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수원뉴스의 시민기자들이 23일로 속초와 고성 지역으로 워크숍을 다녀왔다. 23일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나한테는 12일이 된 셈이다. 워크숍 날짜가 년 초에 미리 날을 잡아 놓은 행사 때문에, 본의 아니게 밤늦게 속초서부터 수원까지 택시로 이동을 해야 하는 난리를 겪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마지막 날은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원의 행사를 대충 접고 다시 주말의 막히는 고속도로의 답답함을 이겨내며 속초로 달려갔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 모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23일의 마지막 여정을 인제 백담사로 정했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님의 침묵을 탈고 하신 곳이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오래도록 칩거를 한 곳이기도 하다.

 

 

중광스님을 만난 지 벌써 세월이

 

사실 내가 백담사를 찾은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1999년인가 속초에 한 8개월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 당시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이 싫어, 영랑호 곁에 있는 사찰에 소나무 숲에 있는 방 한 칸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에 걸레스님이라고 하는 중광스님이 백담사에 머물고 계셨다.

 

중광스님은 백담사 회주이신 오현스님이 거처를 백담사 한편에 거처를 마련해 주어, 그곳에서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계셨다. 이 중광스님이 7월 백중 때인가, 내가 묵고 있는 속초 절을 찾아오신 것이다. 당시는 스님들만 보면 무엇인가 답답한 속이라도 이야기를 하면, 한 마디로 해결이 된 듯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이다. 그런데 그런 기대를 깨버린 것이 바로 걸레스님인 중광스님이셨다.

 

 

거기 처사, 가서 막걸리 한 통 받아와라

 

처사란 절에서 부르는 남자신도를 말한다. 신도 중에서 수계를 받으면 거사라 칭하고, 수계를 받지 않으면 처사라고 부른다. 당연히 나는 처사도 안 되는 처지였다. 절에 묵으면서도 불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한테 말씀하셨나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있냐?”

 

이쯤 되면 슬그머니 부아가 오른다. 스님이라고 해서 언제 보았다고, 술을 사오라는 것도 좋지만 거기다가 반말이다. 사실 중광스님은 총각 때 서울 종로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신 적이 있지만, 세월이 흘러 나도 나이가 들었으니 기억도 못하실 것은 뻔한 일이다. 그래도 젊은 혈기에 은근에 부아가 치민다.

 

 

스님이 술을 드세요?”

야 이놈아 술이 아니고 곡차를 사오란 것이야

금방 막걸리 한 통 받아오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곡차야. 쌀로 만들었으니 그것이 차지 무슨 술이냐?”

 

그림이라도 받아 둘 것을...

 

지금 같으면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다. 중광스님의 별난 행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세상을 자연인으로 살아가신 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그 때는 왜 그리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머뭇거리는 나에게 스님이 다시 이야기를 한다.

 

왜 막걸리 살 돈이 없냐?”

막걸리 값이야 있죠.”

이놈아 그럼 얼른 가서 사와라. 내 술값은 나중에 그림으로 그려서 쳐줄 테니까.”

 

 백담사에서 만난 다람쥐와 멧돼지. 다람쥐는 가까이 다가서도 도망을 가지 않고 먹을 것만 먹고 있었다.

이 멧돼지는 이름이 해탈이란다. 매일 이곳에 와서 사람들이 주는 것을 먹고 산다고...

 


참 세상에 나처럼 어리석은 인간도 없을 듯하다. 당시는 중광스님의 그림이 그리 값나가는 것인 줄을 모르고 있었으니. 그리고 다음해인가 스님은 백담사를 떠나셨다. 얼마 후에 스님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입적을 하셨다는 소리를 풍문으로 들었다.

 

백담사를 찾았던 사람들은 만해 스님이나 전 전 대통령으로 기억을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백담사는 중광스님과의 인연으로 생각을 한다. 10일 오전에 들린 백담사. 그곳에서 걸레스님인 중광스님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돌아보았지만, 무심한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만이 바스락거리며 절을 찾은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다.

참 생각해보니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질기기도 하다. 17일 오전 막히는 길을 이리저리 돌고 돌아 여주로 향했다. 여주군 북내면 서원리에 사는 아우를 오랜만에 만나보고 싶어서이다. 아우는 이곳에서 정착을 한 지가 벌써 20년 세월이 훌쩍 넘었다. 처음 아우네 집을 찾았을 때는 마을에 달랑 아우네 집 밖에는 없었다.

 

전 민예총 경기지회장을 맡았던 서종훈(, 52)을 처음으로 만난 것이 벌써 20년 세월을 훌쩍 넘겼다. 당시는 대전에서 방송 일을 할 때였으니, 참 세월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예전 PC통신 모임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마치 친 형제처럼 그렇게 지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왕래를 하면서 살아 온 세월이 벌써 이렇게나 지났으니, 그동안 둘 사이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한이 없을 듯하다.

 

 

설치미술, 도자기, 그리고 화가

 

아우는 가끔 설치미술도 하고 행위예술도 한다. 물론 전공은 그림이지만, 아우네 집은 3대째 전해지는 도공의 집안이기도 하다. 전통 가마를 만든다고 해서 대전서부터 여주까지 참 뻔질나게 찾아들었던 기억이 난다. 공주대 학생들과 함께 토요일마다 여주로 올라가 망생이라는 흙덩어리를 만들어, 그것으로 전통 가마를 만들기도 했다.

 

사람 좋아하는 아우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고는 한다. “아우는 그냥 아무데나 던져 놓아도 살아서 올 것 같다늘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그만큼 세상사람 누구나 다 포용을 할 수 있어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인지 아우네 집에는 늘 많은 객들로 북적이고는 했다. 술이라도 한잔 걸치면 그 자리에서 휴지를 길게 풀어 멋들어지게 살풀이 한 판을 출 수 있는 멋을 지닌 사람이다.

 

 

섭지코지를 그리다

 

몇 년 만에 아우네 집을 들렸다. 변함없이 작업실에 앉아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아우. 서원리 맨 위편 양평군 양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작업실은 넓은 편이다. 한편에는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고, 한편으로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 집 작업실에는 온돌방이 함께 달려있다.

 

피곤할 때면 늘 이 집을 찾았다. 그리고 술 한 잔 마시고 뜨끈하게 불을 땐 온돌방에 올라 누워있으면, 온 몸에 찌든 피로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꼭 그래서만 이 집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 아우네 집에서 몇 달 동안 기거를 한 적이 있다. 바로 현재의 작업실이 그곳이다. 그래서 이 작업실은 나에게는 아픔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찾아 간 곳이라 차를 한잔 마셨다. 그리고 전시실을 둘러보니 전시실 안이 온통 섭지코지그림으로 가득하다. 섭지코지를 그린 많은 그림들은 각기 계절과 시간, 크기 등이 모두 다르다. 그런 섭지코지의 그림들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당시 제주의 아픔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 섭지코지만 그리고 있다고 한다.

 

더 많은 작품 그려 전시할 계획이라고

 

그림으로 그려내는 섭지코지의 아픔. 섭지코지는 4,3 양민 학살 때 252명을 학살한 곳이다. 이우의 그림 중에 여명이 밝을 무렵의 섭지코지 그림이 눈에 띤다. 섭지코지의 그림 위에 많은 반점이 있다. 학살당한 양민들의 눈물인지, 아니면 그들이 흘린 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그림 앞에 서면 싸한 아픔이 밀려온다.

 

 

오래 머물 수가 없어 바로 작업실을 뒤로 했지만, 그런 그림 속에 배어있는 아픔 때문인가 발길이 무겁다. 작업실 앞에 마련한 작은 연못에서 뿜어 나오는 물줄기의 소리도, 더운 5월의 한 낮의 뜨거움을 삭이지는 못하는 듯하다. 아우와 20년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아오면서 변한 것이라고는, 얼굴에 늘어난 주름뿐이다. 인연이란 참 질긴 것인지?

문화재 답사.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보면 참으로 희한한 것들을 만날 수가 있다. 주로 넘녀의 성을 상징하는 것들은 민속자료로 지정이 되는데, 그런 것들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애틋한 사랑이야기 한 자락쯤은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재미를 느끼는 것이기도 하지만.

충북 단양군 적성면 각기리. 이름부터가 유별나다. 이 마을에 가면 마을 입구에 돌이 서 있다. 흔히 ‘입석’ 혹은 ‘선돌’이라고 하는 이 돌은, 청동기시대부터 전해진 것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을입구에 세워진 선돌은 두 개의 선돌이 성을 상징하고 있어 특이하다.


남녀를 상징하고 있는 두 기의 선돌

꽃이 피는 철이나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꽃구경이나 단풍구경이다 하면서 여행을 간다고 하면서 난리들을 피는데, 혼자 떠나는 문화재 답사는 늘 쓸쓸하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주는 의미를 되새기고, 그것을 정리한다는 것 또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재미가 있기도 하다.


 


각기리의 선돌을 보고 한참을 고민을 했다. 왜 두 개의 선돌을 멀찍이 떨어트려, 그 선돌을 금줄로 연결을 했을까? 정월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정성껏 제를 지낸 듯, 암돌과 숫돌을 연결한 금줄에 길지도 남아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두 개의 돌을 짚으로 이엉을 엮어 둘러쳤다는 것이다.

남성을 상징하는 숫돌은 서쪽에 서 있는데 끝이 뾰족하고 높이가 높다. 높이 275cm 너비 220cm, 두께 60cm 정도로 세모꼴 형태에 가깝다. 이 숫돌의 둘레에는 높이 65~70cm 정도의 단을 쌓아 놓았다. 넓이는 4m 정도에 길이는 3.5m 정도이다. 이런 단을 쌓은 것으로 보아 이 선돌은 마을의 신표로 제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숫돌에 비해 동쪽에 서 있는 암돌은 넙적한 것이 특징이다. 높이는 180cm, 너비는 171cm, 두께 37cm 정도 규모의 자연석이다. 이 두 개의 돌은 17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이 돌을 각각 숫바위와 암바위라고 부른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암바위는 이엉을 엮어 치마처럼 밑 부분을 둘렀고, 숫바위는 머리 부분에 씌워놓았다.


둘러친 이엉이 성을 상징하고 있어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이 두개의 선돌이 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돌을 두른 짚으로 만든 이엉 때문이다. 숫돌은 모자를 씌우듯 했고, 암돌은 치마를 둘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가린 것이다. 그 이엉으로 인해 양편 돌의 성별이 확연해진다.

마을이름인 <각기리>는 이 선돌의 모습이 뿔처럼 생겼다고 하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각기리의 선돌은 도로변 마을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작은 골짜기의 물이 합쳐지는 곳이다. 여러 주변 상황을 살펴볼 때 각기리에는 선사시대부터 주변에 집단으로 사람들이 주거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각기리에 세워진 두 개의 선돌은 왜 남녀의 성을 상징하는 모습일까? 그것은 아마 이 마을의 여건으로 볼 때 풍농과 다산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본다.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마주 봄 두 개의 돌. 그 두 개의 돌을 금줄로 연결을 해 놓았다. 끈끈한 정으로 하나가 되는 부부와 같은 모습이다.

어느 곳에 있던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부부를 상징하는 암바위와 숫바위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것 하나에도 해학을 알고 멋을 아는 선조들의 지혜에 그저 감탄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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