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숙의 맞이굿 판, 신령들이 모두 감응하셨소.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이 없을 때가 있겠느냐? 세상살이가 다 어렵지만 내가 도와주마. 세상살이가 어려울 때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 자신을 아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7일 오전 일찍부터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274에 소재한 김성겸(, 61)의 집에서는 덩덕쿵 소리가 들린다. 이 집 대문에는 <경기안택굿보존회 부천지부>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이정숙(56)은 경기안택굿보존회장인 고성주에게 내림굿을 받은 신딸이다. 내림을 주관한 무격은 신아버지 혹은 신엄마로 호칭이 되며, 이들의 관계는 영적으로 맺어진 부녀지간으로 오히려 친 부녀지간보다 더 돈독하기도 하다.

 

이날 이정숙의 집에서 열린 굿은 맞이굿이다. 맞이굿이란 신을 모시고 있는 기자(祈者)들이 자신이 섬기는 신을 위로하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양부리들의 안녕을 위해서 지극한 마음으로 올리는 제의식이다.

 

 

가득 차려진 제물들과 많은 기자들

 

넓지 않은 집안이다. 단독주택인 이 집 안에는 온갖 재물들이 차려졌다. 맞이굿을 할 때는 진적상을 차리고 천궁맞이상을 따로 차린다. 천궁맞이는 밖에서 신령들을 청해 들이는 상이지만, 이날은 집안에 상을 차렸다. 그러다가보니 넓지 않은 집안이 온통 상에 차려놓은 제물로 가득하다.

 

이날 굿에 참석한 사람들도 당주인 이정숙과 경기안택굿보존회 고성주 회장을 비롯해 제자들까지 8명이나 되는 무격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 굿판에 모이기란 특별한 행사나 굿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들 경기안택굿보존회 회원들을 늘 이렇게 모여서 굿을 한다.

 

 

이렇게 모여서 선생님들이나 신형제들이 굿을 하는 모습을 보고, 상을 차리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굿 속을 배워가는 것이죠. 예전부터 선생님들은 끼고 가르치지를 않아요. 스스로가 보고 느끼면서 터득을 하는 것이죠.”

 

고성주 회장은 굿상을 보아가면서 이야기를 한다. 과거 많은 만신들이 제자들을 끼고 가르친 적이 없다고 하면서, 지금 이렇게 따라다니면서 학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훌륭한 만신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진다는 것.

 

 

13시간에 건친 맞이굿, 정말 장엄하다

 

오전 9시에 상을 다 차린 다음, 이정숙의 맞이굿이 시작이 되었다. 처음에 이정숙이 모든 신령들을 맞아들이는 천궁맞이로 시작해, 조상들을 천도시키는 지노귀까지 다 마친 시간은 밤 10시가 넘었다. 13시간이 걸린 셈이다. 요즈음 굿이 보편적으로 7~8시간, 짧게는 5~6시간에 그치는 것을 생각하면 그 두 배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일반적으로 기자들이 굿을 할 때 수양부리나 굿을 부탁한 제가집에게 상당히 강압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물론 이들이 이렇게 강압적인 언사를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기자가 아닌 몸에 실린 신령의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안택굿보존회 사람들은 그렇게 강압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신령이 왜 사람들에게 욕을 하느냐는 것이 이들이 반문이다. 이들의 굿판에 들어가면 누구나 흥겨운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즘 많이 힘들지. 요즈음은 누구나 다 힘들 때지. 하지만 세상을 탓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한 번 돌아봐. 혹 나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닌지. 내년에는 좋아질 것이야. 조금 힘이 들어도 참고 노력을 하면 나아질 거야. 걱정마라 내가 도와주마.”

 

 

입살이 보살이라는 속담이 있다. 남을 계속 험담을 하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을 험담하는 말을 조심해왔다. 거기다가 신령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남에게 좋지 않은 계속 말을 한다면 좋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기에 굿판에서 기자들은 제가집에게 쉴 새 없이 도와준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잘 될 것이라고 염려를 하지 말란다.

 

그런 말 중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한다.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고, 혹 일이 잘못 되었을 때 그것이 내 탓은 아니었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남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나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말. 굿판에서 큰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결국 나 스스로의 노력을 다한 후에야 신령도 도움을 준다는 것을.

 

곱게 신복(神服)을 차려입은 여인이 주변의 눈길도 의식하지 않은 채 대성통곡을 한다. 왜 내림굿을 할 때는 모두가 저렇게 울어야 할까? 하긴 울만도 하다. 사회에서 남들이 흔히 말하는 무당(巫堂)’이 되는 날이다. 예전처럼 집제자로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저 사람들과는 달리 접신이 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10일 오전부터 시작 된 내림굿. 이 날 내림을 받은 사람은 현해탄을 건너 온 재일교포 2세이다. 일본 요코하마에 거주하고 있는 송미영(47)이 주인공이었다. 이날의 굿은 엄밀히 따지자면 내림이 아닌 가리굿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리굿이란 이미 자연통신 등으로 신당을 갖고 있는 사람이 다시 제대로 내림을 받는 행위를 말한다.

 

 

왜 접신이 되면 다들 울지

 

부정을 친다. 굿판에서 제일 먼저 시작하는 부정굿이란 굿판의 모인 모든 사람들과 굿판을 정화시키는 굿거리이다. 모든 부정을 다 가셔 내림굿이 온전히 신령들이 흠향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제차이다. 그러고 나서 굿이 시작되었다. 시작한지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송미영이 신복을 입고 굿판에 들어섰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송미영은 한국말을 다 알아듣기는 하지만 표현을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했다. 거기다가 굿판에서 그 많은 신령들을 일일이 호명하기도 쉽지가 않다.

일본의 신당은 우리하고는 많이 달라요. 우리는 큰 절을 하는데 일본의 무당들은 허리만 굽혀 인사를 해요. 우린 굿판에서 타살굿같은 데서만 피를 보는 굿거리가 있는데, 일본은 꼭 굿을 하면 닭 같은 것들을 잡아 피를 뿌려요.”

이날 내림굿의 주제자인 고성주(, 60. 수원시 지동)의 말이다.

 

 

송미영은 굿판에 들어서자마자 도약을 하기 시작했다. 도약이란 접신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행위이다. 그러고 나서 목을 놓아 엉엉 울기 시작한다. 왜 내림굿을 받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목 놓아 우는 것일까?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삼국시대까지처럼 단의 주인이요. 집제자가 아니다. 그들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당이라고 해서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굿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이날 굿판에 함께 들어 선 사람들이 연신 곁에서 말을 한다.

참지 말고 다 풀어버리세요

울고 싶으면 마음대로 우세요. 그러고 나서 다시는 울지 마세요.”

오늘까지는 마음껏 울고 내일부터는 울지 마라. 이제는 신령님들이 너를 보호하실 테니 앞으로는 울 일도 없다

목을 놓아 울던 송미영의 표정이 달라진다.

 

 

신복을 갈아입으면서 춤을 추던 송미영은 언제 그렇게 목을 놓아 울었냐는 듯, 피리와 장단에 맞추어 날아갈 듯 춤을 춘다. 거리를 마친 송미영에게 절을 받고 난 고성주가 쪽을 찐 머리에 비녀를 질러준다. 이로써 신아버지와 신딸의 관계가 형성이 된 것이다. 고성주는 직접 내림굿을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요즈음은 내림을 받은 지 3년이 안된 무당들도 내림을 한다.

 

저는 정말 내림굿을 하고 싶지 않아요. 제 평생 직접 내림굿을 해준 신딸들은 몇 명 없어요. 얼마나 아픈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 아픔을 전해줄 수가 없어서요.”

고성주의 말처럼 이날 굿판에 함께 참여한 이정숙(, 58. 부천거주) 등 두 세 명밖에 신딸이 없다. 절을 받은 고성주에 이어 이정숙 등이 송미영과 맞절을 한다. 신의 형제로 맺어진 것이다.

 

 

일본 땅에 또 한 명의 무당이 태어나다.

 

일본에도 무당들이 상당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신도들을 갖고 있는 무당도 있다는 것. 하지만 그들은 우리나라의 무당들과는 달리 신당인 전안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날 굿판에서도 연신 한국과 일본의 신들이 잘 합수 받아 불려라고 덕담을 해준다. 산거리를 할 때는 우리나라의 모든 산신령들을 호명하고 난 뒤, 일본 후지산의 산신령까지 거명을 한다.

 

신의 존재는 무소불위(無所不爲)라고 했던가? 가지 못할 곳이 없고, 어디나 다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일본 땅이라고 신이 없을 것인가? 굿판이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점이다.

올 해는 독일여자와 우크라이나여자도 내림을 해 달라고 해요. 우리말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말귀는 다 알아들어요. 이러다가 앞으로는 전 세계에 신딸을 두게 생겼어요. 느지막이 세계일주를 하게 생겼죠.”

 

10시간에 걸친 내림굿이 지노귀굿을 끝으로 모두 끝났다. 11일 오후 비행기로 요코하마로 돌아간다는 송미영. 이것저것 자상하게 챙겨주는 고성주를 보면서, 신으로 맺어진 부녀사이지만 오히려 친 부녀보다 더욱 애틋한 감정을 느낄 수가 있다. 많은 신령들을 모시고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야 할 딸이기 때문인 듯하다.

“청실홍실 엮어서 이 명당에 놀구나 가시오.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 저승에서 이루소서”

구성진 가락이 울려퍼진다. 2012년 3월 13일(화) 오전 11시.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 381번지에 소재한 쌍룡사 굿당. 그 굿당 안 한 방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이다. 이 날 굿은 살아생전 결혼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 청춘남녀를 결혼을 시키는 ‘영혼결혼식’이다.

영혼결혼식이란 죽은 망자들끼리 결혼을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청춘남녀들은, 아무래도 부모나 가족들의 마음속에 깊은 한을 남기게 된다. 그런 남녀를 맺어주는 자리이니, 결혼이라고 해서 기쁘기보다는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이 배어있다.




주무 고성주가 큰머리를 얹고 굿을 하고 있다. 굿상을 마주하고 좌측에는 신랑이(2) 우측에는 신부가(3) 마주보고 있다. 옷가지와 패물까지 마련한다. 


“이승에서 못 이룬 사랑, 저승에서 이루소서”

이날 결혼을 하는 망자 신랑은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거주하는 평창최씨의 아들이고, 망자 신부는 충주지씨의 딸이다. 이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양쪽 집안의 굿을 주관한 당주는 이미선(여) 무녀이고, 굿에 동참한 주무와 무녀는 고성주(남)와 이정숙(여)이다. 그리고 굿청에 들어선 악사는 박노갑(피리, 태평소)이 맡아했다.

아침부터 굿상을 차린 일행은 인형으로 된 신랑과 신부를 모셔드렸다. 그리고 상 위에는 한복이며 패물들이 진열이 되고, 전통결혼식과 같은 준비를 했다.



당주 이미선의 대신거리와 여무 이정숙의 창부, 서낭이 이어졌다. 그리고 굿상 앞에는 초례청이 마련되었다.


“낮이면 물을 건너고 밤이면 용을 타고 정처 없이 가는 길이 저승의 신혼여행 길이라네. 부디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 저승원문 들어가서 원도 없고 한도 없이, 부디부디 잘 사시오”

들으면 왈칵 눈물이라도 날 것만 같다. 남무 고성주의 앉은부정으로 시작한 굿은 상산으로 접어들었다. 큰머리를 머리에 이고, 그 위에 갓을 올린 고성주의 소리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다. 벌써 이 길로 들어선지 40년 가까이 되었다. 어딜 가나 당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통한다.

“마른나무에 물이 오르고, 산천에 싹이 돋고, 계절이 좋은 시절이라. 좋고 좋은 날 가려내어 선남선녀 신방꾸미고, 저승원문 함께 들어가 만년천년 해후 하시라고..”




전안례가 시작이 되었다. 먼저 신랑측에서 기러기를 신부측에 전달하고, 신랑신부가 초례청으로 입장을 했다(2) 합근례(3)를 마친 신랑과 신부는 미리 마련한 신방으로 들었다


보기 힘든 영혼결혼식, 끝까지 지켜봐

영혼결혼식은 정말 보기가 힘든 굿이다. 자주 있지도 않지만, 제가집(망자의 가족)이나 당주(굿을 맡은 무녀)들도 별로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좋게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가 있었다. 30여년 굿판을 누비면서도 영혼결혼식은 3~4번 정도 밖에는 볼 수가 없었으니, 그 귀함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청춘남녀가 죽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영혼결혼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망자들도 모두 택일을 하고 사주를 다 본다. 수십 쌍을 사주를 보아도 이루어지는 것은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그만큼 더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 영혼결혼식이다. 영혼결혼식은 일반 굿과는 다르다. 먼저 안굿을 하고 난 다음, 굿상 앞에 초례청을 차린다. 신랑과 신부는 전통혼례와 같은 방법으로 혼인식을 마치고 나면, 신방을 꾸미게 된다.

이 신방을 꾸미고 나면 바로 지노귀굿을 하게 된다. 망자의 천도굿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날 굿은 고성주의 상산다음에 당주인 이미선의 대신거리와 이정숙의 창부, 서낭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난 다음 초례청을 차리고, 전안례부터 시작이 되었다. 신랑이 신부에게 기러기를 전하고 난 뒤, 초례청으로 신랑과 신부가 입장을 했다.


말미에서 바리공주를 하는 고성주.


초례청에 마주한 신랑신부는 서로 맞절을 하는 교배례를 하고, 술잔을 서로 나누는 합근례를 하게 된다. 서로가 세 번을 술을 나누어 마시는 합근례를 하고 난 다음에는, 신랑신부는 미리 준비해 놓은 옆방에 신방을 차렸다. 작은 이부자리가 깔려있고 두 망자를 상징하는 인형을 누인 후 불을 껐다.

진한슬픔을 목으로 넘겨

가족들이야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갈래갈래 찢어질까? 아마 그 깊은 슬픔은 어느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굿을 주관하는 무녀들은 연신 듣기 좋은 말을 한다. 그것이 바로 굿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얻게되는 것이다.



말미에 이어 망자상을 돌면서 도령을 돈다. 그 뒤를 당주 이미선이 신랑신부를 안고 뒤따른다. 밖으로 나와 저승길을 잘 갈 수있도록 길을 가르고 있다(아래)


지노귀굿은 말미라고도 한다. 바리공주부터 시작해, 망자의 상인 말미상을 놓고 고성주가 춤을 추면서 돌영을 돈다. 그 뒤로 망자의 옷과 신방에서 나온 두 신랑신부를 안고 있는 당주 이미선이 뒤따른다. 그렇게 돌영이 끝나고 나면, 바로 밖으로 나가 길을 가른다. 저승길은 험하고 또 험하다고 한다.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길을 닦는 것이다.

길가르기가 끝나고 나면 가시문 넘기기를 한다. 저승길은 가시밭이 있다고 한다. 그 가시밭에 걸리지 않고 저승원문에 들어갈 수 있기를 축원하는 것이다. 8시간에 걸친 영혼결혼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끝으로 뒷전을 하면서도 두 사람의 영혼이 저승에 들어가 백년해로를 할 수 있도록 축원을 한다.



길을 가르고 난 뒤에는 가시문을 넘긴다. 저승원문을 들어가는 길은 가시가 많다고 한다. 가시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의식이다. 끝으로 상식을 올린다. 상례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들이 망자를 위해 올리는 상식이다


“그저 저승원문에 들어가 백년해로를 하실 적에, 두 사람 모두 인도환생 하시어서 이승에서 다시 만나 못다 한 사랑 이루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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