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나 누각이라고 해서 꼭 경치 좋은 계곡이나 바닷가, 혹은 강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절마다 누각을 지어 그곳에서 강론을 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알려주는 장소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전국의 사찰에는 이러한 누각이 상당히 많이 보존이 되어 있다.

내가 그 중에서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암산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 경내에 있는 쌍계루를 좋아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쌍계루는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에 ‘교루(橋樓)’라고 하여 최초로 지어졌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당시에는 다리 위에 지어졌던 것으로 추정한다.


물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누각

지금도 쌍계루 앞에는 물이 고인 곳이 있고, 그 물은 계곡에서 흘러드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뒤 고려 공민왕 19년인 1370년 폭으로 인해서 교루가 부서졌다.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에는 파손된 교루를 청수스님이 중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도전이 ‘백암산정토사교루기’를 지었다.


백양사 들어가는 길. 절을 찾아 가는 길부터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려 우왕 7년인 1381년에는 목은 이색이 교루의 이름을 쌍계루라 하고 ‘백암산정토사쌍계루기’를 지었다. 1980년에는 쌍계루가 복원이 되었는데, 그 후 몇 차례 중수를 하였다.



백암산을 뒤로 한 쌍계루와 쌍계루 현판

지금 시를 써 달라 청하는 백암사 스님을 만나니
붓을 잡고 생각에 잠겨도 능히 읊지 못해 재주 없음이 부끄럽구나.
청수스님이 누각을 세우니 이름이 더욱 중후하고
목은선생이 기문을 지으니 그 가치가 도리어 빛나도다.
노을빛 아득하니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흘러 돌아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서 시달렸는데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보리.

포은 정몽주가 당시 이곳에 머물면서 청수스님의 권유로 지은 시이다. 여기서 백암사는 지금의 백양사를 말하는 것이며, ‘옷을 떨친다’는 말은 관복을 벗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정몽주는 결국 이 시를 남겨놓고 선죽교에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났으니, 그 혼이라도 이곳에 들렸을 것만 같다.


최근 새로 보수를 한 쌍계루. 전체적인 보수를 마쳐 옛 모습을 되찾았다.

쌍계루 전각에 올라 보다.

쌍계루, 말 그대로 두 개의 물줄기가 있는 곳에 서 있는 누각이라는 소리일 것이다. 아마 백암산에서 흘러드는 물줄기가 이 쌍계루를 휘감아 도는 것은 아니었을까? 처음 교루라 이름을 붙인 것도, 후일 이색이 쌍계루라 이름을 붙인 것도 물과 연관이 지어지는 이름이다. 지금도 쌍계루 앞에는 고여 있는 물속에서 물고기들이 한가롭게 유영을 즐기고 있다.



쌍계루 위 누각에는 포은 정몽주의 시를 비롯해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이층 누각을 오르면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그 중 정몽주의 시판에 눈에 띤다. 아직도 이곳을 그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주변을 돌아보는데, 낯선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난간에 머문다. 혹시 포은 선생의 넋이 저리 새가되어 쌍계루를 찾은 것이나 아닌지. 오랜만에 찾은 쌍계루는 그렇게 말없이 지난 역사만을 알려주고 있다.

난간에 앉아 쉬는 작은 새 한 마리. 포은 선생의 방문은 아니었을까? 

 

한 겨울 답사는 힘이 든다. 발목을 넘는 눈길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여기저기 멍이 들기 때문이다. 용인에서 민속촌으로 가는 길, 기흥구 지곡동 615번지에 소재한 사은정. 지난 해 겨울 눈이 쌓였던 사은정의 모습. 당시 사은정의 앞에는 여기저기 고라니가 눈을 끌며 지나간 자국만 남아있었다. 눈이 쌓인 곳을 새롭게 밟고 지나가는 기분도 꽤 좋다. 발밑에서 빠삭거리며 밟히는 눈의 감촉도 한 겨울에 느끼는 재미다.

 

사진을 찍으려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미끄러졌는데, 하필 그 밑에 날선 돌이 박혀있다니. 눈물이 난 것만 같은 통증이다.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할 일은 다했으니, 참 '문화재가 밥 먹여주냐'는 질문이 딱 맞는 듯하다.

 


 

경(耕) 신(薪) 조(釣) 채(菜)의 즐거움을 위한 정자

 

사은정은 네 가지 즐거움을 뜻한다. 즉 밭을 갈고, 나무를 하고, 낚시질을 하며, 나물을 캔다는 뜻이다. 이 네 가지 즐거움이야말로 노년의 인생을 더욱 윤택하게 할 수가 있다. 사은정은 이 네 가지 즐거움을 함께 즐기기 위해서 세워진 정자이다. 그리고 네 분의 선조들을 위하여, 후손들이 몇 번을 중수하면서 그 뜻을 기린 정자이기도 하다.

 

처음 사은정이 지어진 것은 1500년대 초일 것으로 보인다. 이 정자를 처음 지은 이유는, 조선조 중종 때의 명현이자, 성리학의 대가인 동방사현 중 일인인 정암 조광조(1482 ~ 1519), 중종 때의 유학자인 방은 조광보, 회곡 조광좌,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기묘사화 때 연루되어 화를 당한 임애 이자(1480 ~ 1533) 등이, 도의로 친우를 맺고 노년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정조 20년인 1796년에 정암과 음애. 회곡 선생의 후손들이 중건을 하면서, 서재를 짓고 방을 드렸으며 단청도 다시 하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처음에 사은정을 건립하였을 때는 단순한 정자만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고종 13년인 1876년에 정자가 퇴락하여 후손들이 중창하였으며, 1925년과 1988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사은정의 현판. 사은정은 1,500년대 초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은정 대청 안편에 걸린 중수기

 

설경(雪景)이 아름다운 사은정

 

용인 정신병원에서 신갈 오거리 길을 비켜서, 민속촌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 지곡동이 된다. 이 길로 가다가 민속촌이 나타나기 전 우측에 주유소가 있고, 그 옆길로 들어가면 사은정이 있다. 사은정은 민속촌의 옆 야산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소나무와 바위들이 흰 눈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전국의 정자들은 사계절 언제 찾아가든지,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다. 사은정 역시 겨울 경치도 아름답다.

 

사은정의 앞으로는 지곡리의 들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낮은 야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 아늑하다. 뒤 야산에서 나무를 하고, 들판으로 나가 나물을 캤을 것이다. 그리고 앞의 너른 곳에 밭을 갈아 먹거리를 장만하고, 멀지 않은 내로 나가 낚시를 하면서 하루해를 즐겼을 것이다. 사은정은 그런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 네 분의 선조들이 마련한 정자이다.

 

눈에 덮힌 사은정. 눈이 채 녹지 않은 소나무와 기암들이 함께 해 더욱 아름답다

 
계자각 난간을 두른 우측 한편에 한 칸의 방을 드렸다. 이 방은 후손들이 중건을 하면서 새롭게 드렸다.

방을 뒤로 놓고, 앞으로 툇간을 내어 마루를 놓았다.

 

계자각 난간을 두른 사은정

 

겨울에 보는 사은정은 아름답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사은정은 중앙에 계단을 놓았다. 중앙의 계단은 장대석으로 하였으며, 계단 양 옆이 돌출이 되게 하여 멋을 냈다. 마름모꼴의 잘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전면과 측면은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우측으로는 한 칸 방을 드려 겨울철에도 묵을 수 있게 하였으며, 방과 대청을 나란히 놓고, 좌우에 개방된 툇간을 놓았다. 툇간은 본 건물보다 돌출이 되게 구성해 여유를 보인다.

 

정자 대청 위 벽에는 중수기와 중건기가 걸려있다. 정자를 한 바퀴 돌아본다. 대청의 뒤로 낸 판자문이 투박하다. 그렇게 투박하게 낸 판자문이 오히려 우직한 충정을 엿보게 한다. 방 뒤에 높게 솟은 굴뚝이,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높은 하늘을 따라 오르는 듯 하다. 뒷산을 올려다본다.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은 소나무와, 여기저기 솟은 바위들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만 같다. 이곳에서 서로 의지를 하고 노년을 보냈을 선조들이, 오히려 부럽기만 하다. 지금 우리네들이야 어찌 이런 여유를 느낄 수가 있을까?

 

툇간을 놓고 계자각 난간을 둘러 멋을 냈다.

대청의 뒤편에 낸 판자문. 뒤켠으로 돌아 본 판자문이 투박하다. 오히려 우직함이 있어 좋다.

 

돌에 부딪쳐 얼얼한 엉덩이를 부비며, 눈길을 밟다가 연신 뒤를 돌아본다. 언제 다시 이렇게 아름다운 설경을 볼 수가 있을까? 쌓인 눈이 고맙기만 하다. 봄이 되면 주변에 많은 봄나물들이 돋아 나오려나? 괜한 걱정까지 해가며, 사은정을 멀리한다. (지난 해 겨울 눈이 엄청 쌓인 사은정 모습입니다)

은행나무는 천년을 사는 나무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 묵은 은행나무는 용문사 은행나무로, 그 수령이 1,000~1,500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나무에 큰 뜻이 새겨진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바로 청주시 중앙공원 안에 있는 수령이 1,000년 가까이 된 은행나무인 ‘압각수(鴨脚樹)'이다.

압각수란 청주 중앙공원 안에 있는 은행나무 이름인데, 잎의 모양이 오리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과, 이 나무의 뿌리가 물오리 발처럼 사이가 붙어 있어 생겼다는 설이 있다. 이 나무가 왜 유명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곳 압각수가 서 있는 장소가 청주목의 객사 문 앞이었다. 그런데 고려 공양왕 2년인 1390년 5월에, 이색, 권근 등 10여명이 이성계의 반대파로 지목되어 청주옥에 갇히게 되었다.


죄 없는 충신들을 살려낸 압각수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 2년인 1390년에 이초와 윤이가 ‘이초의 난’을 일으켰다. 이초의 난이란 고려 말엽 정선 사람인 이초가 고려말엽 공양왕 때 정5품의 무관직인 중랑장 벼슬을 하였는데, 윤이와 함께 명나라에 있을 때 명나라 황제에게 호소하여 명나라의 힘을 빌려 시중 이성계를 없애기 위하여 모의를 하고 하였다.

그들은 명나라 태조에게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한다고 거짓으로 고하였다. 또한 이를 반대한 이색 등을 살해하고, 우현보 등은 유배하였다고 거짓으로 알렸다. 그때 사신으로 명나라에 머물던 동지 밀직사 조반이 귀국하여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공양왕 2년인 1370년에 이들을 잡아들였다.



천년 세월을 버텨 온 압각수의 밑동
 
그리고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 인재 이종학, 우현보 등 충신 10여명을 잡아들여, 청주 옥사에 하옥하는 청주옥사가 일어났다. 이 무렵 청주지방에는 갑자기 집중호우가 쏟아져, 청주성의 민가와 옥사가 침수되었다. 이색 등 옥에 갇혀 있던 충신들은 객사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인 압각수로 올라가 화를 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이색 등이 죄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이들을 방면하였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인 압각수는 수령이 천년 가까이 되었고, 높이는 30m에 밑동의 둘레가 8m에 이른다. 은행나무 앞에는 양촌 권근이 옥에서 풀려난 후 지었다는 시비가 서 있다.



권근의 시비와(위) 압각수의 줄기. 이 줄기에 충신들이 올라가 홍수를 피해 목숨을 건졌다.

근거 없는 소문으로 주 무왕의 아우 주공에게 불행이 미치니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 벼를 쓰러뜨렸네.
고려 공양왕이 청주에 큰물이 넘쳤다는 말을 듣고
하늘의 뜻이 예나 이제나 같음을 알았도다.

압각수. 천년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 이 나무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죄가 없는 사람은 하늘도 그들을 살려낸다는 깊은 뜻을 알려주는데, 이 말은 죄가 있는 사람은 곧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말과 같은 뜻은 아닐까? 죄 없는 백성들을 위해 일을 하지 않는 무리들은, 언젠가는 이런 벌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괜한 생각을 한 것조차 죄스러워, 나무 옆에서 얼굴을 붉힌다.


압각수의 주변에는 축대를 쌓아 보호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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