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 51에 소재한 용화사. 그 경내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1호인 ‘이천자석리석불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용화사 경내 노천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이 자리한 곳은, 예로부터 미륵당이라고 전해진다.

 

전체 2개의 돌로 이루어진 이 석불은 머리에 원형의 넓은 갓인 개석을 쓰고 있으며, 긴 타원형의 얼굴에는 이마 중앙에 백호가 표현되었다. 양눈썹과 는, 돌출된 코와 입이 작게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잃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은 양 손의 표현과 더불어, 마멸이 심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용화사의 주존불

 

이 불상은 얼굴과 더불어 짧은 목, 몸체에 비해 좁은 어깨와 간결하게 처리가 된 옷주름 등을 볼 때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용화사(龍華寺) 경내에 주존불로 노천에 봉안되어 있는 이 석불입상은, 높직한 석축을 쌓고 그 중앙에 석불을 모시고 있다. 뒷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이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기단이 이 석불입상을 조성할 때 있던 것이 아니다.  새로 조성을 한 것이다. 가슴 아래에 커다란 하나의 동과, 가슴 위 부분과 얼굴이 하나의 돌로 조성된 이 석불입상은, 모든 것이 간략하게 처리가 되어있다. 이는 고려 말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천시의 경우 이러한 석불과 마애불 등이 딴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시장의 번영을 위해 세웠다고?

 

일설에는 고려 현종 9年인 1018年, 장호원읍 선읍리에 감무를 두어 그 아문을 설치하였을 때 시장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에서 건립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석불입상을 시장의 번영을 위해 조성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대개 시장이나 마을의 안녕 등을 위한 것이었다면 석장승을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석리는 본래 음죽군 근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새롭게 조성된 지역이다. 여주군 소개면의 흑석동 일부와 가서면의 자은동 일부를 병합하여, 자은과 흑석의 일부를 따서 자석리라 하였으며, 설성면에 편입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입상을 시장의 번영을 위해 조성했다는 것은, 타당하지가 않다.

 

화강암의 두 개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을 한 용화사 석불입상. 일반적으로 석불의 경우 몸에 팔을 조각하는 것이 통례인데 비해, 이 석불입상은 그저 통으로 두 개의 돌을 포개놓고 얼굴의 형상을 조각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팔은 찾아볼 수 없고, 균형은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많은 석불을 만나보았지만, 그 중에 가장 약식화 된 석불입상이었다는 생각이다. 한창 더위가 기승을 떨 때 찾아갔던 용화사 자석리 석불입상. 올 가을이 짙을 때 이곳을 다시찾아, 가을의 풍취와 어울리는 또 다른 모습이 보고 싶다.

승광재. 조선의 황손인 이석씨가 사는 곳이다. 한옥마을 최명희 문학관 인근에 있는 승광재는 2004년 8월 경에 지어진 집이다. 이곳은 조선황실의 마지막 황손이라는 이석씨가 거주를 하고 있으며, 전통예절을 가르치는 설예원과 함께 있다. 현재 전라북도 도지사인 김완주 지사가 전주시장으로 재직시 이 승광재를 지어 이석씨를 머물게 했다는 것이다.

승광재는 한옥마을의 한편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긴 흙담 사이로 난 골목 안에 일각문이 보이고, 그 문 위에는 ‘승광재’라는 현판을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는 설예원이 있고, 우측으로는 ㄷ 자로 꾸며진 승광재가 자리한다. 승광재는 ㄱ 자 집 두 채를 연결해 ㄷ 자로 꾸민 집이다. 승광재에는 황실 사람들의 사진과 황실에 관련된 내용들이 진열이 되어있다.




지난 해 명성황후 생가에서 만나보다.

내가 황손 이석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10월 8일 명성황후 생가에서이다. 명성황후의 추모제를 마치고 그 자리에 참석한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본명 이해석)를 생가 마루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올해로 벌써 70세인 이석 씨는 한 때 가수로도 활동을 했으며, 터전을 잡지 못해 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종 황제의 손이고 아버지는 의친왕이다. 하기에 명성황후는 이석 씨의 할머니가 된다.


지난 해 명성황후 생가에서 만나 황손 이석씨. 그리고 현재 한옥마을의 승광재

황손 이석 씨는 1941년 음력 8월 3일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사동궁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결국 궁에서 나오게 되고, 대한제국이 막을 내리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1979년까지는 그나마 전 박정희 대통령의 안배로 서울 궁정동 청와대 옆, 칠궁에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5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곳에서도 쫓겨나 1년이면 12번도 더 이사를 다녔단다.

중앙시장과 동대문시장에서 국수장사, 자장면 장사 등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는 황손 이석 씨였다. 한 낮에 찾아 든 승광재에는 문이 닫힌 채 나그네들만 왁자하니 집안을 돌아보고, 예절을 배우러 온 아이들인지 소리를 치면서 뛰어다닌다.

요즈음 한창 인기리에 방영이 되고 있는 사극을 보면서, 만일 일본과의 그런 개탄스런 과거가 없었다고 한다면 어찌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나 있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승광재가 조금은 남다른 집일 것만 같다. 오래된 고옥도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서 조용하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도 아니다. 그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시끄럽게 만든다. 그 한편에 숨을 죽이듯 엎드려 있는 승광재를 보면서, 세월의 무심함이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승광재와 설예원(아래)

오늘 황손의 집은 낯이 설다. 언제나 그렇듯 이곳도 결코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도 이나마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고맙다는 황손의 말을 되새겨본다. 글쎄다,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오늘 한옥마을 한 끄트머리에서 만난 황손의 집에서, 가슴 한편이 싸한 느낌이다.


위는 영조의 가계도, 아래는 고종황제의 가계도(전단지 전사)


10월 8일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한지 114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 아침 여주 명성황후 생가지 앞에 있는 문예관에서는 명성황후 114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처음에는 행사를 크게 하기로 했으나 신종플루로 인해 대폭 축소해, 이기수 여주군수를 비롯한 300여 명의 내외빈 인사들이 모여 명성황후의 뜻을 기렸다.

 

명성황후는 조선조 제26대 고종황제의 비로 본관은 여흥이다.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의 외동딸이다. 8세 때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866년(고종 3) 3월, 16세 때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 명성황후 여주 명성황후 생가지에 모셔진 명성황후의 영정

  
▲ 생가 정면 여주읍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지

아침 일찍 서둘러 생가지로 향했다. 명성황후 생가지는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8세까지 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의 생가지에 잇는 집은 숙종 13년인 1687년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지어졌다. 당시의 건물로 남아있던 것은 안채뿐인데, 1995년 행랑체 사랑체 별당 등을 복원하였다. 이 생가의 우측에는 명성황후 탄강구리비가 서 있다.

 

  
▲ 안채 명성황후 생가 안채. 이 안채만 남아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 탄강구리비 명성황후의 탄생내력을 기록한 탄강구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탄강구리비는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향집에 세운 것이다. 탄강이란 왕이나 성인 등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고, 구리란 고향이라는 뜻으로 탄강구리비란 명성황후가 태어난 고향이라는 뜻이다.

 

  
▲ 별당 명성황후가 어린시절을 보낸 생가의 별당. 1895년 동학혁명 때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탄강구리비의 뒷면에는 광무8년인 1904년에 세워졌으며 '5월 어느 날 두손을 맞잡고 공손히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조 제27대 황제인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황제의 친필로 알려지고 있다.

 

탄강구리비 뒷편에 위치한 별당은 명성황후가 1851년 음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가 8세가 되던 해에 부친인 어성부원군 민치록이 영천군수를 끝으로 감고당에서 세상을 하직했으니 명성황후는 그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명성황후 생가지 명성황후 추모를 하는 날 어린 아이들이 생가지를 찾았다. 명성황후의 아픔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1895년인 고종 32년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함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에서 살해가 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개혁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과 맞섰던 명성황후는 그렇게 비극적인 생을 마쳤던 것이다. 곧이어 세워진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가 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되었다.

 

  
▲ 황손 이석씨 추모제날 명성황후 생가지를 찾은 마지막 황손 이석씨. 추모제에 참가한 분들과 함께 촬영을 하고..

명성황후의 추모제를 마치고 생가 곁에 마련된 민가마을에서 간단한 점식식사로 국수를 마련하였다. 이 자리에는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본명 이해석)가 참여를 했다. 올해 69세로 전주 승광재에 기거하고 있는 이석씨가 외가를 찾은 것이다. 곱게 두루마기를 입은 황손 이석씨는 그동안 수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 황손이라는 이석씨는 고종황제가 할아버지가 되신다. 그리고 아버지가 의친왕이다. 결국 명성황후는 황손 이석씨의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명성황후 생가 안채 마루에 걸터앉아 상념에 잠긴 황손 이석씨. 영국이나 일본 같으면 당연히 궁에서 살아야겠지만 마땅히 터전을 잡지 못하고 방랑을 하기도 했다. 생계를 위해 가수를 비롯해 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다가 2003년 8월부터 태조 이성계를 모신 경기전 근처에 터전을 마련하였다. 현 김완주 전라북도도지사가 전주시장을 지낼 때 배려를 한 것이다. 


"당연히 궁에서 살아야하지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나라에서 일본 천황을 초청한다는 이야기에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질 않습니다. 할머니를 시해하고, 대한제국을 망하게 한 장본인인 그들이 모든 것을 깊이 사과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나라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습니다" 조금은 격해진 마음이다. "그들이 얼마나 잔인했으면 아버님께서는 항상 칼을 머리맡에 두고 사셨답니다. 심지어는 독약을 받을 것에 대비를 해 비상을 조금씩 마셨다고도 합니다." 처음으로 밝히는 이야기라면서 말을 하는 황손 이석씨의 웃는 얼굴에 잠시 노기가 스민다. "그저 제가 태어난 곳에서 여생을 마칠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입니다"

 

1941년 음력 8월 3일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시절을 사동궁에서 보냈다. 궁에서 나온 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1979년까지는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의 안배로 서울 궁정동 청와대 옆 칠궁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5공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여기서도 쫓겨나다시피 했죠". 그 때가 힘겨운 듯 잠시 숨을 고른다. "그 이후로 1년이면 12번도 더 이사를 다녔고, 중앙시장과 동대문시장에서 국수장사, 자장면 장사 등을 하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 갈곳이 있다면서 쓸쓸히 명성황후 생가를 뒤로하고 떠나는 황손 이석씨. 왜 그 뒷모습에 분노가 보였을까?   

 

  
▲ 마지막 황손 이석씨와의 대화 명성황후 추모제장을 찾은 마지막 황손 이석씨. 할머니댁인 외가를 찾은 황손 이석씨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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