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도심을 가로지르는 수원천에 명품 조각품이 최근 설치돼 눈길을 끌고 있다. 얼마 전부터 지동교를 비롯한 여러 곳에 설치된 미술품이 수원천을 거니는 시민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조각들은 자연생태하천으로 거듭난 수원천의 자연환경과 함께, 인근 전통시장과 지역주민, 관광객을 아우르는 수원천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추진한 결과물이다.

 

수원문화재단(대표이사 라수흥)은 수원천의 역사와 생태, 문화 등에 대한 소재를 바탕으로 도시하천으로 복원된 수원천의 새로운 변모를 담았다. 수원천의 공공예술 프로젝트 구간은 화홍문과 매교 사이 2km이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물놀이’, ‘꽃바람에 나비 날아든다.’, ‘상도의 벽6개 작품을 지동교, 구천교 등 인근 옹벽 등에 설치했다.

 

 

팔달문 앞 시장의 상도의 벽

 

11일 오전 수원천을 걸어보았다. 모처럼 맞는 휴일에 많은 사람들이 수원천을 따라 걷거나, 수원천의 쉼터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동시장에서 수원천으로 내려가면 지동교 아래 바깥벽에 상도의 벽이란 글씨가 보인다. 이 작품은 수원천변을 중심으로 9개 전통시장(남문로데오, 미나리광시장, 못골시장, 시민상가시장, 영동시장, 지동시장, 팔달문시장, 패션1번가, 구천동 공구상가)에서 30년 이상 영업에 종사한 상인들을 선정하여 상점의 가훈과 상인의 손도장을 핸드프린팅(브론즈)하여 설치한 것이다.

 

팔달문 앞에 자리한 9개의 전통시장은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명에 의해 조성된, 문안시장과 문밖시장이었다. 이곳은 정조가 직접 내탕금을 들여 조성을 한 시장이며, 윤선도의 후손들을 이곳으로 모아 상권을 형성한 곳으로 유서가 깊은 곳이다.

 

 

수원천의 옛날을 기억하다

 

지동교 아래 지동시장 쪽으로 벽면에 설치된 물놀이, 1950년대 전쟁의 아픔을 뒤로한 채 수원천에서 물장구치며 물놀이를 하던 당시의 모습을 담고 있다. 벽에 부조로 조성을 한 이 작품은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생활오폐수, 생활쓰레기 등 각종 오염으로 악취가 진동했던 수원천을, 생태하천으로 변화시키고자하는 소망이 아이들이 수영하는 모습으로 투영시킨 것이다.

 

수원천 지동교 아래 조성된 이 물놀이 작품을 보고 있던 시민 김아무개(, 69)씨는

옛날에 우리가 이 수원천에서 어린 시절을 이렇게 보냈어요. 그때는 입을 것도 마땅치 않고 특별하게 놀만한 공간이 적어, 수원천이 많은 아이들의 놀이터였죠. 지금 이렇게 벌거벗은 아이들을 형상화 한 것을 보니 옛날 생각이 떠오릅니다. 앞으로 수원천을 시민들이 깨끗하게 수질관리를 잘하면, 물이 더욱 맑아질 테고 그때는 이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겠죠.”라고 한다.

 

 

주변시장과 어울리는 작품을 조성

 

구천교 인근에 마련한 작품 일터는 구천동 공구상가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제작한 것이다. 공구상가 내 대장간에서 작업하는 일꾼들의 모습을, 역동성 있는 형태로 조형화 했다. 대장간에서 일하는 이미지를 통해, 전통과 현대를 이어주는 전통기법의 매개체 역할과 기초산업이란 의미를 부여해 경제 활성화에 대한 바람을 담았다.

 

이런 예술작품이 이곳 공구상가 앞에 마련되었다는 것이 의미가 큽니다. 사실 저희 공구상가는 지금 여러모로 상당히 힘든 시기에 있는데, 이런 작품들이 더 많이 늘어나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이런 작품을 감상하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저희 공구상가가 활성화가 되었으면 합니다.”

 

공구상가에서 작업을 한다는 한 분의 이야기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디자인 총괄한 김경환 작가는 생태하천 수원천 복원의 의미에 충실한 공간구성, 상인들과 연계한 참여의 장소 등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잘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하다. 시쳇말로 백 없고 돈도 없고, 거기다가 줄도 없으면, 그야말로 세상살이가 힘들어진다. 가끔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씁쓸한 때가 있다. 넓은 평수에 사는 사람들이, 임대주택의 아이들과는 한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는 소식을 접할 때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소재한 궁집.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살던 집이다. 아마도 화길옹주가 이곳으로 시집을 왔을 때, 시비들이 이곳으로 따라왔을 것이다. 또한 능성위 구민화의 집에도 아랫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궁집 옆으로 초가가 한 채 보인다. 바로 궁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묵었다는 집이다.

 

 

신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초가

 

하지만 궁에서 따라 나온 시비들이나, 마름 등은 이 초가에 묵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궁집 안에도 행랑채가 있어, 마름들이나 궁에서 나온 시비들은 그곳에서 생활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 아마도 그보다 신분이 낮은 머슴이나 종들이 살던 집은 아니었을까?

 

궁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묵었다고 전하는 이 초가는, 궁집을 지었을 때와 같은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집도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이다. 이 초가는 현재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옛 고택들 중에서도 특히 초가의 경우 사람이 살지 않으면 퇴락해 버리고 만다. 이 초가 역시 많이 훼손이 되었다.

 

 

 

 

연륜을 알 수 있는 주변의 경관

 

궁집의 하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초가. 주변으로는 꽤 오래 묵은 듯한 나무들이 서 있어, 이 집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초가는 ㄷ 자 형으로 되었다. 앞으로 사랑채를 놓고, 그 중간에 대문을 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ㄴ 자의 꺾인 부분에 대청을 두고, 양편으로 방과 부엌을 드렸다.

 

이 초가는 일반적인 초가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꾸며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양편에 방에 불을 때기가 편하도록 깊게 골을 파서 연결하였다. 한 사람이 양편에 불을 한꺼번에 땔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아궁이의 형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안으로 들어가면 양편으로는 방을 드렸다. 아마도 초가의 사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이 초가에 살던 사람들이 신분이 낮았으니, 아랫사람을 두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양편의 방을 일꾼들이 사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밖으로는 툇마루를 놓아 주변 경관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안채의 특이한 구성, 머슴들이 생활한 집인가?

 

사랑채에 비해 안채는 간결하게 꾸며졌다. 사랑채에 붙여 ㄱ 자로 지은 안채는 작은 방 하나를 놓고 부엌과 안방을 드렸다. 안방은 뒤로 물려 앞을 마루를 놓았으며, 꺾인 부분에는 넓은 대청을 놓았다. 그리고 건넌방을 드렸다. 이런 구조로 볼 때 이 초가에는 주로 일을 하는 머슴들 위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일반적인 중부지방의 초가와 다름이 없지만, 그 집의 구성으로 볼 때는 상당히 특이한 형태인 초가. 부엌 뒤편으로는 장독을 놓았으며, 사랑채를 맞물려 안채의 뒤편으로 연결이 될 수 있도록 담장을 둘렀다.

 

 

 

 

사람이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재신이나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집의 형태. 그런 집들을 돌아보면서 참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신분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7월 17일에 찾아간 남양주시 평내동의 궁집. 그곳에는 또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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