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되고 있는 세계유산정부간위원회는 제3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정부간위원회(6.15.-25)에서 현지시간 22일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남한산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키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수원 화성을 비롯해 두 곳의 성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는 등 모두 11종목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 자연, 복합) 목록 등재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21개국으로 구성된 정부간위원회로서, 우리나라는 2013-17년 임기 위원국(2013. 11월 위원국 당선)으로 동 위원회에 참여 중이다.

 

 

정부는 이번 위원회에 나선화 문화재청장을 수석대표로 하여, 외교부, 문화재청, 주 유네스코대표부, 주 카타르대사관, 경기도청, 경기도 광주시청,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관계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파견했다.

 

신라 문무왕 때는 주장성으로 불러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에 소재한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수어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힌다.

 

웅장하고 거대한 성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가치 인정해

 

이번 등재 결정 과정에서 세계유산위원회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남한산성의 문화유산이 17세기 초 비상시 임시 수도로서, 당시 일본과 중국의 산성 건축 기술을 반영하고 서양식 무기 도입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군사 방어 기술을 종합적으로 집대성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은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체제의 변화상을 잘 나타내며, 지금까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계곡을 따라 성을 축성한 형태나,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것 등을 등재 조건으로 꼽았다. 또한 산성 안에 행궁의 복원 등 주요시설물이 보존되어 있는 것도 선정의 이유라고 밝혔다.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 인접 지역의 개발 행위를 적절히 통제하고, 주민들이 유산 관리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추가로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경기도 등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긴밀히 협력하여, ‘남한산성의 체계적 보존관리와 활용을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이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앞으로 남한산성의 종합계획을 보면, 유산의 중장기적 종합 발전 계획 수립과 정기 모니터링 체계 구축, 세계유산 전문 연구·교류 기능 강화, 지역주민 참여 촉진 등을 통해 남한산성의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보호·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하겠다는 것. 또한 본성의 미정비구간인 제1남옹성 등에 대한 정비를 조기 완료하고, 훼손된 여장을 전면 보수하겠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인해 경기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수원 화성과 남한산성 두 곳의 성곽 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낭보가 전해지자 수원에서도 수원화성의 미연결 구간인 팔달산에서 내려오다 끓긴 팔달문과의 구간과, 팔달문과 남수문 구간의 남공심돈과 남암문 등의 복원을 서둘러야 하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번지에 소재하며 사적 제5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현재 남한산성의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한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 정도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는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는 숭열전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이다.

 

치욕의 장소이기도 한 남한산성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는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조 2년인 1624년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인 1626년에 완공한 남한산성.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 등이 있다. 또한 비밀통로인 암문과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도 볼 수 있다. 남한산성은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이 남한산성의 행궁 앞편 산 중턱에 서 있는 정자가 바로 침괘정이다.

 

무기제작소로 잘못 알려진 침괘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인 침괘정은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선 영조 27년인 1751년애 광주유수 이기진이 다시 지은 후에 이름을 침과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궁궐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침괘정의 오른쪽에는 무기를 보관하던 무기고나 무기를 만들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면 7,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침괘정의 안쪽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회랑과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뒤편에는 연도를 빼 건물에서 떨어져 굴뚝을 세웠다. 이 침괘정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있었던 전각으로 보인다.

 

침괘정은 네모난 기둥을 쓰고 있으며, 툇마루는 앞과 뒤, 그리고 측면에도 놓았다. 주초는 커다란 돌을 네모나게 다듬어 사용을 하고 있으며, 7칸 중 두 칸은 전체를 문으로 돌렸다. 이를 보아 이곳이 온돌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침괘정은 무기고나 무기제작소가 아닌 하나의 정자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에 소재한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 때의 성으로도 알려진 남한산성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수어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힌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 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아픔을 당한 남한산성

 

남한산성의 축성은 인조 2년인 1624년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인 1626년에 완공하였다.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작금에 들어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남한산성. 연차적인 복원공사를 통해 지금은 많은 구조물과 성벽 등이 옛 모습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남한산성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남한산성의 총 길이는 11.76km에 달한다. 본성은 9.05km이며 옹성이 2.71km이다.

 

 

남한산성 제1암문을 돌아보다

 

남한산성의 축성 때 승병들이 묵었던 9개소의 사찰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장경사. 그 주차장 한편에 성 밑으로 내려가는 암문이 있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다. 암문은 본성에 11, 봉암성에 4, 그리고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암문이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하는 비밀통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적에게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적의 배후를 교란하거나, 식량을 은밀히 운반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장경사 암문이라고도 부르는 제1암문은 형태가 특이하다. 딴 암문들은 성곽을 돌출시키고 그 안에 암문을 숨겼지만 이 암문은 좌우의 성벽이 돌출되어 있지 않다. 성벽에 아취모양을 구성하고 그 안에 문을 달았다. 문의 기둥을 고정시키는 돌출부는 아래와 위 양편에 조성한 것으로 보아 이 암문은 작지만 두 짝의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암문은 성벽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높아진다. 이곳은 경사가 급하고 성벽이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주변의 성벽에는 몇 개의 수로가 나 있다. 바닥에는 돌을 깔았으며 천정도 커다란 장대석을 이용해 덮었다. 암문을 들어서면 바로 장경사로 통하게 되어있어, 비상시에는 많은 승병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에 자리하고 있는 남한산성. 이 산성에는 모두 4개소의 문이 있다. 물론 성마다 동서남북의 문을 마련하고, 각기 그 이름을 따로 붙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동문이나 북문과 같은 이름들로 부르지만. 남한산성의 북문은 조선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을 개보수 할 때, 그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붙였다.

 

남한산성에는 원래 4개소의 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남한산성 내에는 동문과 남문, 그리고 수구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북문은 인조 2년인 1624년에 성을 개보수할 때, 새로 신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북문을 전승문이라 이름을 붙인 것일까?

 

 

패전의 아픔을 잊지 말라는 ‘전승문’

 

남한산성의 북문을 ‘전승문(全勝門)’이라고 부른 이유는, 다시는 전쟁에서 패하지 말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 병자호란 당시 적과 대치를 하고 있던 남한산성 내의 군사들은, 영의정이던 김류의 주장에 의해, 300명의 군사들이 북문을 나서 적에게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성문을 나선 병사 300명이 수많은 적을 기습공격을 한다고 해서 이기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성문을 나선 병사들은 적의 계략을 말려들어 변변한 전투 한번을 못해보고 몰살을 하고 말았다. 이는 ‘법화골 전투’라고 한다. 이 북문을 나선 병사들이 법화골에서 패전한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기록하고 있다.

 

 

남한산성 내에서 청나라 군사들과 대치를 하고 있던 병사들. 그들은 45일간이나 남한산성 내에 머물면서 청군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아마 이 북문의 기습공격이 실패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더 오랜 시간을 버티거나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는 않았을까? 군사 300명이 적에게 몰살을 당한 것이 최대의 전투로 기록이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의 기록은 아픔 그대로인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항복을 하러 나가는 인조의 모습은, 왕세자의 스승인 정지호가 쓴 『남한일기』에 잘 묘사 되어있다. 아마도 당시 인조와 세자의 측근에 있었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묘사를 한 듯하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와 마골대 두 사람이 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을 독촉하였다. 임금은 남색 옷에 백마를 탔다. 모든 의장을 다 버리고 수행원 50여 명만을 거느리고, 서문을 나가니 세자가 그 뒤를 따랐다. 뒤따르던 문무백관들은 서문에 서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였다.」

 

인조는 일만 삼천여 명의 병사와 40일분의 양식을 갖고 남한산성에서 청의 20만 대군과 대치하면서 항전을 펼쳤으나, 1637년 1월30일, 남한산성 항전 45일 만에 삼전도에 나아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아마도 이렇게 항복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북문의 기습공격의 실패와, 1637년 1월 26일, 평안도 감사 홍명구와 평안도 병마사 유림이 지휘하는 조선군 5천명이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다가, 강원도 김화에서 청의 용골대와 마골대가 이끄는 수만 명의 병사들에게 패전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승문을 돌아보다.

 

남한산성의 북문인 전승문. 누각에 오르니 아래로 가파른 언덕이 펼쳐진다. 저 곳을 지나 청의 군사를 공격하겠다고 병사들이 빠져 나갔을 것이다. 그 가파른 언덕 밑에 청군의 군영이 자리하고 있었을 테니. 140년이나 지난 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하면서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붙인 것도 당시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라는 것이다.

 

전승문은 성의 북쪽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성벽은 딴 곳과는 달리 경사가 지게 축성을 하였다. 성문 앞으로는 가파른 비탈이 펼쳐진다. 성문 문루 위에서 좌측을 보면 산등성이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에 성을 쌓았고, 우측으로는 평평한 길이 나 있다. 아마 이 북문을 빠져나간 병사들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전승문. 이 문 위에서 지난날을 가억해 본다. 그 후에도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패전을 했겠지만, 이 전승문의 실패를 거울삼았다면, 이와 같은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성문에 덧붙인 철판을 만져보면서, 역사의 아픔은 어찌 그리도 빨리 잊히는 것인지. 오늘 이 북문에 올라서 그 슬픔을 되새겨 본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 1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이 남한산성은 조선 왕조의 치욕과 함께,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슬픔이 함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온조왕 때에 처음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것은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 후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조선조『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한산성을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치욕의 아픔을 지닌 산성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였다. 이런 일로 인해 남한산성은 조선조 역사에 치욕의 성이 된 셈이다.

 

현재 남아있는 남한산성 내의 시설로는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등이 있다. 이 중 광주시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동문을 찾아보았다. 동문은 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광주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문이다. 현재 동문 앞의 오르막길은 일방통행으로 갈라져 있고, 그 만나게 되는 지점에 동문이 서 있다.

 

 

수문, 제11암문과 함께 있는 동문

 

동문은 그 옆으로 수문이 나 있고, 수문 옆으로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 있다. 동문은 낮은 지대에 서 있기 때문에,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조성을 하였다. 하기에 이 문을 통해 우마차가 다닐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동문의 편액에는 ‘좌익문’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행궁을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좌측에 해당하므로, 좌익문이라고 한 것이다.

 

이 동문은 조선조 선조 때 보수를 하였고, 인조 2년인 1624년에 다시 건립을 하였으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를 하였다. 동문 밑으로 현재 길을 내느라 성곽이 터진 아래편으로는 수문이 숨어 있다. 남한산성은 해발 370~400m의 능선을 따라 축성을 하였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남한산성의 지형상, 산성 내의 모든 물은 대부분 이 수문을 통해 외부로 흘러나갔을 것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통한의 문이 되어버린 동암문

 

수문의 바로 위편으로는 경사가 급한 성곽이 보인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라고 하는 ‘동암문’이 있다. 암문은 원래 군사들이나 물자를 적에게 발견이 되지 않게 운송하기 위하여 축조한 문이다. 암문을 통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성을 빠져나간 군사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기 위한 성의 귀중한 요소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모두 16개소의 암문이 있다. 동문에 인접한 이 동암문은 폭 2.86m, 높이 3.07m, 길이 5.6m에 달하는 것으로 암문 중에는 가장 큰 문이다. 아마 이 동암문이 이렇게 큰 이유는 동문이 계단식 축대위에 축조를 했으므로, 성 안으로 드나드는 우마차가 이 동암문을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동암문은 문짝은 없고, 문짝을 달았던 돌틀이 남아있다. 이 동암문을 일명 ‘시구문’이라고 부른다. 시구문이란 시신을 내어보내던 문이다. 동암문을 시구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기해박해를 통해 한덕운(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르) 등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 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많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 그 요소요소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남한산성의 곳곳을 뒤돌아보게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남한산성 전역을 돌아보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내는 것도,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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