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에 소재하는 팔성리 고가는, 겹집으로 꾸며진 특이한 집이다. 넓은 마당 뒤로 낮은 산을 두고 있는 이 집은, 원래 사랑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만 남아있다. 마당의 넓이나 산 쪽으로도 여기저기 석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는 꽤 규모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안방과 윗방 등의 뒤로 툇마루를 놓고, 그곳을 다시 담벼락을 놓아 겹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방마다 이런 형태로 되어 있어, 집안으로 들어가면 흡사 미로 찾기라도 하는 듯하다.

 

 

안채는 자 형으로 되어있다. 집은 전체적으로 우측 끝부터 부엌과 안방, 윗방으로 놓고 윗방에서 꺾어 대청을 들였다. 대청 건너에는 건넌방을 들였는데, 건넌방의 앞에는 툇마루를 높이 놓고 그 밑에 아궁이를 들였다. 그런데 이 건넌방 밖으로 또 방이 있다. 이것이 팔성리 고가의 특징이다.

 

건넌방 밖으로 겹으로 꾸민 방은 뒤로는 마루방으로 앞으로는 온돌을 놓았다. 밖에서 보면 한 칸 한 칸이 층이 지게 보인다. 이 앞쪽의 방은 좁은 툇마루를 꺾어 놓았다. 건넌방의 대청과 접한 문은 위로 올려 걸어놓을 수 있도록 해, 이 방을 누정과 같은 모양의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겹집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팔성리 고가의 안채는, 전체적으로 방이 모두 이중으로 꾸며져 있어, 문이 여기저기 수도 없이 많다. 이것도 이 고가의 또 다른 특징이다.

 

 

튓마루 밖을 담벼락으로 둘러

 

현재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팔성리 고가는, 1930년대에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이 집 가까운 곳에 '지천서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집과는 불과 200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서원과의 관계도 생각해 볼만한 집이다. 현재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팔성리 고가는, 집을 돌아보니 안채의 뒤편으로 어느 집에서나 보이는 툇마루가 보이지 않는다.

 

툇마루를 놓고 그 마루를 모두 담벼락으로 둘러놓아 툇마루가 담 안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안방과 윗방을 이렇게 툇마루를 놓고, 다시 그 밖을 담으로 쌓은 집은 많은 고가를 돌아보면서 처음 만난 듯하다. 이렇게 겹집으로 꾸미다가 보니, 건물의 안으로 들어가면 필요 이상으로 문이 많이 있어, 어느 문을 열어야할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한 칸으로 구성된 윗방의 뒤편은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그 뒤의 공간은 사당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부엌 배치가 특이해

 

팔성리 고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부엌의 배치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1930년대에 지어졌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집을 지은 사람은 많은 고택의 장점만을 모아놓은 듯하다. 안채 하나만 갖고도 그 모든 기능을 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엌에도 많은 문이 있는 것이 딴 고가들과는 다르다. 부엌문을 열고 들어가면 뒷문 쪽으로 반 칸의 찬 방을 들였다. 그리고 찬방문의 마주하는 곳에는 계단을 놓고 그 안으로 마루방으로 만든 광이 있다. 마루광과 찬광 사이에 부엌의 뒷문이 있다. 찬광 위로는 모서리 양편에 위쪽으로 네 짝으로 된 문을 달고, 마루광 역시 밖으로 문을 내었다. 조금은 비좁은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답답하지 않은 것은 이 많은 문 때문으로 보인다.

 

 

두 칸으로 낸 부엌은 아궁이 위로는 안방에서 출입을 하는 다락이고, 그 밑에 까치구멍이 있다. 까치구멍 위 다락에도 찬방과 같은 네 짝의 문을 달았다. 그리고 부엌을 들어서면 부엌문 위와, 우측 벽 위에도 까치구멍을 내었다. 뒤편으로도 역시 까치구멍을 내어, 부엌 안이 밝고 시원하게 꾸몄다. 전체적으로 보면 겹집으로 구성이 되어, 수많은 문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기능에 맞게 꾸며놓은 것이, 팔성리 고가를 둘러보는 재미이다.

김세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종 4년인 1473년에 태어나, 중종 28년인 1533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공석, 호는 십청헌(十淸軒), 지비옹이라 했다. 벼슬을 그만 둔 김세필은 이곳 말머리에 입향하여 공자당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한 것이 시초가 되어 지천서원이 창건되었다고 한다.

 

서원은 비탈에 세웠는데, 아마 이 공자당은 십청헌이 정자로 삼아 후학들을 양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서원과는 앉은 자리부터가 다르다. 돌계단 위에는 노송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고, 좌측으로는 솟을대문이 서 있는데 앞에는 경모문(景慕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안으로는 1936년에 건립한 사우가 자리한다.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팔성리 고가를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지천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이 향교나 서원의 대문 앞에 자리하는데 비해, 이 지천서원은 홍살문을 지나 사우까지 꽤 떨어져 있다. 홍살문 좌측으로는 비들이 줄지어 서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서원 앞에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심청헌 김세필이 세운 공자당

  

우측으로는 작은 일각문이 서 있고, 그 뒤편에 공자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공자당은 그 형태가 '공(工 )'자와 같이 생겼다고 하나, 문이 잠겨 있어 안을 확인할 수가 없다. 공자당이 서원으로서의 기능을 갖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영조 10년인 1740년이라고 하니, 심청헌이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앞에서 보면 평범한 공자당

 

낮은 울타리 안에 자리한 공자당. 비탈진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정면 네 칸으로 꾸며진 공자당은 양편에 방을 놓고, 가운데 두 칸의 마루 대청이 있다. 대청의 뒷벽에는 중수기 등이 걸려있는데, 멀어서 확인을 할 수가 없다. 공자당의 우측 벽 밑으로는 한데 아궁이가 나 있어 이곳에서 불을 때고 겨울에도 이용을 한 듯하다. 아궁이 위 벽이 시커멓게 그을린 것으로 보아, 요즈음에도 불을 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천서원은 정조 24년인 1800년에 중건하였으며, 대원군 때인 1868년에 내린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기도 했다. 그 후 1893년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오다, 1898년 공자당을 중건했다.


8현을 모신 사우

 

지천서원의 사우에는 십청헌 김세필을 비롯해 모두 8분을 모시고 있다. 동문선에 시문이 실린 고려 말기의 문신인 상촌 김자수는, 고려 말기에 안동에 은거하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마다하고 자결을 하였다. 충민공 김저는 중종 7년인 1512에 태어나, 명종 2년인 1547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저는 흉년이 들자 암행어사로 경상도에 파견이 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큰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시문에 능한 눌재 박상. 『눌재집』을 남긴 박상은 이행과 함께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이 외에도 남곡 김의, 추곡 김정현, 학주 김흥욱, 성남 김종현 등을 제향하고 있다. 좁은 터에 자리를 한 때문인지 공자당과 담으로 구분을 한 사우. 일반 서원과는 달리 단 두 채뿐인 전각이 자리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늙은 소나무에서 잎들이 떨어진다. 몇 곳을 돌아다니느라 발도 손도 꽁꽁 얼었지만, 이렇게 운치있는 서원 하나를 만나면 그런 추위도 잊고 만다. 사람들은 그렇게 날 추울 때 다니는 것을 보고, '날이나 풀리면 다니라'고 하지만, 틈만 나면 다녀와야 직성이 풀린다. 아마 역마살이 끼어도 단단히 끼었나보다. 작은 서원 하나를 주변을 맴돌며 떠나지 못함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서운함 때문이다.

우리의 옛 탑 중에서 벽돌로 쌓은 탑을 ‘전탑’이라고 부른다. 이와는 달리 모전탑이란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쌓은 탑을 말한다. 대표적인 모전석탑은 분황사지 9층 석탑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음성군 읍성읍 읍내리 설성공원 경내에 있는, 향토자료전시관 앞에는 오층 모전석탑이 서 있다. 균형 있는 형태로 서 있는 모전석탑,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무엇인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부서진 채로 발견된 모전석탑

 

음성 오층 모전석탑은 본래 음성향교 앞 옛 절터에 무너진 상태로 있었던 것을, 1956년 수봉초등학교 이철세 교장이 학교 안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그 후 1995년 향토 민속자료전시관 앞으로 이전하여 현재의 모습대로 조성한 것이다.

 

이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가 있는데, 현재 2층과 5층의 탑신석이 사라졌다. 그리고 상륜부는 모두 사라져 조금은 정형화되지 않은 상태로 서 있다. 탑의 지대석은 4각 2매로 되어 있으나 한편이 훼손되어 있다. 기단은 단층으로 조성이 되어 있으며, 일석의 돌에 각 면에 양우주가 돌출이 되어있다. 갑석에는 부윤이 정연하며, 상면에 각형으로 1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1층 탑신 사면에는 감실을 음각해

 

1층 답신에는 각 면의 중앙에 장방형의 감실을 음각 하였다. 1층 탑신에는 직경 9cm, 깊이 10cm 의 사리공이 있다. 탑의 옥개석은 낙수면이 층단을 이루고 있어, 전탑의 형태를 모방하고 있다. 이러한 모전석탑을 조성하면서도, 벽돌로 쌓은 전탑모양의 형태로 꾸몄다는 것이 특이하다.

 

 

1

 

층 몸돌 위에 올린 옥개석은 2매의 돌로 조성했으며, 옥개받침이 3단으로 되어 있다. 2층 이상의 옥개석은 모두 한 장의 돌로 조성을 했으며, 2층과 3층의 옥개받침은 3단이다. 2층과 3층 낙수면의 층도 3단으로 되어있다. 4층 옥개석은 옥개받침과 낙수면 층은 2단이며, 5층 옥개석은 옥개받침만 2단이다. 이렇게 위로 올라 갈수록 폭이 좁아지면서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5층 옥개석의 중심에 찰구공이 있으며 그 위에 상륜부는 멸실되어 있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의 석탑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사라진 석재가 안타까워

 

우리나라에 모전석탑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더욱 전탑의 형태를 석탑으로 모방한 이 음성 5층 모전석탑의 경우에는, 그 형태도 안정감이 있게 조성이 되었다. 각 층의 옥개석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있어, 처음 조성을 했을 때는 그 어떤 탑보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 석탑이 언제 훼파가 되었는지, 또 어떤 이유로 이 모전석탑이 존재하던 절이 사라졌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이 모전석탑이 음성향교 앞 절터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일대에 고려시대까지 꽤 웅장한 사찰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아 모전석탑의 일부 부재가 사라진 것도, 그렇게 무너져 내려져 있었을 당시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석조물에 사용했던 부재들이, 어느 시기에 문화재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채취가 되고 심지어는 집안의 주추나 축대, 디딤돌 등으로도 사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205호인 중원고구려비의 경우에도 그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마을입구에서 발견 당시 이 비를 빨래터의 빨래판으로 사용을 하여, 사면에 새겨진 비면이 마모가 심해졌다고 한다. 이 음성 모전석탑도 이와 같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 석물의 일부가 훼손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낸다는 것은, 어느 특정인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깊이 느끼기를 바란다

아침부터 안개가 심하게 끼었다. 안개가 걷히면 답사를 가리라고 마음을 먹고 오전 내내 기다려 보았지만, 안개가 걷힐 것 같지가 않다. 오후 두시가 지나 충북 음성으로 향했다. 네 시가 다 되어서 도착한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공산정 마을. 마을 입구에서 게이트볼을 즐기고 계시는 어르신들께 고택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친절히 가르쳐 주신다.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니 초가지붕이 보인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43호인 음성 서정우 가옥이다.

 

대문채를 붙여지은 사랑채의 단아함

 

우선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참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집이다.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사랑채를 지었다. 사랑채는 뒤편에 대문채를 달았는데, 이러한 형태가 우리나라 가옥 구조상의 한 형태란다. 앞에 사랑채를 두고 뒤편으로 대문채를 붙여 내었다. 사랑채와 대문채가 ㄴ 자 형태로 자리를 잡고 안채가 뒤편에 ㄱ 자 형태로 자리해, 전체적으로 보면 ㅁ 자형의 가옥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채는 잘 다듬지 않은 돌을 이용해 이단으로 축대를 쌓은 후 그 위에 마름모꼴의 주추를 놓았다. 앞에는 마루를 놓고 뒤편으로 방을 드렸다. 사랑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에는 창고 방을 한 칸 드리고 방 두 칸에 이어서 큰 문을 단 사랑방을 만든 소박한 사랑채의 모습이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대문채를 이어지었다. 대문채는 방 한 칸을 사랑채에 달아내고, 대문과 두 칸의 곳간을 이어 단출한 모습이다. 전체적은 집안 구조가 중부지방 민초들의 삶이 배인 듯한 형태이다

 

돌과 기와를 이용한 아름다운 담벼락

 

서정우 가옥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사랑채와 안채 등의 담벼락이다. 일반적으로 집의 담벼락에 문양을 넣을 때는, 꽃이나 나무, 새, 동물 등을 새겨 넣는다. 그러나 서정우 가옥의 담은 돌과 기와를 이용해 문양을 만들었다. 돌은 네모난 것들을 구해 마름모로 놓고, 그 위에 기와를 이용해 줄을 맞추었다. 얼핏 보아도 아름답다.

 

 

 

그저 무료한 담벼락을 만드는데 비해, 서정우 가옥의 담벼락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멋을 내었다. 마침 함께 답사 길에 나선 친구가 한옥을 지을 때 관계하는지라, 이 담벼락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전통 가옥을 보수하느라 전국을 다녀보았지만, 이런 담벼락의 형태는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무료한 담벼락을 돌과 기와로 못을 낸 서정우 가옥.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가보다.

 

평범한 안채의 부엌에도 무엇인가 있다

 

사랑채의 뒤편에는 ㄱ 자로 꺾어 지은 안채가 있다. 안채는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부엌과 안방, 윗방을 차례로 배열하고, 꺾인 부분에 대청을 드리고 건넌방을 꾸몄다. 대청은 두 칸으로 달았으며, 뒤편에 커다란 창호를 두 곳을 내어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이 든다. 대개는 판자문을 하는데 비해, 서정우 가옥은 대청의 뒷문을 창호로 내어 멋을 냈다. 아마 이집을 지을 때부터 집주인이 꽤나 멋을 아는 분이었을 것 같다.

 

 

 

서정우 가옥은 안채의 건축연대가 19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한다. 상량문에는 1924년에 다시 고쳐지은 것으로 적고 있다. 사랑채도 안채를 보수할 때 지은 것으로 본다. 그저 평범한 안채에는 부엌이 조금 특이하게 만들어졌다. 커다란 부엌문을 달고 그 옆에 작은 문을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부엌 바깥 담벼락의 위에는 나무를 넓게 띄어 창을 낸 까치구멍을 냈다. 연기가 잘 빠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금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람을 피하느라 비닐로 까치구멍을 막고 환풍기를 달아, 조금은 멋이 감해졌다는 느낌이다. 부엌의 담벼락 역시 사랑채의 담벼락과 같이 돌과 기와를 이용했다. 평범한 듯 하면서도 무엇인가 색다른 멋을 낸 서정우 가옥.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

 

 

 

뒤울안 텃밭과 판자굴뚝이 백미

 

서정우 가옥의 또 하나 아름다움은 뒤울 안에 있는 텃밭이다. 안채의 뒤편이 비탈이 진 것을 축대를 쌓아 평평하게 만들고 그 곳에 작은 텃밭을 만들었다. 텃밭 옆에는 역시 축대를 쌓은 후 장독대를 꾸몄다. 담장이 둘러쳐진 안에 아기자기한 민초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안채의 뒤편에 선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널판자로 네모나게 만든 굴뚝이다. 굴뚝의 끝에도 사이를 띄워 덮개를 만들었다. 작은 것 하나하나가 참으로 아름답다는 느낌이다.

 

 

 

중부지방 전형의 민가 가옥이라는 음성 서정우 가옥은 오밀조밀한 멋이 있다. 튀어나지 않고, 안으로 스며드는 멋. 우리 고택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작은 멋 하나가, 사람을 참으로 기분 좋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 고택 답사는 늘 즐겁다. 사람이 살고 있어 여기저기 촬영을 하는데 힘이 들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살아있다는 훈훈함이 있어서 더 좋다는 생각이다. 서정우 가옥을 뒤로하며, 앞으로 만날 많은 고택들을 미리 그려본다. 그래서 안개 자욱한 날이지만, 답사 길이 즐거운가 보다.

요즈음은 답사를 나가면 해가 일찍 떨어져 부지런을 떨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지금이야 많이 해가 길어졌지만, 한 달 전만해도 정말 답사를 다니려면 종종걸음을 쳐야만 했다. 일찍 해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 곳을 돌아보고 난 뒤 다음 답사지를 가급적이면 가까이 잡는 것도 그런 이유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을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짙은 안개로 오전 시간을 허비해버렸다. 한 곳을 답사하고 난 시간이 벌써 5시가 넘고, 주변은 어두컴컴해진다. 서둘러서 다음 답사지인 감곡면 오향리를 찾아 길을 재촉한다.

 

음성군 감곡면 선돌을 찾아 나서다

 

오향리는 이천에서 제천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청미천을 건넌 후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있는 마을이다. 감곡에서 생극을 거쳐 음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몇 곳을 돌면서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오늘 찾아야 할 선돌 위치를 모른다. 한 곳에 들어가니 중학교 뒤편 논에 서 있다고 한다. 감곡중학교 뒤편으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가다가 보니, 저편 논둑에 돌이 서있다. 찾아보아야 할 선돌이다.

 

거대한 선돌. 제작연대까지 밝혀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 선돌.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재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선돌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선돌 중에서 큰 편에 속한다. 높이가 3m 정도에 너비가 194cm, 폭이 60cm이다. 이 선돌이 서 있는 곳을 '선돌바위들'이라고 부른단다.

 

선돌은 마을의 수호신인 신표와,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석 등의 역할을 한다. 이 선돌은 마을에서 섬기는 마을의 수호신은 아니다. 돌을 다듬은 흔적도 없다. 다만 돌을 절개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커다란 바위에서 떼어낸 것으로 보인다.

 

오향리 선돌이 중요한 민속자료로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선돌을 세운 날자가 기록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남쪽을 향한 선돌의 아랫부분 절개면에 「숭정 13년 경진 10월 22일 입석(崇禎 十三年 庚辰 十月 二十二日 立石)」이라고 얇게 음각하였다. 이 글의 내용으로 본다면 1640년에 이 선돌을 이곳에 세웠으니, 370년을 이곳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선돌의 기능은 무엇일까? 앞에는 청미천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입석의 기능은 수해방지를 위한 목적으로 세운 것이라는 생각이다. 혹은 이곳이 도계지역이므로, 그러한 경계의 표시였을 가능성도 있다.

 

끝내 암돌은 못 찾고, 마음만 아파

 

날은 이미 저물었다. 이 선돌의 안내판을 보니 이 돌이 암수 한 쌍으로 되어있고, 암돌은 남성선돌에서 북쪽으로 350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글씨가 새겨져 있는 선돌의 절개지가 남쪽이라면 그 반대쪽이 된다. 남성 선돌에서 바라보면 청미천 쪽 둑이 되는 셈이다. 거기다가 안성방향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 남쪽 언덕에 있다고 적혀 있다. 날이 컴컴해지고 있으니 서둘러 찾아보기로 했다. 좁은 농로를 차로 이동하면서 주변을 샅샅이 뒤져본다. 그러나 주변 어디에도 선돌 비슷한 것도 보이지를 않는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벌써 한 시간 이상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끝내 여성선돌은 찾지를 못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 번 더 돌아보리라고 마음을 먹는다. 농로를 따라 이리저리 돌다가 보니 학생들이 한 떼 몰려온다. 반가운 마음이 든다. 적어도 학교에서 주변에 있는 문화재 정도는 한번이라도 알려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학생들 이 근처에 선돌이 어디 있는지 알아?"

"선돌요. 모르는데요. 선돌이 무엇인데요?"

"저기 앞에 저 돌처럼 세워 좋은 돌인데. 저것보다 조금 작은 것"

“몰라요."

 

어이가 없다. 도대체 요즈음은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학교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선돌, 그 정도쯤은 단 한번이라도 학생들에게 알려 줄만도 한데. 몇 번이고 물었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대답이다. 답답하다.

 

"이놈들 담배 피웠냐?"

"담배 피우지마라 뼈 삭는다."

 

차가오니 미처 끄지 못하고 버린 담배에서 연기가 나온다. 대답을 하는데도 담배 냄새가 난다. 교육이 점점 어디로 가는 것인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찾고자 하는 선돌은 보이지를 않고, 학생들은 선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차를 돌려 나오면서 갑자기 울화가 치민다. 오늘 우리의 교육현실이 참담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우리 것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그런 학교생활. 과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선돌을 찾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 그런 것 하나 알려주지 않는 교육 현실이 더욱 마음이 아프다.

 

남들은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하면 대뜸 '좋겠다. 마음대로 여행도 하고'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재미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 하나를 찾아보기 위해서 전국을 수 십차례나 돌았다. 그런데도 아직 내가 본 문화재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즐거움만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많은 아픔을 겪기도 한다. 문화재를 마구 훼손한다거나, 아니면 오늘처럼 이렇게 무관심한 세태를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늘 바람은 하나밖에 없다. 전 국민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바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말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