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마루에 앉아 위로 올려 건 창문 아래로 보이는 경치가 절경이다. 수령 450년의 고목이 된 은행나무 너머로 북한산의 바위가 병풍처럼 드리워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파란 잔디 위에서 한가롭게 뛰노는 개 몇 마리가 평안함을 안겨준다.

 

주인이 타 주는 향이 좋은 차 한 잔이, 오히려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의정부시 정암동 19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3호인 서계 박세당 사랑채. 비록 사랑채 한 채만 남아있지만, 그 한 채 만으로도 옛 정취를 가늠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 사랑채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1629 ~ 1703)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곳이다.

 

서계 선생이 집필을 하던 곳

 

서계 선생은 인조 7년인 1629년에 이조 참판을 역임한 박정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1세인 현종 1년인 1660년에 증광문과에 장원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 겸 경연 시독관, 함경북도 병마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8년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라는 한창 조정에 나아가 일을 할 나이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穡經)」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思辯錄)」등이 있다.

 

 

 

현재의 서계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사랑채 앞에 서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계류를 따라 세워진 정자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 사랑채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멋을 겸비한 사랑채,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정기를 느낄 수 있어

 

서계선생의 사랑채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바로 이곳을 지나 금강산으로 여정을 잡았던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들려 차 한 잔에 피곤한 다리를 쉬어갔기 때문이다. 이곳은 금강산으로 가는 곳의 길목으로, 누마루에 걸터앉으면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절경이 장관이다.

 

 

 

사랑채는 모두 네 칸 반 정도의 팔작집이다. 집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반 칸은 광을 달아내고 두 칸 반을 방을 드렸다. 방 앞으로는 마루를 넓게 놓아 생활공간을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좌측의 한 칸은 층이 지게 누정을 조성하였다. 장초석으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올린 누정은 삼면으로 들창을 내어 멋스러움을 더했다.

 

아마도 서계선생은 그 누정에 올라 책을 쓰고, 사람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며 담소를 했을 것이다. 들창을 모두 열어젖히고 서계 선생의 후손인 집 주인이 타주는 차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아마 예전 선생이 이곳에 기거를 했을 때도 이렇게 나그네들과 차 한 잔으로 세월을 낚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뒤편에는 하석 박정의 영정이 있어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니 좁은 협시문에 ‘서계박선생진영각’이라 쓰여 있다. 담으로 돌아 주인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가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인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하석 박정의 초상화 두 점이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는 잘 보여주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영정은 외부인에게는 보여주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볼 기회가 거의 없다.

 

하지만 7월 17일 찾아간 이 고택에는 동행자 중 한 분이 문화재위원이면서 집 주인과 친분이 있어 영정 두 점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박정은 광해군 1년인 1619년에 문과시험에 합격을 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남원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영진각에 모셔져 있는 두 점의 초상화 중 한 점은 낮은 사모를 쓰고 푸른색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영정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에 걸린 이 그림은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왼쪽 얼굴을 그렸다. 다른 하나의 영정인 우측의 영정은 서계의 초상화이다. 숙종 연간이 169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창주 조세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세걸은 숙종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를 한 인물로, 서계에게 팔선도를 증정하기도 했다. 서계와는 교류가 깊어 석천동을 자주 방문하기도 했다. 이 초상화를 주선한 사람은 서계의 아들인 박태보로 알려져 있다. 

 

 

지난 해 불이 나 많은 자료가 전소되어

 

사랑채와 두 점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진각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기둥과 벽 등에 불탄 흔적이 보인다. 지난 해 12월에 누전으로 인한 불이 났다는 것이다. 소화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작동이 되지 않아 사랑채 옆에 있던 서가와 진영각 뒤편의 창고가 전소가 되어버렸단다. 아직도 그 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볼썽사납다.

 

그 무엇보다도 서가에 보관하고 있던 300여권의 고서가 불에 전소가 되었다고 한다. 주인은 그 책들이 다 타버린 것으로 인해 많은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다. 금강산으로 향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쉬어가던 곳. 서계 박세당의 사랑채. 오늘 그 곳에 앉아 옛 선인들의 마음을 함께 느껴본다. 아마도 북한산의 기운이 이 집으로 응집이 되어, 이곳에서 새로운 기운을 얻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 불이 천상을 움직이는 것이죠"

 

“‘세발낙지’라는 말을 들어보았지만, ‘세발심지’라는 처음 듣는데요.”

 

우스갯소리로 사무실 사람들에게 세발심지가 무엇인지 아는가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다. 하기야 일반인들이 세발심지를 알 턱이 없지 않은가? 굿판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4월 11일 의정부에 자리한 한 굿당. 내림굿을 준비하고 있는 자리에서 한 남자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다.

 

이 날 내림굿은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에 거주하는 정아무개(남, 42세)가 신내림을 하는 자리였다. 정아무개는 이미 신병이 깊어져, 사람들에게 아는 소리를 할 정도로 깊은 무병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이 내림굿판에 음악을 맡아 자리에 동석한 박노갑은, 흔히 ‘어정’이라고 하는 굿판에서 피리와 호적을 담당하는 악사이다.

 

세발심지는 인간의 정성을 하늘로 올리는 것

 

한지를 가늘게 꼬아 세발심지를 만들고 있는 박노갑(남, 49세. 수원시 연무동 거주) 흔히 굿판에서는 이 세발심지와 불사전, 그리고 제석고깔을 한지로 만든다. 그런 것들을 한지로 만들고 있는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하다.

 

 

 

“수양아버지(수원시 팔달구 지동 거주 고성주)께서 굿판에 다니는 악사가 되려면 이런 것들부터 굿판의 내력을 다 알아야한다고 늘 말씀을 하셨죠. 가위 하나로 다 만들 수 있는 굿판의 이런 기물들이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이런 하나하나가 모두 신령님들을 위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면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이죠.”

 

굿판에서 세발심지는 모두 16개를 사용한다. 안당제석상에 1개, 본향상에 3개, 그리고 천궁맞이상에 12개를 놓는다. 본향상에 3개를 놓는 이유는 부모님의 본향과 자신의 본향을 상징한다. 그리고 천궁맞이상에 12개는 굿에서 흔히 나타나는 12신령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지로 만드는 사소한 것 같은 세발심지가 갖는 의미는 상당하죠. 아마 그냥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만드는 방법만 알았다고 하면, 마음속에 정성을 없을 것입니다. 수양아버지께서 그런 의미 하나하나를 알려주셨기 때문에, 이 작은 세발심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죠.”

 

 

 

박노갑의 이야기로는 이렇게 세발심지에 불을 붙여, 그 불이 하늘로 열기를 전해 신령들이 감응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작은 한지로 만든 이 세발심지가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려준다.

 

3이라는 숫자는 우리민족의 숫자

 

왜 굿판에서 세발심지를 사용할까? 세발심지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굿판에서 사용하는 세발심지를 만들어 온 경기안택굿보존회 고성주회장의 말이다.

 

“세발심지라는 것은 그 의미가 상당히 깊습니다. 두발도 서고, 네발로 만들어도 섭니다. 그러나 세발심지는 우리의 전통적인 3이라는 숫자와 연관이 있습니다. 삼족오, 삼정승, 삼불제석 등 3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는 화합입니다. 예전에 화로를 보아도 다리가 셋이 달려있습니다. 삼족형 화로는 그 다리가 하나만 없어져도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 개의 다리가 하나의 목적, 즉 서 있어야 하는 목적을 갖는 것이죠. 세발심지는 바로 그런 3이라는 숫자의 결정판입니다.”

 

결국 굿판에서 사용하는 세발심지의 의미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통로라는 것이다. 또한 이 세발심지를 태움으로써 굿판에 모든 잡귀를 물리치기도 한다는 것.

 

“세발심지를 만들어 굿을 하다가 보면, 무엇인가 불을 타는 것만 보아도 이루어질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재주를 배웠다는 것이 행복하죠. 남들은 이런 사소한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전통 하나를 익혀 지켜간다는 것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것이죠.”

 

세발심지를 만드는 남자 박노갑. 스스로 세발심지를 만들면서 자신의 마음을 그 심지에 태워 신령에게 올린다고. 그것이 자신이 세발심지를 만들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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