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野生花)’란 ‘산이나 들에 저절로 피는 꽃’을 말한다. 야생화는 생명력이 질겨 딴 꽃럼 관리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잘 자란다. 백과사전에는 야생화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돌보지 않아도 잘 자라는 꽃피는 식물. 정원에 심는 여러 가지 꽃은 이 야생화에서 비롯되었다. 대부분 원래 자랐던 지역에서만 자라지만,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져 자라기도 한다.(일부발췌)’ 라고

 

또한 덧붙여 ‘잡초와 야생화는 분류 목적에 따라 구별된다. 즉 잡초는 사람이 볼 때 원하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해바라기가 논이나 북아메리카 대평원의 목초지 등에서 자라면 잡초로 여겨지지만, 경작지가 아닌 골짜기 등에 자라면 야생화가 된다. 해바라기는 씨를 얻기 위해서 심는 농작물이기도 하지만 정원에 심기도 한다. 지구에는 약 25만 종(種), 한국에는 약 3,500종의 꽃피는 식물이 있는데, 이중 거의 대부분이 야생화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야생화동산? 난 잡초동산인줄 알았네.

 

8월 26일, 여주에 사는 아우를 만나러 갔던 길에 잠시 여주 신륵사 관광단지를 들렸다. 이곳에 갈 때마다 보이는 이정표 때문이다. ‘야생화동산’이라는 이 이정표가 늘 발길을 붙잡고는 했다. 산과 들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나에게는 ‘야생화동산’이라는 이 글씨처럼 눈에 띠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 때는 나도 경기도 광주시 남한강을 내려다보이는 수청리 산 중턱에 야생화단지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한 겨울을 난 적이 있었다. 결국 야생화 몇 포기 갖다 심어놓고 생각만으로 그쳤지만. 그래서 야생화동산이라는 이정표에 눈길이 멈췄다. 이정표가 가르치는 곳으로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야생화동산이라고 할 만큼 꽃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야생화동산을 찾아냈다. 그 앞 안내판에는 ‘우리 꽃 조성사업 섬백리향 외 30종 52,200본 여주군’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그 뒤편 넓은 동산 안에는 야생화가 아닌 잡초더미였다. 아니 일부 야생화가 있기는 하다. 잡초더미와 함께 꽃을 피운 야생화들이.

 

아마 이 동산도 처음에는 꽤 아름답게 꽃을 피운 야생화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동산을 조성하느라 꽤 많은 비용도 들어갔을 것이다. 물론 그 돈은 세금으로 충당했을 것이고. 그런 야생화동산의 꼬락서니가 잡초더미 안에 자리하고 있다. 신륵사 관광단지 옆, 그것도 박물관과 인접한 곳에 자리하고 야생화동산.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이 이곳에 들렸다면 무엇이라고 했을까? 이 동산 구경을 해보자. 

 

 

여길 보고 누가 야생화동산이라고 하겠소?

 

 

 

그래도 야생화가 여기저기 꽃을 피우고 있다. 잡초가 없었다면 아름다웠을 것을...

 

난 고구마를 닮은 야생화도 있는 줄 알았다. 누군가 고구마밭까지

 

잡초더미에 쌓여 힘들게 자라고 있는 야생화들 

 

원래 그렇게 자연적으로 관리를 했다고 핑개를 댈까봐 동산 안 관람통로를 인증샷으로. 정리 안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327에 소재한, 충청북도 기념물 제7호인 칠충사. 순창 조씨 가문에서 배출된 충신 가운데 『괴산삼강록(槐山三綱錄)』에 등재되어 있는 조신, 조종, 조복, 조반, 조덕공, 조덕용, 조은 등 7명의 충절인을 뽑아 그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사당이다.

 

괴산읍에서 문광면 방향으로 길을 가다가 보면, 삼거리가 나오고 그 앞에는 문광초등학교가 있어 찾기가 수월하다. 삼거리 이정표에는 ‘문광삼거리’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도로변에서도 눈에 띠는 곳이라, 초행길이라고 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다.

 

 

충절의 상징, 칠충각과 칠충사

 

칠충사는 순창 조씨 문중의 7명의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 사당은 목조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1975년에 순창 조씨의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사당 아래에는 1973년에 건립한 정면 7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인 순창조문(淳昌趙門) 칠충각이 자리하고 있다.

 

칠충사로 오르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칠충각은 평지에 길게 7칸으로 지었는데, 전각 안에는 각각 7명의 정려 현판이 자리하고 있다. 현판에는 「忠節 高麗國子進士麗亡不事二君大明洪武二十五年壬申七月避世遯于槐山松坪隱逸 趙紳 之閭」, 「忠臣 精忠出氣布義敵愾參原從功臣行通政大夫中樞府僉知出東 萊別中營穩城都護府使 趙 悰 之閭」등의 문구가 보인다.

 

 

순창 조씨 7명의 충절인의 충신정려가 걸려있는 칠충각과 정려(아래)

 

5월이라고는 해도 올해는 날이 일찍 더위가 찾아와서인가. 여기저기 잡풀이 널려있고, 그 한편에는 제초제를 뿌린 듯한 흔적도 보인다. 벌써 안내판을 가릴 정더로 자란 풀들이니, 곧 안내판을 가릴 듯하다. 조금은 바쁘다고 하지만, 큰길가에 서 있는 문화재이니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으련만.

 

난세를 피한다는 정자 ‘피세정(避世亭)’

 

칠충사로 들어가는 홍살문 옆으로 작은 안내판 하나가 산으로 화살표가 나 있다. ‘피세정’으로 오르는 길이라고 한다. 이곳은 이번 답사가 세 번째이다. 그동안 달라진 것은 없을까? 궁금하여 천천히 산길을 따라 올라본다.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자리했지만, 한 낮에 오르다가보면 조금은 땀방울이 맺히기도 하는 곳이다.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촬영한 칠충사. 마당에 잡풀이 가득하다. 관리를 좀 잘했으면

누군가 오르는 길의 풀을 잘라놓아 발을 감지는 않는다. 천천히 오르는 숲은, 백년 이상이 되었을 것 같은 소나무들이 서 있다. 숲에서만 맡을 수 있는 숲내가 코를 간질인다. 산에 오를 때는 조금 힘이 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숲속 냄새가 좋아 산을 오른다.

 

원래 피세정이란 정자 이름은 ‘피세 조신’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피세 조신은 고려 때의 충신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송평으로 낙향하여 오마산 깊은 골에 ‘피세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그야말로 세상을 등진 정자라는 뜻이다.

 

 

좁은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과 그 위에 자리하고 있는 피세정(아래)

 

피세정은 한 때 터만 남기도 하였지만,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단경왕후가 죄도 없이 폐비가 되고 나라에 간신배들이 들끓자, 14세손인 송제 조세구가 다시 피세정 터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피세정이라 불렀다. 나라에서는 성격이 곧은 조세구에게 군자감 봉사를 제수하였으나, 부정한 조정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소박한 정자, 주인의 심성을 그대로 담아내

 

구불거리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정자 하나가 서 있다. 피세정이다. 한 눈에 보아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정자와는 다르다. 그저 꾸밈새 하나 없이 수수한 정자를 만나게 된다. 이 정자에 얽힌 의미를 모른다고 한다면, 신경조차 쓰지 않고 뒤돌아설만한 그런 정자이다.

 

 

 

피세정 현판과 정자 안에 가득한 게판들(가운데와 아래) 

 

그러나 이 정자의 주인들은 모두 난세가 싫어 피한 사람들이다. 굳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화려한 정자를 지어야 할 이유가 없다. 정자 위에 올라 사방을 돌아본다. 저 밑으로 보은으로 나가는 길이 보인다. 넓은 들판이 보이는 이곳, 피세정에서 정자의 주인들은 아마도 또 다른 벗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정자 안에 걸린 현판들이 그런 좋은 벗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지금도 외진 피세정이다. 그 당시에는 이곳이 얼마나 외진 곳이었을까? 이곳까지 찾아와 글을 남겨줄 수 있는 좋은 벗들을 주변에 둔 주인들이다. 주변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잡초들 틈에서, 다듬지 않아도 고결한 품성을 느낄 수 있는 피세정이다.

 

피세정에서 내려다 본 들판. 보은으로 나가는 길이 보인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신을 신고 마루에 올라갔는가 보다. 더럽혀진 마루에 털석 주저앉아 숨을 고른다. 노송 가지에서 ‘푸드덕’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갑자기 찾아든 나그네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피세정을 뒤로하면서 생각을 한다. 그래도 이 정자의 주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그나마 우리는 이런 난세를 피할 장소조차 없음을 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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