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속촌의 남부지방 대가인 9호 집은, 한때 시청률 상승세를 이어가던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아마도 그런 사극에서 많이 보아왔단 집이기에, 이곳을 찾는 사람마다 이 집이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한창 인기가 좋은 성균관 스캔들은, 방송 내내 사람들의 시선을 고정시켰으니 말이다.

 

이 9호 집의 안채를 돌아보면, 참 ‘대가집이라고 하는 것이 별나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고택의 형태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예술을 좋아하는 고장에서 이건을 했으니, ‘그도 그럴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마음의 무식함에서 조금은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ㄷ자형의 구조물, 그러나 참 놀랍소

 

호남 대가집의 안채를 보면 참 놀랍다. 이 집의 주인의 미적 감각이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다. 아무리 좀 다른 대가집들의 집의 구조가 남다르다고 하지만, 이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에서 이건한 제9호집은, 그런 집들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그저 이 안채 하나만 갖고도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안채를 바라보고 좌우측에 돌출이 되어있는 ㄷ 자형의 집은 좌우 대칭이 다르다. 좌측이 조금 짧게 돌출이 되어, 전체적인 집의 분위기를 색다르게 했다. 좌측은 돌출된 부분에 마루를 앞에 두고, 작은 방을 드렸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상당이 넓은 부엌을 두고 있다. 이 집 부엌의 크기로 보아, 지역의 대가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안방을 중앙에 둔 안채

 

부엌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식솔이 많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부엌의 옆으로는 안방을 두고, 그 옆에 대청을 둔 특이한 형태로 꾸며졌다. 즉 안채의 뒤편 - 자 부분의 중앙에 안방을 두고, 동편으로는 대청을, 서편으로는 부엌을 두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앞뒤로 툇마루를 놓았다.

 

 

 

 

이 호남의 대가집 안채의 아름다움은 바로 동편의 돌출된 날개부분이다. 대청과 연결이 된 이 부분에는 두 개의 작은 방을 드렸다. 툇마루로 안방서부터 ㄱ 자 형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이 날개부분 끝에는, 높임 누마루를 놓고 난간을 두른 정자를 하나 두었다. 정자와 같은 형태의 누마루를 깔아 멋을 더한 것이다.

 

방의 옆에는 반드시 마루를 깔고, 안채의 뒤편인 대청과 안방의 뒤에도 마루를 깔았다. 대개 집 뒤편은 소홀한 편인데 비해, 이 호남 대가집의 경우 뒤편이 오히려 더 아름답다. 창호 등을 섬세하게 꾸몄기 때문이다. 이런 집의 치목 하나를 보아도 예사집이 아니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안채를 바라보고 우측으로는 광채가 -자로 자리를 하고 있다. 4칸인 광체는 안채 쪽의 두 칸은 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개방된 핫간 한 칸과 그 끝에 한 칸의 광을 드렸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는 집이다. 대문채 역시 대문 양편에 방을 드려, 식솔들이 다양하게 사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많은 탤런트들이 향내를 풍기고 갔을 이 호남의 대가집. 참 이 정도 집이라면 지금 당장 이 곳에서 살라고 해도 반가울 듯하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도 만나기 쉽지 않은 민속촌 안의 제9호집. 두고두고 분내가 풍겨날 듯한 집이다.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정자야 다 경치 좋은 곳에 자릴하고 있으니 아름다울 수밖에. 그러나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들어, 정자의 아름다움을 적은 게판들이 정자 안에 빼곡히 걸려 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남다르다. 그만큼 정자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웠던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작 그 아름다웠던 주변 경치를 잃은 정자는 슬프다. 전라북도 임실군 운남면 입석리. 운암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 양요정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500년 세월을 뛰어넘은 정자

양요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조선 선조 25년인 1592년에 양요 최응숙이 지은 정자이다. 이곳으로 난을 피해 낙향을 한 최응숙은, 강물이 산을 휘감아 흐르다가 폭포를 이루는 곳에 양요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양요정이 자리하고 있는 곳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는지 정자 안에 걸린 게판들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정자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들. 양요는 정자를 지은 최응숙의 호로, 당시 이 양요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는 수많은 편액 안에 잘 남아 있다.



원래 양요정의 원 위치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동쪽으로 강가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섬진강 댐의 공사로 인해 양요정이 물속에 잠기게 되자, 1965년 이곳으로 이전을 하였다. 양요정은 지금도 주변 경치가 절경이다. 옮기기 전의 양요정은 산을 감돌아 흐르는 강과, 산 밑으로 낙수치는 폭포가 있었다고 한다. 강과 산, 그리고 폭포와 정자. 한 마디로 그런 모습을 상상만 해도 대단한 절경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절경 잃은 정자, 이름이 슬프다

그러나 지금 양요정은 운암호를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산을 휘감아 도는 강도, 산 밑으로 낙하를 하는 폭포도 사라졌다. 그런 인위적인 공사로 인해 멋진 절경을 잃어버리고만 양요정. 왠지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양요정은 여느 정자와는 다르다. 정자 가운데에 방을 두었다. 이런 형태의 정자는 남쪽 자방에서 많이 보이는 방들임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곧,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절경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정자는 처음 그대로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정자 가운데 들인 방의 벽면에는 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홀로 먼 산을 바라보는 노인, 친구들과 바둑을 즐기는 모습. 그리고 가마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행렬. 아마 양요 최응숙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난을 피해 이곳으로 낙향을 했지만, 늘 임금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상은 변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양요정에 올라 운암호를 내려다보면서 문득 걱정이 된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또 어떤 절경을 이렇게 슬프게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전국의 수많은 정자들. 아름다운 절경과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정자 들이, 이 양요정처럼 또 다른 슬픔을 만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민속촌 양반가 안초당과 사당

수원 남창동에서 민속촌으로 이건 복원을 한 99칸 양반집. 중부지방 양반집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이 집은, 한 마디로 입이 벌어진다고 밖에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 2월 18일 찾아갔던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가장 오랜 시간동안 둘러본 집이다. 이 집의 답사기 중 다섯 번째로 안초당과 사당을 소개한다.

99칸,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인 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 99칸이라고 소개를 하는 전북 정읍의 김동수 가옥 등을 둘러보았으나, 이 남창동 양반가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이 남창동 가옥은, 앞으로도 이 만한 집을 만나기가 힘이 들 것이란 생각이다.


 



시집을 가기위한 수업을 하는 안초당

‘안초당’이라는 이름은 양반가의 안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지붕을 초가로 엮어 안초당이라고 부른다. 안초당은 내당을 바라보고 좌측에 낸 작은 문을 들어서면 초가로 된 집이다. 안초당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된 작은 건물이다. 안초당을 바라보고 좌측 한 칸은 방이고, 남은 두 칸은 마루방이다.

그러나 이 한 칸은 앞뒤로 구분을 하여 두 개의 방을 드리고, 남은 두 칸을 마루를 깔았다. 이 안초당은 시집을 가기 전의 집안의 딸들이 거처를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서예, 자수 등을 배우면서 시집갈 준비를 하는 곳이다.



모든 집들이 와가인데 비해, 왜 안초당을 초가로 꾸몄을까? 안초당 뒤편에는 연못을 마련하고, 마당은 비교적 너르게 배치를 하였다. 집은 겨우 세 칸 밖에는 안 되지만, 한 마디로 시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꾸민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고래 등 같은 집에서 겨우 세 칸의 초가로 엮은 안초당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 것만 같다.


집의 맨 위에 자리한 사당

사당은 어느 집이나 규격이 비슷하다. 대개는 정면 세 칸에 측면 한 칸으로 마련한다. 이 사당은 집의 크기와 관계없이 이런 구조로 나타난다. 양반집의 사당도 예외는 아니다. 99칸 양반집의 사당은 초당을 끼고 좌측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작은 협문을 들어서면 사당이 자리한다. 대개의 사당은 정침인 안방의 후원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당은 조상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하기에 집안에서 가장 조용하고 신령스러운 곳을 선택한다. 양반집의 사당은 바닥을 모두 마루방으로 처리를 하였으며, 앞으로 세 짝의 문을 달아냈다. 안에는 항상 제물을 차려놓아 이곳이 제를 지내는 사당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99칸 양반집을 돌아보고

모두 다섯 번에 걸쳐 양반집을 소개했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웬만큼 큰 집도 한 번에 끝냈는데, 이 남창동 99칸 집은 그런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선 줄행랑이나 회랑, 안초당, 내별당, 외별당 등, 딴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전각들의 명칭도 다양하다. 그만큼 이 집의 넓이나 전각들이 대단하다.



수원 팔달산 기슭에 있었다는 중부지방 양반가. 어찌되었거나 수원으로서는 대단한 문화재 하나를 잃은 셈이다. 이 양반가가 있었던 자리에 다시 재현을 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명물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양반가를 돌아 나오면서 못내 아쉬웠던 것은, 이 집이 팔달산을 배경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함이다.

북부지방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여러 가지 생활의 지혜가 주거문화에 반영되어 있다. 아무래도 남쪽보다는 한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인시 소재 한국민속촌의 7호 집은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읍 운학리에서 이건을 한 집이다. 한국민속촌의 집들은 대개 전국 각처에서 이건을 했거나, 해체해 옮겨온 후 복원을 한 집들이다.

7호 집은 민속촌 안으로 들어가 초가로 된 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대장간이 보인다. 그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집이 바로 7호 집이다. 이 집은 여러 채의 집을 특이한 형태로 배치를 하였는데 안채와 문간채, 사랑채, 광채 등이 합해져 ㅁ자 형태로 배치를 하였다. 이는 겨울에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비늘이엉을 엮은 낮은 집

4칸의 대문채는 가운데 출입문을 내고 양편에 광을 드렸다. 대문채에는 마구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대문채와 마주하고 있는 안채는 4칸이다. 그런데 이 집의 특징은 처마가 낮고 방이 좁다는 것이다. 또한 기둥과 기둥사이를 좁히고, 전 공간에 온돌을 설치해 실내 난방의 효율을 높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지붕은 비교적 낮게 만들고 이엉의 밑동을 아래로 내린다. 이는 거친 바람에도 지붕의 이엉이 뒤집히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조형한 이엉을 ‘비늘이엉’이라고 하며, 보온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지붕을 낮게 조성을 하거나, 방을 작게 만드는 것은 모두 겨울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함이다.



안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에 넓은 부엌을 두고, 연이어 방 3칸을 드렸다. 방을 이어 드리는 것도 모두 난방을 위함이다. 즉 마루방인 대청을 별도로 두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방 앞에도 우리의 전통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루를 놓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겨울에 눈보라가 치면 마루라고 해도 제 기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랑채와 별채도 특이해

이 7호 집의 건물을 놓은 형태는 특이하다. 많은 건물들을 이리저리 벌려놓았다. 문간채 끝에 - 자 형태로 늘어선 사랑채에는 안채 쪽으로 부엌을 두고, 방을 드린 후 마루를 한 칸 드렸다. 이 마루는 대문채에 가려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마루를 대문채에 가려 놓은 것도 눈보라와 함께 치는 찬 겨울바람을 막기 위함이다.




안채 동편으로는 비스듬히 놓은 별당채가 있다. 방은 세 칸을 달아냈지만, 그 방들이 낮고 좁게 조성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지역의 기후를 이겨내기 위한 방법이다. 이런 집들의 구조를 보면서, 추운지방에서 나름대로 그 기후를 이기내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를 배울 수가 있다. 대문채와 안채 사이에 두 칸으로 조성한 광채 역시, 맞바람을 피하기 위한 건물이다.

여러 채의 건물을 이한 형태로 펼쳐놓아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한 칸으로 된 측간과, 그 옆에 또 한 칸의 광채가 자리한다. 이렇게 특이한 형태로 집안의 여기저기에 벌려 놓은 건물들. 아마도 이런 곳에서도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가 있다. 측간을 사랑채의 담벼락에 가깝게 문을 달아냈다. 이는 용변을 볼 때 바람을 조금이라도 덜 받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화장실을 문이 없는 사랑채의 뒤편에 조성을 해, 냄새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집안의 구성 하나하나가 살아가는데 편리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갈 수조차 없는 평안도의 집이라는 것에도, 이 집은 눈길을 끈다. 이 7호 집은 민속촌에 있는 이북지역의 집 5채 중 한 채이다

용인시에 소재한 한국민속촌 안에는 현재 50채에 가까운 집들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이 많은 집들은 모두 전국에서 민속촌으로 이건을 한 집들이다. 그 중 99칸의 대가집이라는 고택은 경기도 수원시 신풍동에 있던 집을 옮긴 것이며, 이 집들은 전라도에서 10여 채, 경상도에서 5채, 충청도에서 9채, 제주도에서 1채, 경기도에서 4채, 그리고 이북에서 3채 등이 이건(移建)을 해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동안 고택 답사를 하면서 전국을 다녔지만, 정작 한 곳에 모여 있는 민속촌의 집들은 소개를 하지 못했다. 민속촌에 있는 많은 고택들은 매년 보수 등을 거치면서 조금은 변형이 되기도 했지만, 지역 나름의 전통적인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앞으로 50회 정도에 걸쳐 한국민속촌의 집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용인 한국민속촌 안에 있는 5호 집은 전남 장성군 장성읍 안평리에 있던 김국중씨 집을 이건한 것이다


대문채에 머슴방을 둔 5호 가옥

민속촌을 들어서 성황당을 우로하고 안으로 들어가면, 연자방아가 있다. 그 연자방아를 지나쳐 좌측으로 첫 번째 만나는 집이 바로 5호 가옥이다. 이 5호 가옥은 전남 장성군 장성읍 안평리 김국종씨의 초가였다. 남부지방 민가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이 집은 호남 지방 특유의 형식을 잘 갖추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은 안채와 대문채인 광채가 일( - )자형으로 나란히 배열이 되어있으며, 광채의 끝에는 다시 문을 달고 그 옆에 측간을 두고 있다. 이 집의 규모로 보아 호남지방의 중간정도의 농가인 것으로 보인다, 바깥채에는 광이 많으며, 그 끝에는 머슴의 방이 별도로 마련이 되어있다.



전체적으로 넓은 공간을 활용한 집

이 5호 집은 호남지방 농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집이다. 안채는 모두 다섯 칸으로 지어져 있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부터 방과 그 뒤편에 부엌을 마련하고, 이어서 방과 마루, 방으로 이어진다. 동편 끝에는 작은 방을 하나 더 들였으며, 양편을 모두 앞으로 내어 짓고 그 사이를 마루를 깔았다. 동편 끝방은 뒤편을 나누어 골방을 드린 것도 이집의 특징이다.

안채의 뒤편에도 중간에 마루를 놓아 쓰임새를 다양하게 하였으며, 전제적으로 공간활용이 잘 되어있는 집이다. 아마도 장성읍 안평리는 현재도 대부분 농사를 짓는 마을이란 점을 감안하면, 한국민속촌으로 이건을 한 김국종씨의 집도 그 농가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안채는 넓은 활용공간을 이용한 점이 눈에 띤다. 딥 뒤편에도 대청 뒤에 마루를 놓아 공간활용을 했다


이 집은 일반적인 농가보다는 광채가 큰 편이다. 다섯 칸으로 지어진 광채는, 현재 사람들이 출입을 하고 있는 대문도 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 칸의 광을 나란히 둔 것으로 보아 중농(中農) 정도의 살림살이를 한 것 같다. 광을 지나 마구간을 두고, 그 옆에 끝 방은 반을 더 내달아 부엌을 드렸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머슴방을 두고 있다.

주인의 배려가 돋보이는 집

안채와 광채 모두 동편으로는 마루를 놓았으며, 머슴방 쪽으로 난 대문이 원래의 대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에는 단순하게 측간 하나를 두고 있다. 이 집은 돌아보면 주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머슴방이다. 머슴방은 안채의 끝방과 마주하고 있는데, 이 끝방은 방문이 없이 머슴방쪽으로 창문만을 내고 있다. 머슴방을 사용하는 사람이, 주인과 맞닥트리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광채의 끝에는 머슴방을 두었으며, 모두 문을 달아 공간의 자유스러움을 조성했다 


또한 머슴방의 부엌에도 마루 쪽으로 문을 달아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동편으로는 마루를 놓아, 공간을 활용했다. 아마도 이 방이 머슴방이라는 용도로 사용을 하지 않았다면, 바깥사랑채로 오인을 할 정도이다. 그만큼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가 남다른 집주인의 심성을 엿볼 수가 있다.


집은 그냥 보면 아무것도 달라 보일 리가 없다. 다 그 집이 그 집 같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민속촌을 찾아와 이 집 저 집 돌아보는 사람들도, “다 거기서 거기네”라는 말을 한다. 초가집이 비슷한 모양새로 서 있으니,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집을 찬찬히 돌아보면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심성을 읽을 수가 있다. 그것이 바로 고택답사를 하는 재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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