서 차 한 잔 마시거나, 술 한 잔을 마시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활래정은 다르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정자이다. 석축으로 쌓은 연못의 한편에 세 칸을 걸쳐 놓고, 한편은 물 위에 뜬 듯이 장초석을 받쳐 띄워놓았다.

ㄱ 자 형의 정자는 팔작지붕으로 하고, 사방을 창호를 달았다. 사방 어느 곳에서나 주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자 밖으로는 좁은 툇마루를 놓고, 모두 난간으로 둘러 멋을 내었다. 그리고 연못에는 갖은 수초들을 심었다. 계절마다 연못 속에 있는 수생식물들이 피우는 꽃들이 활래정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활래정은 축대 위에 걸친 부분에는 두 개의 연결된 방과 한 칸의 누마루방을 드렸다. 그리고 꺾인 부분의 연못 위에 장초석을 받친 방은 큰 누마루를 깐 방이다. 겨울에는 따듯한 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여름이면 누마루방에서 시원한 경포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태장봉에서 흘러드는 맑은 물에 시 한수를 띄워 보낼 수 있도록 꾸민 정자이다.

정자의 조건을 두루 갖추다

그런 아름다운 정자에서 괜한 술로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웠는지, 그저 차방을 만들고 차 한 잔에 온갖 정담이 오고갔을 것만 같다. 이번 1월 30일 답사 때와 2007년 2월 6일의 답사 사진을 비교해 본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연못 안에 수위뿐이다. 그 때는 장초석의 일부가 물이 차 가려져 있었다.



해가 지나도 옛 모습 그대로를 지키고 있는 선교장과 활래정. 그래서 이 집이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전통가옥으로 선정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그것을 지켜내는 후손들의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언제 날이 풀려 활래정의 연못에 꽃이 가득한 날, 활래정에 올라 향이 가득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은 것은, 바로 옛 모습 속에서 우리의 선조들을 기억해 내보고 싶어서이다.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만복사지는 사적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만복사는 김시습의 단편소설인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처음으로 세워졌다.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만복사를 찾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갈 때마다 사지가 잘 정리가 되어있어, 기분 좋게 돌아보고는 했다.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소실이 될 때까지,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 서, 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 식 배치를 보이고 있었다. 경내에는 네 점의 보물(당간지주, 석불입상, 오층석탑, 불상대좌)과 많은 석재들이 있다.

사적 만복사지. 우측에 석인상이 서 있다.

새로 선보인 석인상 일기

이번 답사 때 찾아간 만복사지(2010, 9, 18). 그런데 입구 쪽을 보니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석조물 1기가 서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 석인상은 만복사지 당간지주의 남쪽 4m 정도 떨어진 도로변에, 2기가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도로를 운행하는 차량들로 인해, 훼손의 우려가 있는 1기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 석인상은 처음 본 것이다. 두 번이나 이곳을 답사를 했으면서도 보지를 못했다. 아마 4점의 보물을 중점적으로 찾아보는 바람에 놓친 것 같다. 그런데 이 석인상을 보는 순간, 참으로 자신이 참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가 이런 형태의 석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흡사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조각한 목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보지 못한 형태의 석인상

이 석인상은 그 모습이 괴이하기까지 하다. 부정형의 사각형 장초석의 3면에 조각을 하였는데, 사람 모양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얼굴은 노여움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으며, 팔은 몸에 붙인 채로 구부려 무엇인가를 꽉 잡고 있는 형태다. 팔에는 두터운 팔과 근육을 표현 한 듯한 선이 나 있다. 주변을 돌면서 보아도 정확한 모습은 아니다. 자연석인 돌을 이용을 하느라 그랬는지, 팔과 기타 신체의 부분이 제대로 갖추지를 못하고 있다.

얼굴은 눈을 돌출시킨 것이 민속 석조물에서 보이는 석장승의 형태를 닮았다. 눈썹은 두텁게 처리하고 눈은 불거졌으며, 볼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코는 뭉툭하다. 석장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인상은 상반신이 반나로 서 있다. 허리부분에 옷을 묶어 매듭을 내었으며, 옷 주름은 굵은 물결무늬로 선명하다.


팔의 조각한 형태는 괴이하다. 한 팔은 뒤로 돌아갔다.

하반신은 특별한 조각이 없으며, 늘어트린 옷 주름으로 가렸다. 전체 길이는 550cm이며, 머리부터 다리까지의 길이는 370cm 정도이다, 나머지 부분은 뾰족하게 깎았으며 땅 속에 묻혀있다. 도대체 이 석인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석인상을 찬찬히 훑어보지만 금방 그 용도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뒷면에 있는 구멍이 용도를 알리는 열쇠?

이렇게 괴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복사지 석인상의 용도는 과연 무엇일까? 뒤로 돌아가 보니 뒷면에 둥근 구멍이 아래위로 나 있다. 위쪽의 구멍은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122cm, 그리고 그 밑에 구멍은 318m 정도 내려온 곳에 있다. 땅 위로 솟아있는 석인상의 높이가 370cm 정도이니, 아래 구멍은 땅에서 52cm 정도 위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위에 있는 구멍은 248cm 정도 위에 있다.

이 구멍의 용도는 무엇일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지만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혹 이 뒤편에 있는 구멍이 당간지주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당간이나 석인상의 높이가 있어 그 정확한 구멍의 차이는 알 수가 없지만, 어림잡아 구멍의 높이가 비슷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석인상은 당간의 용도로 쓰였을까? 아니면 당간의 바깥에 세워 더 많은 당을 걸게 했던 것은 아닐까?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그 이상의 내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 두 주먹을 꽉 쥔 것으로 보아, 절의 입구에 서서 액을 막아내는 사천왕은 혹 아니었을까? 아니면 절의 신성한 장소의 양편에 세워, 뒤에 난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그곳의 출입을 제한하던 문지기는 아니었을까? 긴 시간을 생각해보지만, 그 정확한 용도를 알지 못한 체 만복사지를 뒤로한다. 저 석인상의 용도를 알 수 있는 날까지, 꽤나 속을 썩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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