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에서 함양을 가다가 고개 마루턱에 오르면 우측으로 늘 만나는 안내판이 하나 보인다. <여원치 마애불상>이라는 안내판이다.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이상하게 버스 안에 있어서, 안내판을 보고도 차에서 내릴 수가 없으니 속만 태울 수밖에. 이번 남원 답사에서는 제일 먼저 이곳을 찾은 것도 그런 속을 달래기 위해서다.

답사 첫 날부터 비가 뿌린다. 일정을 잡아 놓았으면 아무리 비가와도 강행군을 해야 하는 것이 답사일정이다. 남원을 출발하여 24번 도로를 타고 운봉, 함양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여원치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 마루턱 부근에 안내판이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여원치 마애불상’이란 안내와 함께, 도로에서 200m 정도 떨어져 있다는 안내 문구가 적혀있다.



황산대첩의 대승을 예언한 꿈속 노파

길을 따라 약간 경사가 진 길을 밑으로 내려가니 넓은 공터가 나온다. 이야기를 들으니 누군가 이곳에 집을 지으려고 땅을 사 정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화재 주변에는 건축물 허가가 나오지를 않으니 축대만 쌓아 놓은 듯하다. 축대 밑으로 오래된 고목과 바위가 보인다. 길은 여원치로 올라가는 24번 도로 밑이다.

남원시 이백면 양가리 5-3에 해당하는 이곳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인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애불은 고려 말기에 조성한 것으로, 허리 아래 부분은 아직도 땅 속에 묻혀있다. 이 마애불을 조성한 것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꿈에 노파가 나타나, 황산대첩에서 대승할 것을 예언한 노파에게 감사를 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운봉현감이 마애불을 조성한 내력을 적었다는 글

운봉현감 박귀진의 글이 적혀 있어

여원치 마애불은 고려시대의 마애불에서 보이는 거대마애불은 아니다. 머리 부분은 많이 훼손되었으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허리 아래 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알 수가 없지만, 넓은 어깨와 큰 귀 등은 전체적으로 이 마애불의 느낌을 시원하게 해준다.

마애불의 옆에는 네모나게 암벽을 파고 그 안에 글을 음각해 놓았다. 이 글은 운봉현감 바귀진이 이 마애불을 조성하게 된 내력을 적고 있는데, 이성계의 꿈에 노파가 나타나 황상대첩의 승리를 알려주었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그런 적힌 글로 보아 이 마애불의 조성시기가 고려 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올맀다. 왼손은 팔굼치 밑이 잘려나갔다.

사라진 보호각, 다시 세워주어야

법의는 U자형으로 가슴으로부터 내려졌고, 오른손은 가슴 위로 올린 모습이다. 왼손은 팔꿈치 아래가 잘려나가 어떤 수인이었는지는 정확지가 않다. 마애불의 앞에는 예전 보호각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주춧돌이 놓여있다. 보호각이 있었다는 소리다. 언제 보호각이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보호각을 세우고 허리 아래 부분을 파서 온전한 모습을 보이게 할 수는 없는 것인지 안타깝다.


그러나 조성연대가 정확한 점, 그리고 조성이유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마애불은 가치를 높인다.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당시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된 듯하다. 역사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는 여원치 마애불. 아마 꿈속에서 황산대첩의 대승을 알려준 노파를 새긴 것은 아닐까? 보존에 좀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할 듯하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2에 소재한 사적 제104호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고려 말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이다. 이곳에는 1573년에 다시 만든 비가 있는데도, 대첩비지라고 한 것은 두 가자의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이곳에 비만 있던 것이 아니라, 보호각과 외삼문, 그리고 비를 보호하던 별장청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론을 할 수 있다. 처음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싸움인 황산전투의 승리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조선조 선조 10년인 1577년에 대첩비를 세웠다. 그 후 현종 8년인 1677년에 보호각을 세우고, 고종 19년인 1882년에는 보호각을 고쳐지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대첩비가 파괴되어 파편만 남게 되었다. 이 파괴된 비를 ‘파비각’을 지어 보관하였기 때문에, 원래의 비가 사라져 대첩비지라고 볼 수도 있다.



조선 개국의 태동이 된 황산전투

지금의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을 새겨 자시 세울 때, 원래의 좌대인 귀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1973년에는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전과 홍살문, 삼문과 담장 등을 새로 조성을 하였으며, 파비각 등을 조성하여 일제에 의해 파손이 된 원래의 대첩비를 보관하고 있다.

운봉읍 화수리를 찾아갔다가 들려 본 대첩비지. 이곳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성계는 전주 이목대에서 전주 이씨 문중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나라를 세울 것을 은연중에 비친다. 결국 이 황산의 전투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한 곳이니 역대의 왕들이 이곳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선조의 명에 의해서 대첩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비 받침인 귀부, 정말로 기이하네.

대첩비를 돌아보는데, 그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귀부를 제작한 것일까?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귀부의 형태는 많이 달라진다. 신라 때까지만 해도 거북의 형태를 본 딴 귀부가 성행을 하였으나, 고려에 들어오면서 머리는 용에 몸이 거북이인 형태로 변화가 되었다.

그런데 이 귀부는 도대체 지금까지 보아오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한 나라를 태동하게 한 전투지에 세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조금 부족한 듯한 이유이다. 이 귀부를 보면 고려시대의 귀부와는 또 다른 힘이 느껴진다. 머리 부분은 용의 머리인 듯 뿔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있다. 그런데 그 뿔 속이 비어있었던 것처럼 구멍이 나 있다.




용의 발을 가진 귀부와 콧구멍의 비밀

거북이 등의 문양은 같으나 그 다리부분을 보고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귀부의 머리 부분이 용이라고 해도, 다리는 거북이의 다리를 조각하는 것이 통례이다. 하지만 이 거북이의 몸은 다리가 용의 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뒤로 돌아보니 정말로 혀를 찰만큼 대단한 조각이다.

앞뒷발은 모두 용의 비늘로 덥혀있다. 그런데 뒷발을 보니 안쪽 발가락 하나가 위로 솟아있다. 왜 이렇게 발가락 하나만을 위로 추켜세웠을까? 반대편으로 돌아가 보니 그곳은 나란히 있다. 이렇게 추켜세운 발가락 하나가 이 조각이 어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알게 해준다. 그 뿐만 아니라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입모양도 특이하다.




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콧구멍이 있던 곳이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 안이 움푹한 것을 보면, 콧구멍 안이 비어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떻게 돌 안을 이렇게 작은 구멍으로 파낼 수가 있었을까?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 대첩비의 귀부. 1시간여를 들여다보았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만 했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세계에 감탄하는 것으로 만족을 하면서.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1에 가면 사적 제104호인 황산대첩비지가 있다. 솟을대문으로 마련한 삼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대첩비가 서 있다. 좌측으로는 사적비가 우측에는 파비각이 보인다. 이 사적지는 고려 말 우왕 6년인 1380년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이성계를 대장군으로 한 고려군은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왜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우두머리를 잃은 왜구를 고려군이 몰아쳐 완전히 섬멸하였다. 이곳에서 승리를 한 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전주 이목대에서 잔치를 베풀고, 나라를 일으킬 의중을 보였다.


파비각(破碑閣)에서 분노를 느끼다

일본으로서는 이 황산의 대첩비가 상당한 수모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보니 이 비를 놓아들 리가 없었던 것. 선조 때 개국시조인 이성계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대첩비를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에서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다. 방치가 되어있는 대첩비를 1977년에 수습을 하고 비각을 세웠다.

파괴된 비는 몇 조각이 나 있다. 그리고 비문에 새겨졌던 글은 모두 쪼아 알 수가 없게 만들어 버렸다. 전국의 수많은 문화재를 수탈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이렇게 소중한 역사의 기록을 망쳐놓은 일본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이런 패악을 저지르고서도 반성은커녕, 아직도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면서도 이 나라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있다.



조각이 나버린 황산대첩비. 일제는 비를 이렇게 파괴했다.

울분은 극에 달하고

대첩비지를 나와 담을 끼고 돌아가니 전각이 보인다. 안에는 편편한 바위가 있고, 그 위는 축대를 쌓았다. 이 전각을 ‘어휘각’이라고 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한 후, 다음에 본 석벽에 8원수 4종사관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황산대첩의 승리는 자신의 공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공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승전을 적은 비를 모두 쪼아내 무참하게 훼손을 했다.

이 어휘각의 안에 있는 바위벽의 아래편을 보면 글이 써졌을 것 같은 공간이 보인다. 그런데 그 부분이 심하게 훼손이 되어있다. 600여년이나 잘 보존이 되어있던 이 글씨를, 1945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훼손을 시켰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 비전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글씨를 모두 쪼아버렸다고 한다.

우리의 승전의 역사를 기록한 대첩비. 그것을 모두 훼손한 일제의 만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수많은 문화재를 수탈하고도 돌려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일본. 그러한 나라에 대해 언제나 저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라. 도대체 우리 선조들의 기개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오늘 황산대첩비지에서 본 파비와 훼파된 성지를 바라보면서, 이제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수탈해 가고,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 했던 책임을 물어야 할 때란 생각이다. 그리고 당당히 우리의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요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수많은 아픔을 당한 이 민족의 상처에 대한 보상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찾는 이 없는 황산대첩비지를 우리민족의 기개를 찾을 수 있는 교육장으로 활용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만이 또 다른 문화말살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는 천년을 사는 나무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 묵은 은행나무는 용문사 은행나무로, 그 수령이 1,000~1,500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나무에 큰 뜻이 새겨진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바로 청주시 중앙공원 안에 있는 수령이 1,000년 가까이 된 은행나무인 ‘압각수(鴨脚樹)'이다.

압각수란 청주 중앙공원 안에 있는 은행나무 이름인데, 잎의 모양이 오리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과, 이 나무의 뿌리가 물오리 발처럼 사이가 붙어 있어 생겼다는 설이 있다. 이 나무가 왜 유명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곳 압각수가 서 있는 장소가 청주목의 객사 문 앞이었다. 그런데 고려 공양왕 2년인 1390년 5월에, 이색, 권근 등 10여명이 이성계의 반대파로 지목되어 청주옥에 갇히게 되었다.


죄 없는 충신들을 살려낸 압각수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 2년인 1390년에 이초와 윤이가 ‘이초의 난’을 일으켰다. 이초의 난이란 고려 말엽 정선 사람인 이초가 고려말엽 공양왕 때 정5품의 무관직인 중랑장 벼슬을 하였는데, 윤이와 함께 명나라에 있을 때 명나라 황제에게 호소하여 명나라의 힘을 빌려 시중 이성계를 없애기 위하여 모의를 하고 하였다.

그들은 명나라 태조에게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한다고 거짓으로 고하였다. 또한 이를 반대한 이색 등을 살해하고, 우현보 등은 유배하였다고 거짓으로 알렸다. 그때 사신으로 명나라에 머물던 동지 밀직사 조반이 귀국하여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공양왕 2년인 1370년에 이들을 잡아들였다.



천년 세월을 버텨 온 압각수의 밑동
 
그리고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 인재 이종학, 우현보 등 충신 10여명을 잡아들여, 청주 옥사에 하옥하는 청주옥사가 일어났다. 이 무렵 청주지방에는 갑자기 집중호우가 쏟아져, 청주성의 민가와 옥사가 침수되었다. 이색 등 옥에 갇혀 있던 충신들은 객사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인 압각수로 올라가 화를 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이색 등이 죄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이들을 방면하였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인 압각수는 수령이 천년 가까이 되었고, 높이는 30m에 밑동의 둘레가 8m에 이른다. 은행나무 앞에는 양촌 권근이 옥에서 풀려난 후 지었다는 시비가 서 있다.



권근의 시비와(위) 압각수의 줄기. 이 줄기에 충신들이 올라가 홍수를 피해 목숨을 건졌다.

근거 없는 소문으로 주 무왕의 아우 주공에게 불행이 미치니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 벼를 쓰러뜨렸네.
고려 공양왕이 청주에 큰물이 넘쳤다는 말을 듣고
하늘의 뜻이 예나 이제나 같음을 알았도다.

압각수. 천년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 이 나무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죄가 없는 사람은 하늘도 그들을 살려낸다는 깊은 뜻을 알려주는데, 이 말은 죄가 있는 사람은 곧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말과 같은 뜻은 아닐까? 죄 없는 백성들을 위해 일을 하지 않는 무리들은, 언젠가는 이런 벌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괜한 생각을 한 것조차 죄스러워, 나무 옆에서 얼굴을 붉힌다.


압각수의 주변에는 축대를 쌓아 보호를 하고 있다.

전북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 남원시 산곡동 16-1에 소재한 이 산성은 해발 518m의 교룡산의 천연적인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으로 그 둘레는 3,120m이다. 9월 18일 한 낮의 날씨는 아직도 무덥다. 남원으로 들어가 교룡산성을 오르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만 않지만 그래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성은 보이지를 않는데 숨이 차고 땀은 비오 듯 흐른다.

산성 앞으로 가니 성 안에서 무슨 공사를 하는지, 성벽이 터진 곳으로 차들이 드나든다. 차를 왕래하게 하느라, 물길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공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물길을 막아 찻길을 내 놓은 것이 아쉽다. 교룡산성은 언제 축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성을 쌓은 방식이나 입지의 형태로 보아 백제 때의 성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남아있어

현재는 산성의 동문인 홍예문과,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옹성이 남아있다. 그리고 동문의 양 편으로 길게 복원을 한 성곽이 보인다. 군데군데 아직 성벽이 남아있다는 교룡산성. 신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쌓았다는 이 산성은, 우리나라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남원은 『춘향전』의 무대인 광한루원과, 매월당 김시습의 단편소설인『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인 만복사지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만큼 역사 속에서 정치, 군사, 문화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교룡산성 안에는 우물 99개와 계곡이 있어, 산성 주변의 주민들이 유사시에 대피나 전투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좋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직도 성 안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군기터 등 당시의 흔적이 보인다.




주변 성곽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해

남원에는 주변지역을 합해 20여 개의 산성이 있던 곳이다.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그 중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교룡산성이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퇴각하는 왜구를 맞아 싸웠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는 승병장 처영이 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성안에는 무기고를 비롯해 별장청, 장대, 염고, 산창 등의 시설이 있었다. 전쟁에 대비해 정유재란 시에는 남원도호부 관내인 운봉, 장수, 임실, 구례, 곡성, 담양, 옥과 등의 양곡을 거두어 교룡산성에 보관하였는데, 각 지역의 곡식을 저장하는 곡성창, 구례창 등의 곡식창고가 있었다.



홍예문 안에 줄지어 선 비(위) 홍예문 안에서 밖을 보면 옹성이 드러 쌓고 있다(가운데) 홍예문 위에서 본 옹성 

홍예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 홍예문 아래편에는 문틀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움푹 파인 돌에는 물이 고여 있어, 흔적 없이 사라진 당시의 영화를 아쉬워한다. 높이 4.5m의 성벽은 단단하게 축성이 되었으며, 축성 당시에는 치첩 1,016개소에 달했다고 하니, 교룡산성의 축성이 대단했음을 알 수가 있다.

홍예문 안쪽으로는 줄지어선 공덕비 등이 보인다. 홍예문의 위로 올라서니 비탈길에 조성한 옹성이 단단해 보인다. 성문을 공격하려면 그 옹성 위에서 쏟아지는 불과 기름, 돌 등을 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을 것 같다. 동문 옆으로는 산 정상부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빠져나가고 있다. 아마 저곳에 수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교룡산성 안에는 물이 풍부했다는 것을 일 수 있다.



백제 때 축성한 교룡산성. 성곽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을 밟으며 걸어본다. 발아래 밟히는 풀들이 소리를 낸다. 백제 때에 처음으로 축성을 하여,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쟁의 회오리를 거쳤을까? 아마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도 이렇게 성곽을 밟으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느라 밤잠을 설치지는 않았을까? 성 안에 자리한 초옥에서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다. 그렇게 9월 중순 땀을 흘리며 찾아간 교룡산성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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