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넘어가는 길.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이 길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 길. 예수가 이 땅의 고통을 짊어지러 왔다는 12월 25일, 노송지대를 걸었다.

지난 23일에 내린 많은 눈으로 인해, 소나무가 있는 곳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럽다. 기온이 떨어진데다가 바람까지 분다. 손이 시려 사진을 찍기가 조금은 불편하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양편으로 자란 소나무들은 정조 당시에 심었다고 하니, 아마 수령이 200여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500주의 소나무를 심은 정조

경수간 국도를 따라 5km 정도에 조성되어 있는 노송지대. 기록으로는 이곳에 500주 이상의 소나무들이 살고 있어야 한다. 이산 정조(1776~1800)가 부친인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1,000량을 하사하여 이곳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나무들은 자라면서 솔씨를 퍼트려 새로운 종자를 키워내기 때문에, 200년이 지난 세월이라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고 38주 정도의 노송만이 보존되어 있다. 이 노송지대는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1973년 7월 10일에 지정이 되었다.



정조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노송 길 끝에 있다는 지지대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 47-2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인 지지대비는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추모하기 위해, 순조 7년인 1807년에 화성 어사 신현의 건의로 세워진 비이다. 정조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능을 참배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늘 이곳에서 거동을 멈추고 능침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 비의 이름이 ‘지지대비’이다. 지지대란 정조대왕이 이곳에 오르면 행차가 느릿느릿해진다고 하여, 느릴 ‘지(遲)’자 두 개를 붙여 썼다고 한다. 정조 이산의 그런 효심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노송지대일 것이란 생각이다.



노송이 길을 따라 울창한 이 길. 이 길에 얽힌 사연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슨 이유로 정조 이산은 자신이 부친의 능침을 돌아보는 길목에 소나무를 500주나 심었던 것일까? 아마도 소나무의 생명이 길다는 것을 감안한 것은 아니었을까? 즉 소나무처럼 생명이 강한 조선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정조대왕의 효심 길을 따라 걷다

소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자라기 힘든 메마른 곳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또한 사철 푸르른 잎을 지니기 때문에, 강인한 인상을 준다. 늘 변함없는 푸름 때문에 대나무와 함께 송죽지절(松竹之節 : 변하지 않는 절개)이라고 한다. 이렇게 소나무를 심어 놓은 이산 정조의 마음속에서는 변하지 않는 효심과 강인한 조선, 그리고 강한 왕조를 의식한 것은 아니었을까?


바람이 차다. 500그루나 되는 소나무들이 10분의 1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아마 제대로 관리가 되었다면, 이 일대는 정조의 효심을 가득담은 솔밭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양편으로 늘어선 소나무 사이를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는 차량들을 보며, 저 나무들도 언젠가는 매연으로 인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것은 이산 정조의 효심이 사라지는 것일 텐데 말이다.

(주) 요즈음 블로그 돌아가는 모습이 하도 한심해, 우측에 달았던 마크를 접었습니다. 같은 블로거들에게 상처주기를 일삼는 '자칭 파워블로거'라고 하는 사람들의 작태가 우스꽝스러워, 그런 것을 달고 있다는 것이 쪽을 까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는가는 글을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수일 내로.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걷다(8) - 서장대와 서노대

화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면 사방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다. 바로 ‘화성장대’라 불리는 ‘서장대’이다.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서장대 위에 올라가 사방을 굽어보면 사면팔방으로 모두 통하는 곳이다. 석성산의 봉화와 대항교의 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는 곳이다.


서장대, 한 때 어느 취객에 의해 웅장한 서장대가 불에 타기도 했다. 그러나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다시 옛 모습을 찾았다. 그 문지방 위에는 정조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인 [화성 장대(華城將臺)]로 편액을 붙였다.

정조 이산의 꿈은 무엇일까?

정조임금은 이 장대에 올라 장용위 군사들을 호령했다. 이산은 이곳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강력한 왕권을 갖고 북진을 하여, 옛 고토를 회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이 장대 위에서서 사면팔방을 바라보면서, 막힘없이 달려가는 병사들의 무한한 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장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곳에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사랑을 엮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깃든 이산의 꿈이 무엇인지를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 난 늘 이곳을 올 때마다 생각을 한다. 아마도 이곳에서 정조임금의 꿈을 이 나라의 청년들에게 알려줄 수만 있다면, 저마다 큰 꿈을 키워나갈 수가 있을 텐데. 늘 그것이 아쉽다는 생각이다.

장대에는 모두 네모난 벽돌을 깔고 바깥에는 둥근 기둥 12개를 세웠는데, 그 높이가 각각 7척이고 이것을 팔각형의 돌기둥으로 받치었고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척 5촌이다. 위층은 한 간인데 사면에 교창을 내고 판자를 깔아 바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아래층의 반자가 되었다. 그 서북쪽 모퉁이에 층사다리를 세워서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다연발 화살을 쏘아대는 노대

서장대의 뒤에는 ‘서노대’가 자리한다. 원래 노대는 <무비지(武備志)>에 설명하기를,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였다. 그 모양이 전붕과 같이 하고, 안에는 화살을 쏘는 노수가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노대의 설명을 보면 「현재의 노대는 그 제도를 본떠서 짓되 약간 달리 하였다. 집을 얹지 않고 대를 8면으로 하되 깎아지른 듯이 우뚝 서있게 지었다. 면마다 아래 너비 각 8척 5촌, 위의 줄어든 너비 각 각 6척 5촌, 높이 12척, 지대 위에 체벽으로 면을 만들고, 돌을 깎아 모서리를 만들었다. 위에는 장대를 얹고 凸 모양의 여장을 7면에 설치하였다.」




고 하였다. 장대 쪽으로는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으며, 상부를 둘러 총안을 낸 여장을 둘러놓았다. 대 위에는 네모난 전돌을 깔았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쇠뇌를 쏘았을 것이다. 쇠뇌란 다연발로 발사하는 화살을 말한다. 쇠로 된 발사 장치를 갖고 있는 이 쇠뇌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조임금 이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사방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서 군사들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는 정조는 더 강한 군사력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많은 군사들의 위용을 보고 있는 조정 대신들의 모습도 살펴보았을 것이다. 미처 이루지 못한 이산의 꿈을 지금 이 땅의 젊음에게 전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철모르는 사랑타령을 하고 있는 한 젊은 연인이 조금은 아쉬운 까닭이다.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6) - 서남암문과 용도

‘화성(華城)’,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알면 알수록 대단한 성이다. 어느 한 곳도 화성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성을 축조할 수 있었는지, 그저 혀를 내두를 판이다. 사람들은 중국의 만리장성을 칭찬하면서 ‘우리나라의 성은 성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난 그 사람들에게 한 마디로 이렇게 묻는다. “성을 제대로 알기는 하는가?”라고.

중국과 수도 없이 많은 국경에서의 전쟁을 한 고구려. 그 고구려에 왜 그 수십만의 수나라나 당나라 군사들이 형편없이 패하고 돌아갔을까? 그것은 바로 고구려의 성이 그만큼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축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화성은 그런 각 시대의 성곽에서 좋은 점만 모아서 축조가 된 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화성의 모습이다.


산으로 오르는 적군이 다시 놀라다

화성은 4대문으로 공격을 하거나, 성벽으로 공격을 하기에는 어렵다. 어디라도 비빌 언덕이 없기 때문이다. 성 주위를 맴돌던 적은 한 곳의 빈틈을 발견하게 된다. 성벽보다 더 높은 팔달산의 남쪽 능선이다. 그곳으로 오르면 성 안으로 총과 활을 쏘고 불을 날릴 수가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적은 팔달산의 남쪽 능선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성벽에 가까이 접근하면 여지없이 성안에서 날아오는 총탄과 화살에 맞아죽기가 일쑤다. 그래서 일부러 팔달문에서 멀리 떨어진 쪽을 향해 팔달산의 능선을 향해 오른다. 쉴 새 없이 적들은 능선을 향해 올랐다. 나무숲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오른 능선.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고함소리와 함께 수많은 총알과 화살이 날아온다.



서남암문의 위에 놓인 포사(위)와 용도에서 바라 본 암문, 그리고 암문으로 오르는 성벽과(붉은 선) 용도가 놓인 산등성이(노랑색 선)

고개를 숙이고 능선을 향해 치닫던 적들이 놀라 황급히 고개를 들어본다. 놀랍게도 그 능선을 따라 또 다른 성벽이 있다. 바로 서남암문에서 길을 따라 화양루까지 가는 '용도(甬道)'가 있었던 것이다. 용도란 말 그대로 길을 따라 양편으로 담을 쌓은 것을 말한다. 팔달산의 반을 갈라 쌓은 성 끝자락에는 이 용도가 있어, 남부 능선으로 올라오는 적을 막을 수 있도록 되어있다.

용도와 서남암문, 그리고 서남각루

팔달문에서 성벽을 따라 남부 능선으로 오르면 그 정상부에 서남암문이 있다. 이 서남암문 위에는 주변을 경계하는 ‘서남포사(西南舖舍)’가 자리한다. 한 칸으로 지어진 이 포사에서는 주변 경계는 물론, 성 밖의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적이 공격을 하면 깃발을 이용하거나, 포를 쏘아 신호를 했다. 이 포사는 항시 장병들이 기거를 하기 때문에, 온돌로 꾸미고 사면을 판문으로 막았다.



포사 아래 문이 바로 서남암문이다. 이곳은 안과 밖으로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성가퀴를 설치하였으며, 화성의 암문 중 유일하게 포사가 설치가 된 곳이다. 암문을 빠져나가면 능선을 따라 양편으로 성벽을 쌓고 여장을 올린 용도가 나타난다. 이 용도는 능선의 끝까지 나 있으며, 그 끝에는 ‘서남각루’인 화양루가 설치되어 있다.

준 지휘소인 각루

용도 끝에 자리한 각루는 준 지휘소이자, 군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서남각루가 서 있는 곳은 능선의 끝이자, 용도의 끝이 된다. 이곳에서 양편으로 돌출된 성벽은 양편 모두가 치의 역할을 하고 있어, 용도동치와 용도서치와 함께 적을 공격하기에 용이하게 축성이 되었다. 오죽하면 유네스코에서 18세기 동, 서양을 통 털어 가장 완벽한 군사시설이라고 화성을 극찬하였겠는가?



용도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서남각루. 서남각루는 화양루라고 부른다. 각루의 양편 끝에도 둘출이 되어 치와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서남각루는 한편은 바닥이 돌로 되어있고, 한편은 장초석을 놓고 기둥을 올려 마루를 놓았다. 언제나 이곳에서 군사들이 주변감시를 하면서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팔달산 남쪽 능선에 올라 성안을 공격하겠다고 죽자 사자 능선으로 오른 적군들. 그들은 능선에 버티고 있는 용도로 인해, 또 한 번의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에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수원성은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았으며,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한국의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수원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은 ‘팔달문’이요, 북문은 ‘장안문’이다. ‘팔달(八達)’이란 그야말로 팔방 어느 곳이나 다 통한다는 뜻이요, ‘장안(長安)’이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다. 이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서 있는 문으로 그 건축구조가 특이하다.


보물 제402호인 팔달문 앞은 ‘성시(成市)’

팔달문은 화성의 남문으로 그 이름은 팔달산에서 따왔다. 정조는 화성을 축조하기 이전부터 수도 없이 이곳의 지형을 살핀 것으로 보인다. 이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정하기 위해, 전국의 명당이라는 곳을 직접 다니면서 조사를 하기도 했다. 문의 양성산, 장단 백학산, 광릉 달마동, 용인 등, 능터로 좋다는 곳을 직접 조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한 정조가 직접 거론한 곳이 바로 수원이다. 그리고 이곳에 화성을 축조한 것이다. 아마도 정조가 화성을 축조하기 전에 미리 한 일은,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이 들어설 자리에 많은 사람들을 옮겨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팔달문 인근에는 ‘거북산당’이라는 당집이 있다. 이 당집은 화성을 축조할 즈음에 생겨난 것이라고 전한다. 아마도 남문 밖에 성시(시장)을 개설하고, 그곳에서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노역자들이 장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닐까 추정해 본다. 지금도 팔달문 인근에는 상권이 형성되어 있으며, 수원 상권의 중심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

들어갈 곳이 없는 성문, 아름다운 옹성

팔달문의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는 다포계 양식이며,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헌데 남문과 북문의 옹성을 보면 동문인 창룡문이나, 서문인 화서문과는 또 다른 형태이다.


 

2011년 8월 28일 현재,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보수 공사중이다. 팔달문의 자료는 2004년 8월 24일에 답사한 자료이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를 할 때 고증하여, 화성성역의궤의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어 아쉬움이 크다. 현재 보수 공사 중인 팔달문의 옛 모습을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으려는지, 하루 빨리 성벽의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옹성에 홍예문을 낸 팔달문과 장안문

남문과 북문의 윗부분의 중앙으로는 통행할 수 있도록 용도를 내었다. 옹성의 벽은 양 옆면에 총안과 현안을 둔 ‘철형여장(凸形女墻)’을 쌓았다. 옹성의 중앙에는 성문과 맞추어 홍예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5개의 원형구멍을 낸 오성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양 대문 모두 안쪽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한 칸인 누각을 세웠다.


양 대문의 형태는 같으며, 규모와 건축수법 등이 서울의 숭례문과 비슷하다. 화성의 성문은 당시 다른 성문의 장점만을 취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문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으로 손꼽힌다.

정조의 백성사랑의 근본인 장안문

정조는 왜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1794년 2월 28일, 화성유수부의 북쪽, 장안문을 축조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유경은 북문 성곽 터에 제단을 쌓고 고유제를 올렸다. 원래 장안문을 세울 자리는, 현재 장안문의 자리가 아니었다. 처음에 정약용이 계획한 화성의 길이는, 3,600보인 4.2km였기 때문이다.



1794년 1월 14일 화성의 공사현장으로 내려 온 정조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민가에 깃발이 꽂힌 것을 보았다. 정조가 그 이유를 채제공에게 물었더니,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백성들이 이주를 할 곳이라는 대답이다. 정조는 즉시 이곳으로 이주를 해온 백성들이 또 이주를 하는 불행을 겪지 않게 성벽을 구부렸다 폈다 반복해, 백성들의 민가를 다치지 않게 민가 밖으로 성을 쌓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벽의 길이가 길어졌다. 이곳을 보면 성이 몇 번 굴곡져 장안문과 북수문인 화홍문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이산 정조의 백성사랑은 이렇게 끔직했다. 이 장안문이 조선의 중심이 되게 해달라는 제문을 보더라도,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중심부에 두고 싶어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북으로 가는 길목인 장안문, 남으로 가는 길목인 팔달문. 그 두 문의 이름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장안문인 북문은 이곳을 기반으로 북으로 한 없이 뻗어나가는, 문물의 중심이 되고 싶은 뜻이 숨어있다는 생각이다. 팔달문 또한 이 땅 어디까지라도 뻗어나가겠다는 정조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아마도 대로인 이 두 곳의 문에서 이산 정조는 적을 섬멸하고, 더 큰 조선을 건설한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장안문의 용도에 서서 장안문의 현판을 바라다보며,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참 백성을 위할 줄 모르는 이 시대에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산 정조를 왜 우리가 ‘정조대왕’이라고 하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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