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린다. 전날 과음을 한 관계로 늦게 일어나고 싶은 날이다. 가끔은 좋아하는 지인들과 만나 술도 한 잔씩 거나하게 마시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다음 날 아침이 정말 행복하다. 늦잠을 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우가 계속 전화에 문자를 보내고 있다. 일어나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올 판이다.

 

?”

형님 식사하러 오세요. 어제는 얼마나 마신 것이요?”

쪼금 밖에 안 마셨어

그럴 리가 없지. 형님 주량을 내가 아는데

 

이 정도면 할 말이 없다. 하긴 전날 수원시 e수원뉴스의 기자 몇 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 자리에는 김우영 주간을 비롯해 공보관실 e홍보팀의 이소희팀장을 비롯해 선병옥주무관까지 자리를 함께했다. 마침 선병옥주무관의 생일이라 분위기는 사뭇 고조되었다. 그 바람에 주량을 조금 넘는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300인 분의 음식을 준비한다고

 

팔달구 지동 창룡문로 56번길 18에 거주하고 있는 고성주(, 60). 좋아하는 아우이다. 아침부터 문자를 계속 보내온다. 답장을 하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온다. 할 수 없이 대충 집안 정리를 하고 씻고 나갔다. 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비릿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내일(6) 쓸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넓은 마당에서는 낙지 손질이 한창이다. 몇 마리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150마리 정도라고 한다. 누가 이 많은 음식을 다 먹을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신을 모시고 있는 아우는 일 년에 두 차례, 음력 37일과 97일 단골들을 위한 정성을 드린다. 이 날은 팔도 각처에서 단골들이 다 찾아온다. 심지어는 일본 등 외국에서까지 찾아온다.

 

 

아우의 정성은 그 정도로 소문이 나 있다. 하긴 일 년이면 지역의 어르신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고 있다. 하물며 자신을 믿고 따르는 단골 네들에게 먹일 음식이니 얼마나 정성을 쏟을 것인가?

 

정성들여 만든 많은 음식, 하나도 남지 않아

 

보기에도 음식의 양이 엄청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버섯과 야채를 넣고 만든다는 전 준비를 하는데 재료가 커다란 플라스틱 그릇으로 한 가득이다. 거기다가 여기저기 음식 재료들을 정리를 하고 있는데, 그 양이 장난이 아니다. 300명이 먹을 음식이라고 하지만 많아도 너무 많다.

 

아우는 늘 이렇게 음식을 준비하면서 행복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맛있는 것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란 생각이다.

 

 

형님, 난 음식을 준비할 때가 정말 기뻐요

힘들지는 않냐?”

힘 안 들어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행복해요

 

하긴 그렇다. 초복이면 지역의 어르신들을 위해 200마리가 넘는 삼계탕을 끓여대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정도 음식에도 힘들어하질 않는다. 6일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먹게 준비를 하는 아우. 늘 건강하기를 바라는 작은 마음만 전하고 일을 보러 간다.

건물 안에는 많은 악기들이 진열이 되어있다. 편종과 특종, 편경과 특경, 운라, 공후 등. 화성 행궁에서 비장청을 지나면, ‘외정리아문’이란 현판을 달아놓은 문이 보인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한편은 담장인 ㄷ 자로 막힌 건물의 마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문의 좌우에는 ㄱ 자 건물을 반으로 나누어, 아래는 빈 공간이고 위는 다락과 같이 꾸몄다.

그 건물 끝에는 방을 하나 드렸는데, 방 안에는 한 사람이 앉아(인형) 무엇인가 서류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앞으로는 유기그릇들이 나열이 되어있다. 이곳을 처음에는 정리소라고 하였으며, 정리소는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다.



역대 임금이 행차 시 행사를 준비하던 곳

이 정리소는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정조 20년인 1796년에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아마도 ‘아문’이란 현판을 달아 놓은 것도, 유수가 이 정리소를 관장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 하였다. 그만큼 이 행궁에 대한 정조의 관심이 깊었다는 것을 뜻한다. 마당을 지나 외정리소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마루를 놓은 전각이 보이고, 그 안에는 ㄱ 자로 지은 광채와 같은 곳이 있다. 이 건물 안에 편경 등 제례나 연례에 사용하는 악기들을 진열하였다.




12차례에 걸친 정조의 능행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의 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이산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정조 24년인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행사 때, 이 외정리소에서 행사를 맡아하던 곳이다. 이곳에 많은 악기와 유기그릇 등이 보이는 것은, 행사 때 사용하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연희를 베풀면 상당한 인원과 많은 준비를 하여야 한다. 그렇게 준비를 해서 연희를 베풀 때는 아마도 외정리소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왕래를 했을 것만 같다.


외정리소에 진열되어 있는 악기들. 시계방향으로 편종, 편경, 아래는 우측부터 특종, 특경, 운라


행궁 안 한편에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도에 보면 수 많은 무희들과 악사들, 그리고 조정대신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행사 역시 외정리소에서 담당을 하였다는 것이다.

왕의 모든 행사를 담당한 외정리소

외정리소의 행사 담당은 정조가 승하한 뒤에도 계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순조 1년인 1801년에는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 하였다. 아마도 이런 제의례를 할 때도 외정리소에서 맡아했을 것이다. 또한 그 뒤로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행궁에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외정리소는 많은 왕의 행사를 맡아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 모형. 외정리소는 이런 행사를 맡아하던 곳이다.


1998년 12월에 옛 모습대로 복원이 된 외정리소. 행궁을 돌아보면서 만난 외정리소에 진열되어 있는 편경 등 많은 악기가 낯설지 않음에서인가(사실 나는 중, 고등학교 시절에 국악을 전공했고, 고등학교 졸업을 한 후에는 국립국악원에 재직을 한 적이 있기에 늘 이런 악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외정리소라는 곳이 정감이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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