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772-1번지에는 옛 가산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폐교가 된 이 초등학교 교정 안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경남 기념물 제197호로 1997년 12월 31일자로 지정이 된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500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 35m 정도에 밑동의 둘레가 8m에 가까운 이 느티나무는, 1480년경에 훈도인 전경륜심었다고 한다. 전경륜이 이 마을에 집터를 잡았는데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이 배(=船)와 같다고 하여, 서편 냇가 남북 400m까지 느티나무 숲으로 조성하여 마음의 풍림 겸 배의 돛대로 삼았다고 전한다.



일제 말에 베어버린 숲

2,000평이나 되는 울창한 느티나무 숲. 아마도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런 넓은 장소에 서 있던 느티나무들을 일제 말에 모두 베어버리고, 현재 남아있는 한 그루만이 서 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정천, 혹은 ’샘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사후에 대사헌으로 추증이 된 전팔고 선생의 호를 따 ‘원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1592년에는 의병들이 이 숲에 모여 회동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런 이유로 일제에 의해 모든 나무를 베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00여 평이나 되는 느티나무는 선비들의 풍류장소로 이용이 되다가, 임진왜란 때 수난을 당했으며, 그 뒤 한일합병의 슬픔까지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나무에 모여,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홀로 남은 느티나무 한 그루

지난 6월 24일 거창군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가조면 원천리. 옛 가산초등학교 교정에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갔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있고, 주변은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 놓았다. 폐교가 된지 시간이 흘렀는지, 담장에는 넝쿨이 타올라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이리저리 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는데, 철문 옆에 조그마한 공간이 보인다. 그 안으로 들어갔더니 바로 학교 교정 안이다. 느티나무는 옛 학교 건물과 마주한 곳에 서 있다. 낮은 철책으로 보호막을 둘러놓은 느티나무. 나무의 밑동에는 혹처럼 달라붙은 것이 흡사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생명의 원천, 느티나무

오래된 고목에는 정령이 산다고 하더니, 저 혹에 생명이라도 깃든 것일까?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자랐을 느티나무가, 소리가 사라진 지금은 왠지 측은해보이기까지 한다. 나무 가까이로 가서 나무를 쓰다듬어 본다. 거친 감촉사이로 온기가 느껴진다. 생육이 좋은 이 원천 느티나무는 홀로 이렇게 폐교가 된 교정에 서 있다.

밑동 근처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 달라붙어 있는데, 위를 보니 중간이 잘려있다. 아마 원줄기의 한편이 잘려나간 듯하다. 이것도 일본에 의한 아픔은 아니었을까?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는 일제의 만행, 그리고 뒤이어 맹목적인 종교적인 훼손. 거기다가 도적 떼들까지. 도대체 이 나라의 문화재가 정말 마음 편하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무를 들러보고 있는데,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나무의 벌어진 틈 사이에서 기어 나온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렇게 모든 생명을 감싸고 있건만, 이제 인적 끊긴 폐교의 안마당에 서 있는 이 느티나무가 온전할 것인지. 교정을 떠나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 불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무 밑동에 검은 자국을 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선림원,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생활을 했기에, 쌀을 씻은 물이 앞을 흐르는 내를 모두 쌀뜨물처럼 만들었을까? ‘미천(米川)골’이란 명칭은 바로 쌀 한 끼 밥을 하기 위해 쌀을 씻은 물이, 하류까지 흘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오대산 자락을 깊숙이 들어가는 곳에 자리한 선림원지. 이곳은 흥각국사가 804년경에 창건한 선림원이 있었던 곳이다.

선림원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선수련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는 대규모의 절로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10세기 경 홍수와 산사태로 매몰이 되었다고 한다. 11월 14일 양양군을 한 바퀴 돌아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미천골로 향했다. 몇 번을 들른 선림원지다. 선림원지는 매몰이 되었던 곳인 만큼, 지금도 금당지의 주추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선림원지에 있는 보물 제447호 부도의 기단부와 금당지(아래)

보물로 지정된 부도 안타까워

선림원지를 오르는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앞에 삼층석탑이 한 기 서 있다. 그 뒤편에는 금당지가 있고, 여기저기 석물들이 널려져 있어 이곳이 대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금당지 동편 산 밑에는 부도의 기단이 한 기 서 있다. 원래는 북쪽으로 50m 정도 위편에 서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에 있는 부도의 기단은 정교한 조각과 함께, 화려한 문양 등을 자랑하고 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으나 정교하게 조성이 되었다. 이 부도의 건립연대는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부도는 지대석 위에 상중하로 구분된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탑신석, 옥개석, 상륜부를 올려놓는다.




일제의 훼파로 사라진 부도 몸돌

일제는 침략기에 무수한 우리의 문화재를 강탈하고 훼파를 시켰다. 요즈음 문화재 반환운동을 하면서 일부가 돌아온다고 하지만, 그들이 강탈해 간 우리의 문화재는 30여 만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도 거의 국보급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다. 이 선림원지 부도 역시 일제 강점기에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이다.

1965년 각 부재를 수습하여 복원한 것으로 겨우 기단부만 남아있다. 이 부도의 지대석을 훑어보면서 만일 이 부도가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라고 질문을 해본다. 지대석만 보아도 상당히 걸작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재를 훼파한 일제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가 없다.


연화대석에 조각이 된 용은 금방이라도 돌을 박차고 나올 것만 같다.

운문룡의 조각은 상상을 초월해

기단부만 남아있는 선림원지 부도. 보물 제447호로 지정이 될 만큼 대단한 걸작이다. 이 기단부는 네모난 지대와 팔각의 하대까지 같은 돌 2매로 구성되었다. 지대석은 땅 위에 들어난 부분만 다듬어,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하대 8각의 각 면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상 안에는 교대로 사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하대 위에는 둥근모양의 연화대석을 놓았다.

연화대석 위에는 간주모양의 중대석과 원형의 상대석이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위에 부도가 놓여 있어야 하나, 일제에 의해 조각이 나 사라져버린 것이다. 연화대석 표면에는 서로 다투듯 조각을 한 운문룡이 있다. 구름과 함께 조각을 한 용은 발을 힘차게 뻗치고, 금방이라도 연화대석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이렇게 대단한 기단부였다면, 그 위에 올려 진 부도는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사라진 부도가 아쉽기만 하다. 수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문화재들. 오늘 선림원지의 부도가 주는 안타까움이, 여행자의 발길을 재촉하는가 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또 한 번 통곡을 한다. 아직도 그치지 않는 문화재의 훼손이 마음이 아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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