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말한다. 이곳에는 법당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대신 전각 뒤편에 사리를 모신 탑을 세운다. 우리나라에는 5대보궁이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 소재한 정암사이다. 정암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자장율사는 강릉에 수다사를 창건한 후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를 서원했다. 한 범승이 나타나 대송정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튿날 한송정으로 달려간 자장율사에서 문수보살이 갈반지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전하고 사라졌다. 태백산을 헤매던 자장율사는 사람들에게 갈반지를 물었으나, 아무도 그 지명을 알지 못했다.

 

 

며칠 후 칡넝쿨이 우거진 곳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갈반지를 찾게 되고, 그곳에 탑을 세우려고 했으나 번번이 무너져 버렸다. 그런 후 백일기도를 드린 후 밤에 칡넝쿨 세 가닥이 뻗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끝에 세운 것이 바로 수마노탑과 적멸보궁, 그리고 정암사의 법당 자리라고 한다. 당시에는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하여 갈래사라 칭했다.

 

서해용왕이 보낸 마노석으로 세운 탑

 

보물 제410호인 정암사 수마노탑은 서해 용왕이 물 위로 보낸 마노석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정암사 적멸보궁 뒤의 산비탈에 세워진 7층의 모전석탑인 수마노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아올린 탑을 말한다. 화강암으로 6단의 기단을 쌓고 탑신부를 받치기 위해 2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은 회녹색을 띤 석회암으로 쌓았는데, 표면을 정교하게 잘 정돈하여 벽돌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1층 몸돌의 남쪽 면에는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마련했으며, 1장의 돌을 세워 문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는 철로 만든 문고리를 달았다. 지붕돌은 추녀 너비가 짧고 추녀 끝에서 살짝 들려있으며, 풍경이 달려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는 1층이 7단이고,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1단이며, 지붕돌 윗면도 1층이 9,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3단으로 되어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는 청동으로 만든 장식을 올렸다.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한 수마노탑

 

정암사 수마노탑은 벽돌의 일반적인 크기로 보아 그리 거대한 편은 아니지만, 형태가 세련되고 수법 또한 정교한 탑이다. 탑 앞에 놓인 배례석은, 새겨진 연꽃무늬나 안상 등이 모두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탑신을 구성한 석재는 회록색의 수성암 질석회암으로 길이 30~40cm, 두께 5~7cm로 정교하게 쌓여져 있다.

 

이 석탑은 파손이 심해서 1972년 해체, 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탑을 세운 이유를 담은 탑지석이 옥신부터 기단부까지 사이에서 5개가 발견이 되었다. 또한 금, , 동으로 만들어진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정암사에서 느낀 기운은 맑기만 한데

 

그만큼 시대가 흐르면서도 정암사 수마노탑은 진신사리탑으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이 언제부터 전해진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정암사에 있는 여러 유물과 비교해 볼 때 고려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깊은 가을에 찾아간 정암사. 수마노탑으로 오르는 계단을 걷는다. 마음이 경건해진다. 아마도 탑의 기운이 탑 주변에 넓게 자리를 하고 있는 듯하다. 머리를 조아려 서원을 한다. 무엇이나 이곳에 와서 간절히 서원을 하며 이루어질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일어나 건너편 산을 바라본다. 가을이 짙어가는 산에는 붉은 빛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 숱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마노탑.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정암사. 아마 자장율사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 것을 미리 예견하신 것은 아닐까? 자장율사가 평소에 짚고 다니던 주장자였다는 주목 한 그루가 저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회생을 했다고 하니, 정암사야 말로 세상을 다시 살아나갈 사람들에게는 좋은 곳이 아닐는지.


소중한 문화재 중에서 가장 그 가치가 뛰어나서 지정을 하는 국보, 이 국보와 국보가 만나면 그 아름다움이 과연 배가가 될까? 아마 이렇게 국보와 국보가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국보의 숫자도 적으려니와, 야외에서 한 자리에 두 점의 국보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구례 화엄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인 544년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가,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법왕 때인 599년에는 3천여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화엄사 경내에 세워진 국보 각황전과 국보 석등

자장율사로 인해 신라 때 절로 알려져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신, 사사자 삼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각황전 뒤편에 세웠다. 원효대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자장율사를 거쳐 원효, 의상 등의 스님들이 화엄사에 중창을 하였으므로, 화엄사가 신라시대 절이라고 하는가보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국보 제67호 각황전 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조선 숙종 28년인 1702년에, 이층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전각의 명칭을 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국보 각황전, 밖에서 보면 2층의 전각이지만, 안으로는 퉁층으로 꾸며져 있다.

각황전 앞에 감히 서질 못하다.

각황전 앞에 서면 사람이 압도당한다.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의 기단석 위에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전각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각황전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 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되어있으며, 세분의 여래불과 네 분의 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일까? 쉬지 않고 예를 올리는 여인에게.

밖에서 보면 이층인 전각으로 꾸며졌으나, 안을 보면 단층이다. 워낙 전각의 규모가 크다보니 중간에 기둥을 세워 받쳐놓았다. 그 안의 공포의 장식 등이 화려하다. 각황전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 거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각황전 동편 출입구 앞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있다. 누군가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예불을 올린다. 걷기도 더운 날에 저리 온 마음을 다한다면, 여래불과 보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듯하다.

최대의 석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였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에 세워진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이라고도 부른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를 하였다. 통일신라 때인 헌안왕 4년인 860년에서, 경문왕 13년인 873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팔각의 지대석 위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배가 불룩한 장고 모양의 기둥을 세웠다. 이런 배가 부른 기둥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형태이다.



국보 석등은 아름답다. 기단석과 중간의 장고형 기둥

배가 부른 기둥 위로는 돋을새김을 한 연꽃무늬를 조각한, 위 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팔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큼직한 창을 뚫어 놓았다. 팔각의 지붕돌은 귀꽃이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으며,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석등과 국보 각황전. 이 두 점의 국보가 만들어내는 정경은 말로 형용하기가 힘들다. 어디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으려나. 해가 짧아진 오후에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쉽게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모습에 취했음이다. 저녁나절 국보와 국보가 만나며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쉽게 만나지 못할 멋진 모습이다.


화사석에는 네 곳의 창을 내고, 머리 위에는 귀꽃이 아름다운 머릿돌을 올렸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불교 석탑 중에서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탑은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일제에 의해 수난을 당하다가 복원이 된 개성 인근의 경천사 십층석탑, 그리고 공주 마곡사의 오층석탑 등이다.

보물 제799호로 지정이 된 마곡사 오층석탑은 고려 말기의 세워진 석탑으로, 당시 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라마교는 티베트에서 발생하여 중국 원에서 크게 융성한 불교의 한 종파이다. 이 탑의 상륜부에는 라마탑에서 보이는 풍마동 장식을 두어 특이하다.


훼손이 심한 마곡사 오층석탑

마곡사 오층석탑은 대광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이라 고찰을 찾은 사람들도 그늘을 찾아든다. 나뭇가지도 늘어져간다는 삼복더위에 찾아간 마곡사다. 그래도 마음을 먹고 찾아간 곳이니 뙤약볕이라도 찬찬히 훑어볼 수밖에. 첫눈에 보기에도 여기저기 많이 훼손이 되었다. 이 탑이 이렇게 훼손이 된 것은, 석탑 뒤편에 자리 잡은 보물인 대광보전이 불이 났을 때 많이 훼손이 되었다고 한다.



풍마동 높은 기단부와 탑머리에 장식한 풍마동은 라마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층으로 된 기단부는 일반적으로 보이는 기단부보다 월등히 높다. 그리고 그 위로 오층의 탑신이 있는데, 지붕돌의 변화가 없어 불안정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많이 보이는 고려 석탑들보다 안정감이 떨어져 보이는 것도 상륜부에 있는 풍마동의 무거움 때문은 아닌가 모르겠다.

몸돌에 새겨진 사방불은 백미

탑 주위를 돌아보니 기단석과 몸돌, 지붕돌 등이 많이 훼손이 되었다. 아무리 석탑이라고 해도 불에는 견디기가 어려웠나보다. 그래도 오랜 세월 이렇게 마곡사 경내에 자리잡고 있는 석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낀다. 1972년도에 해체 수리를 하였고, 1974년도에 이 자리로 옮겨왔다고 하는 것을 보니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보다.

마곡사는 처음에 세워진 년대가 정확하지는 않다. 신라 선덕여왕 9년인 640년에 자장율사가 창건을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643년에 세웠다고도 한다. 또한 그보다 200년이나 뒤인 840년에 보조 체징스님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사방불 이층 몸돌에 새겨진 사방불은 이 탑의 백미로 꼽힌다

천년고찰 마곡사 대웅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 그 이층 몸돌에 보면 사방에 좌불을 새겨 넣었다. 부처와 보살 등을 몸돌 사면을 파내면서 돋을새김으로 윤곽을 주었다.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으며, 연화대와 법의 등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천년 세월을 그 모습 그대로 좌정을 하고 있는 사방불. 그 아름다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탑이 훼손이 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가치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적인 풍화에 의해서 훼손되는 것만도 가슴이 아픈데, 인위적인 훼손까지 더해 망가져 가고 있는 수많은 문화재들. 오늘 우리가 반성해야할 일들이 아니던가.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것도 그러한 죄스러움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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