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재란 말이 쉬어간다는 곳이다. 남양주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1760년 경기도 광주 마재에서 진주 목사였던 정재원의 아들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다산 정약용(요한) 정약전, 정약현 등이 선조 28년인 1595년 마태오 리치가 펴낸 한역서학서인 <천주실의>를 읽고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곳이다.

 

마재성지는 103위 순교성인이신 성 정하상(바오로)과 성 정정혜(엘리사벳) 남매의 탄생지이다. 일반적으로 성지란 순교한 장소인데 비해, 마재는 한 가정의 신앙 출발지라는 점이 다르다. 신유박해 때 정약종은 참수형을 당했고, 정약전은 정약용과 함께 귀양을 떠났다. 이 마재의 형제 중 정약전은 진주목사 정재원의 둘째아들이다.

 

 

독실한 천주신앙의 가문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그 곳에서 1814년에 <자산어보>를 저술, 한국 최초의 어류생태서를 완성했다. 그는 평생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 실학자로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한 개혁가로도 유명하다. 천주교를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유배당했지만 유배기간동안 학문에 더욱 힘써서, <일표이서>를 비롯한 5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또 한 사람 강화도 출신인 황사영이 있다. 황사영은 1790년 정조 14, 1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해서 진사가 되었으나 천주교에 입교를 한 후 관직에 나아기지 않았다. 정약현의 딸 명련과 혼인하셨으며, 정약용에게 교리를 배웠고 주문모 신부를 만난 다음 측근으로 활약하다가 1798년 아현동으로 옮겨 활동을 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 그곳 토굴에서 박해받는 조선교회의 참상을 알리고자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황사영백서이다. 북경 동지사 편에 끼어 보내려고 했던 이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어 92일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황사영은 능지처참 형을 받았다. 아내인 명련과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마재성지를 돌아보다

 

마재성지는 딴 곳의 성지에 비해 그리 큰 편은 아니다. 한옥으로 지은 성당에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건너편에 마재성지가 자리한다. 마재성지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 편에 사무실이 있고, 103위 성인들의 그림과 정약용 일가를 상징한 듯한 모임을 하고 있는 인형들이 보인다.

 

 

 

마재성지의 정씨 형재 중 정약종의 업적 가운데는 최초로 한글교리서인 <주교요지>가 있다. 주교요지는 모두 43쪽으로 된 한글교리서이다. 이렇게 정약종의 형제들이 어릴적부터 천주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을 했던 터전. 성지 안에 조형물로 세운 칼 십자가 상이 있다.

 

정약종이 잡혀가기 얼마 전에 그의 몸에서 무수히 많은 작은 십자가들이 빛나는 것을 본 교우가 약종이 맞게 될 수난의 증표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한 많은 작은 십자가를 입힌 칼 십자가 상은 바로 정약종의 꿈을 형성화 한 것이다. 형리가 그의 목을 베기 위해 나무 형틀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하자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 보다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며 바로 누워서 형을 받았다고 전한다.

 

 

입구에서 우측으로는 십자가의 길 14체가 조성이 되었으며, 좌측동산 길은 마재 명상길이다. 성지를 한 바퀴 돌아본다. 박해 때마다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 요즈음 사람들은 과연 그런 고통을 이겨내면서 자신의 종교를 지킬 수가 있기는 할까? 어쭙잖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성인인체 하는 무리들이 가여워지기까지 한다.

 

화성을 축성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다산 장약용. 그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들렸던 다산유적지. 그리고 그가 태어났던 천주신앙의 가족발상지인 마재성지. 어찌 보면 다산이 그 많은 저서를 남긴 것도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마재 명상 길을 걸어보면서 세상의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싶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신 효자였다. <난중일기>에는 이러한 이충무공의 내력을 적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3년 6월에서 12월 사이에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를, 여수 웅천동 송현마을 정대수 장군의 집에 모셔다 놓고 수시로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하루는 노모를 뵙기 위해 일찍 배를 타고 송현마을로 문안을 드리러 왔는데, 기운이 많이 떨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군은 어머니를 뵈러 갈 때는 흰 머리카락을 모두 뽑고는 했는데, 이는 늙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해서였다고.


장군의 모친이 살던 집터를 찾아가다.

10일 아침 일찍 여수 수산시장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다. 여수에 사는 지인을 만나 함께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장군의 어머니께서 사셨다는 집터를 찾아갔다. 길가에는 ‘이충무공 어머님 사시던 곳’이란 푯말이 붙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요즘 주변 정리를 하느라, 한창 공사 중이다. 전남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 1420-1번지. 옛 집터 인 듯한 곳에는 거북선에 비를 세운 형상물이 있는데, 이 근처 어디인가 이충무공의 모친이 5년간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거북비가 서 있는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7칸 정도에, 측면 두 칸 반 정도의 팔작 겹처마 지붕으로 된 집이 있다. 현재 이 집은 사람들이 거주를 하고 있는데, 현재 거주를 하시는 분은 정평호(남, 79세)로 임지뢔란 시 활동을 하던 정대수 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분은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들이 대대로 이 터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고택다운 옛집, 1930년대 지은 것으로 전해져

현재의 집주인도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상 대대로 이 집터에서 살았다는 분들. 집터는 옛집 터지만, 집은 그동안 여러 번 개축을 한 것인지 옛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 이 집은 예전 충무공의 어머니께서 사시던 집은 아니다. 당시 발굴을 할 때 대들보 등이 발굴된 곳은, 현재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정평호옹이 살고 계시는 집의 부엌과 장독대에 걸쳐 있다고 전한다.

현재 주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 옛 선조들이 살던 집터에 나중에 보수, 개축을 했다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는 아마 사랑채나 별채에 기거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대수 장군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 선 안내문에 보면 「1972년 옛 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대들보, 마룻대, 세살창문과 같은 집 구조물과 맷돌, 디딜방아용 절구, 솥 같은 세간들을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 주변으로는 수령 300년이 넘는 팽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팽나무는 수고가 25m에, 나무의 둘레는 5.2m나 되는 거목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후 문화재지정도 고려 해

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사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주춧돌은 원형으로 다듬었으며, 그 위에 팔각기둥을 세웠다. 사방에는 처마 끝에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전체적으로 보아도 고택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배어있다.

여수시 문화재 관련 담당자는 내년에 발굴에 필요한 예산 신청을 했다고 한다. 발굴 후에 이 터가 정확하게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살던 집이라고 밝혀진다면, 이곳에 복원계획도 고려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현재의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만일 이 터가 발굴조사 후에도 정확한 고증이 들어나지 않는다면, 관광자원으로 활용을 할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난중일기에 밝혔듯이, 송현마을에 어머니를 모셨다고 기록이 있고, 현재의 집이 당시 정대수 장군의 집터이기 때문이다. 충신이요 효자인 이충무공의 어머니가 살았다는 집터. 그곳에는 충무공에 관한 역사를 안내판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크다.

길은 어디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길을 이용한다. 지금이야 차를 갖고 다니기 때문에, 차를 타고 휑하니 달려가 볼일을 보고는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걷거나 말을 타지 않으면 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니던 길이 이제는 나름대로 멋진 이름을 붙여 다시 태어나고 있다. 그 길을 걷는 재미에 빠지면, 길이 다시 보인다.

전주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살던 곳이다. 시조인 이한 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으로, 조선개국을 칭송한 「용비어천가」에 이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금강으로 침입한 왜구는 군선 5백 척을 진포(군산)에 대놓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우왕은 수군을 총지휘하던 최영에게 명하여 이를 무찌르게 하였는데, 패전한 왜군은 퇴로를 찾아 남원으로 내려왔다. 이성계는 이들을 맞아 운봉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오목대에서 개선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한다.


조선개국의 뜻을 품은 길

한옥마을에서 오목대를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조성을 하였다. 오목대길은 가끔 산책을 나가기도 하는 곳이지만, 하필 가장 찜통이라는 날을 골랐다. 그래도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천천히 계단을 오르면서 돌아보니, 한옥마을의 지붕들이 줄을 지어 보인다. 사람들은 연신 한옥마을을 촬영하느라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마을을 찍기 좋은 장소를 골라, 사진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한 마음이 따듯하다.




이목대로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이다. 위로 오르면 한옥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다.
한옥마을이 옛날 이야기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낮은 야산이지만 숲이 좋은 길이다. 여기저기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배려를 해놓았다. 오목대로 오른다. 그 옛날 이성계가 운봉으로 출동하여 황산에 진을 치고 적과 싸우다가, 왜장 ‘아지발도’를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성계는 승전을 하고 귀경 도중 전주에 있는 종친들을 모시고 승전축하연을 이 오목대에서 베풀었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이 자리에서 한고조가 불렀다는 ‘대풍가’를 불렀다. 대풍가는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고향에서 종친을 모시고 읊은 시가 아니던가. 바로 한나라를 세우겠다는 마음을 은연중 내비친 시이다.

오목대를 비켜서면 이목대가 있다. 보호책을 둘러놓은 이목대 전각 양편으로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문지기라도 된 양 꽃을 피우고 있다. 전각 안에 비석은 바로 고종황제가 친필로 썼다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 쓰여 있다. 결국 이곳 이목대와 오목대는 조선이라는 한 나라가 출발하는데 있어, 그 뜻이 모인 곳이다.




오목대와 이목대. 오목대는 이성계가 승전을 하고 잔치를 벌인 곳이며,
이목대는 이곳이 이씨들이 살던 곳임을 알려주는 표지이다.

매미소리 시원한 당산 길

이목대를 지나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시원한 숲길에서 매미소리가 시끄럽다. 아마 마지막 더위를 아쉬워하는 듯하다. 내리막길에 커다란 당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500년 동안 전주 한옥마을의 안녕을 기원해 온 나무이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이곳에서 정결하게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올리는 당산나무

다시 한옥마을 들어가기 전에 양산재 길로 향한다. 여기저기 목책의자들이 정겹게 놓여있다. 이 찜통더위에 잠시라도 숨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 않는다. 여기도 역시 낙서는 빠지지 않는다. ‘윤진아 사랑해 - 남편’이란 글이 시야에 가득찬다.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 이런데 낙서를 하면 그 사랑이 깊어지는 것일까? 괜한 헛웃음만 허공에 날리고 있는데, 더위에 날기를 지친 나비 한 마리 나뭇잎에 숨을 고른다.



쉴수 있도록 마련된 나무의자. 이 길에는 나무의자들이 많이 있다.
누군가 한 낙서와 따라오던 나비 한 마리가 같이 날개를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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