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김두한의 집이 아니라니까?
김두한가옥이라고 하면 백야 김좌진장군의 아들이자, 현 탤런트 송일국의 외할아버지인 김두한 전 의원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김두한 가옥은 전 김두한 의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집이다. 다만 이 가옥의 소유자가 김두한이란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명이인인 김두한 가옥이라고 명칭을 붙였을 뿐이다.
김두한 가옥은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건등리에 소재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6호이다. 이 가옥은 원주목사와 남원목사를 지냈던 김탄행(1714 ~ 1774)의 묘를 관리하기 위하여 지은 묘막이다. 250여 년 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하며, 1936년에 크게 보수하였다고 한다.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운 사랑채
김두한 가옥은 ㄱ자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어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여 짓는 경우는 그리 흔치가 않다. 그러나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고, 사랑채는 다시 대문으로 대문채와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에 연결이 된 대문채는 잠시 사이를 두고 헛간과 방이 있는 광채와 합해, 튼 ㅁ 자형을 이루고 있다.
대문을 사이로 사랑채와 대문채가 연결이 되어있는 이 집은, 밖의 길에서 사랑채와 대문채가 한눈에 보인다. 사랑채는 3단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렸다. 긴 장대석의 석재를 이용한 것이나 3단으로 기단을 쌓은 것들을 보면, 당시 이 묘막을 지은 가문의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집은 밑에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형의 주추 위에, 방형의 기둥을 세웠다. 사랑채의 마루방은 앞면과 측면의 문을 모두 열어젖힐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랑채의 문들이 재미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집을 바라보면서 왼쪽 1칸은 마루방으로 꾸몄고, 오른쪽 2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마루방의 문은 앞면과 측면이 판자문으로 막았다. 판자문은 4짝을 모두 함께 열어젖힐 수가 있다. 마루방의 뒤쪽으로도 사방 1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이 방은 안채의 부엌과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앞에 돌출이 된 마루방을 빼고, 두 칸 방 앞으로 마루를 놓았다. 이 마루에 올라서면 좌측으로는 마루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우측으로는 작은 쪽문이 보인다. 이 쪽문은 무엇에 쓰는 것일까? 이 여닫이로 된 쪽문을 열면 좁은 네모난 공간이 나온다. 그리고는 대문과 사랑채의 끝이 이어지는 아궁이가 있다. 이 문안에 있는 공간은 아궁이에서 사랑방으로 통하는 공간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네모난 작은 공간은 무엇이고, 마루 끝에 보이는 쪽문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 공간은 대문간에 붙은 아궁이에서 음식 같은 것을 만들어, 사랑채로 옮기던 창구가 아니었을까? 안채에 붙은 부엌에서 이곳 사랑채까지 나르기는 힘이 들고, 안채와 연결이 되어있다고 해도 사랑채가 외간남자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으니, 이 쪽문을 통해 네모난 공간에 음식을 놓고, 그것을 사랑채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안채에 딸린 부엌, 유난히 환기장치가 많은 이유는
안채는 안방과 윗방이 부엌에 접하여 있고 그 옆으로 대청과 건넌방이 있다. 일반적인 고택의 경우 - 자형의 집이 아닐 때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의 건물로 구성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김두한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붙어있다. 다만 그 구별은 중간에 안채의 부엌을 놓아 구분을 해 놓았다. 이렇게 전체적인 가옥구조의 중간에 부엌을 놓은 경우는 아주 특이한 경우이다. 김두한 가옥의 특징은 바로 이 부엌이 건물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이 부엌에는 아랫부분에 나 있는 양편으로 마주 뚫어놓은 까치구멍과, 위편에 또 하나의 커다란 까치구멍이 있다. 이렇게 많은 환기장치를 해 놓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김두한 가옥은 묘막으로 지어진 집이다. 그러다가 보면 제의를 행할 때,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 음식들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환기가 잘 되어야함은 기본이다. 그렇게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가옥보다 환기장치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김두한 가옥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대문채와 광채를 이어주는 담장이다. 이 담장은 일반적인 담장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흡사 이 담장이 어느 건물의 담벼락과 같은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담장에는 가로 세로로 나무를 질러 담벼락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실제로 이 김두한 가옥이 모든 담벼락들이 이와 같은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담벼락으로 오인을 할 수 있다.
250년의 긴 세월을 자리를 잡고 있는 김두한 가옥.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여기저기 파손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옛 모습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우리 고택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가옥이다.
남한강 부처울 마애불의 슬픈 뱃노래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를 '불암동'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바로 이곳에 마애여래입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이 있는 남한강변을 '부처울'이라고 부른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마애불
이 마애여래입상은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자연암벽에 돋을새김을 하였다. 이 마애여래입상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 조각기법 등을 보면 그 이전 통일신라시대일 것으로 생각이 된다. 고려 초기의 보이는 인근 지역의 마애불보다 그 조각을 한 수법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조화라든지, 섬세한 수법 등이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 등에서 보이는 것과 흡사하다. 또한 이렇게 섬세하게 조각을 했다는 것도,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자연암벽에 조각을 한 마애여래입상의 얼굴 주위에는 3중의 원형 두광이 있는데, 그 테두리에는 불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 모습이 당당하고 특히 법의의 새김 등이 신라시대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부분적으로 약간 형식화 된 부분을 들어 고려 초기로 보고 있지만, 이 지역에 나타나는 고려 초기의 마애불과는 달리 그 형태가 뛰어나다는 점이다.
아직도 지역주민들이 찾는 부처울 마애불
이 마애여래입상이 서 있는 부처울은 강원도에서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 정성을 드리던 곳이라고 한다.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이포나루가 있는 곳에 당도하기 때문에, 아마 이곳을 지나면서 이 부처울의 마애여래입상에게 편안한 강 길의 여행을 하게 도와달라고 했을 것이다.
지역의 주민들도 아직도 이곳을 찾아와서 빌고는 한다. 신라 말에 조성이 되었다고 보면, 천년 넘는 세월을 이곳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아마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보호를 받아온 것도, 이 마애불이 서 있는 위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계신리 마애여래입상은 마을을 지나, 남한강가의 좁은 바위틈을 지나 내려가야 한다. 아마 예전에는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와 이곳에 배를 대고 정성을 드렸을 것이다. 그 좁은 통로를 지나 내려가면, 깎아지른 자연 절벽에 마애여래입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강 길이 아니면 쉽게 접근을 할 수가 없다. 그런 위치가 이 마애불을 온전히 보존한 것으로 보인다.
당당하면서도 섬세한 모습에 감탄하다
부처울 마애여래입상은 수작이다. 인근의 마애불 중에서는 그 수법이 뛰어나다. 둥근 얼굴에 큰 귀가 어깨까지 닿을 듯 내려오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되어 불신 전체를 감싸며 U자 형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저렇게 바위에 섬세한 굴곡을 조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눈은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자세히 보면 날카롭지 않은 모습이다. 코와 입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다. 오랜 시간 강을 따라 뗏목을 띄워 내려오는 사람들의 애쓴 노고를, 이 웃음으로 고통을 잊게 했을 것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오른손을 위로 향하고 왼손을 밑으로 내렸다. 법의는 팔소매에 주름을 새겨 부드러움을 더했다. 가슴에는 내의를 매듭으로 마무리를 하였고, U자 형이 주름이 아직도 섬세하게 옷매무새를 마무리하고 있다. 뛰어난 기능을 보이고 있는 이 마애여래입상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발목까지 길게 내리운 법의를 마무리를 한 것도 뛰어나다. 이렇게 뛰어난 솜씨로 돋을새김으로 조성한 부처울 마애여래입상. 지금 그 마애불은 남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할까?
천년세월 내려다 본 아름다운 남한강
부처울 마여여래입상이 천년세월을 내려다 본 남한강. 그 남한강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침이 되면 자욱이 일어나는 물안개가 아름다웠을 것이다. 강가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아름답다. 겨울이 되면 수많은 철새들이 날아와 물을 박차고 까맣게 비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한강은 터전으로 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남한강을 천년 세월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웠던 남한강이다. 부처울 마애불에 비손을 하기 위해, 작은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 다가온 사람들이 올려다보았다. 뗏목을 타고 멀리 강원도에서 찾아 온 사람들도, 올려다보고 두 손을 모았다. 아름다운 남한강의 풍취에 취해, 배를 띄우고 시선이라도 된 양 소리 한 자락을 하던 사람들도 이곳에 멈추었을 것이다.
그런 남한강이 변하고 있다. 이해를 할 수가 없는 물길공사라는 것으로 인해 마애불이 내려다보이는 그 앞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떼죽음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곳에 마애불을 새긴 까닭도 천년 뒤의 이런 생명의 죽음을 미리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 강물 위로 슬픈 뱃소리 한 가닥 여울져 흐르는 듯하다.
탑을 잃은 비, 짝 잃은 쓸쓸함이 느껴져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는 원래 경기도 여주의 땅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하여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것으로 알려진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후 중창을 이루지 못한 절이다. 이곳을 찾았을 때는 초겨울의 바람이 불고 날씨가 급격히 추워져서인가, 법천사의 발굴 복원 작업이 중단되고 있었다.
법천사에는 국보 제101호인 지광국사현묘탑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일본 사람들이 밀반출하였다. 그 후 1915년에 되돌려 받아 현재는 경복궁 경내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앞에 서 있다. 이 현묘탑이 새로 지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것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옮길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59호 지광국사 현묘탑비
현재 법천사지는 발굴, 복원 중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전각이 있던 자리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 전각의 자리로만 추정해도 이 절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현묘탑비는 고려시대의 스님인 지광국사(984 ~ 1067)의 사리를 모신 현묘탑을 세운 이후, 고려 선종 2년인 1085년에 지광국사의 업적과 삶을 기록한 비다. 국보 제101호인 탑은 제자리를 떠나고, 탑비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묘탑비의 앞면에는 지광국사가 984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원혜린이라고 기록돼 있다. 16세(999년)에 스님이 되어 승통, 왕사, 국사의 칭호를 얻었으며, 84세인 1067년에 이곳 법천사에서 돌아가신 것을 기록하였다.
국보 제59호 현묘탑비를 보면 놀랍다. 받침돌은 고려 초기 탑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삼국통일을 한 신라 말기부터 고려조로 넘어오면서 받침돌의 형태가 달라진다. 즉 거북의 몸에 머리는 용머리로 조성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받침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새로운 받침돌의 형태는 그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현묘탑비
지광국사현묘탑비를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작품성을 엿볼 수 있다. 천년이 지난 과거에 이렇게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연꽃의 잎과 구름속의 용이 조각된 왕관 모양의 머릿돌. 그리고 비 몸돌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과, 금방이라도 몸돌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은 용. 섬세하고 화려한 구름 등이 현묘탑비의 뛰어난 예술성을 느끼게 만든다.
총탄을 맞은 마애공양보살상.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다
답사를 하는 길은 늘 바쁜 걸음이다. 하나라도 더 문화재를 만나야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경기도 가평에서 여주, 양평을 거쳤다. 원주에서 횡성으로 올라오는 길에 갑자기 치악산 좁을 길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길을 벗어났다. 원주 공군비행장 맞은편 소로로 길을 접어들어 치악산 쪽으로 가다가 보면, 소초면 소재지가 나온다.
주말에는 항상 밀리는 영동고속도로이다. 올라가는 차들이 심상치가 않다. 아무래도 길이 막힐 것 같아 길을 서둘러 돌아 나오는데, 마애공양보살상의 안내판이 있다. 길옆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암벽이 없다. 마애보살상이란 암벽에 새긴 것이라 바위만 찾아본다. 낮은 등성이 있는 산 어디에도, 마애불을 조각할 만한 바위가 보이지를 않는다.
개울가에 자리한 바위, 그곳에 마애불이
원주시 소초면 평장리. 산 밑을 바라다보니 돌계단이 있고 그 밑 기슭에 암벽하나가 솟아 있다. 세상에 저 밑에 저렇게 숨어있었다니. 암벽에 보살좌상 1구가 선각 되어 있다. 높이 3.7m, 넓이 6.2m 크기의 암벽에 가득히 조각하였는데 보살의 높이는 3.5m이다. 이 보살은 측면상으로서 머리에 보관을 썼는데, 하단에 좌우로 관대가 보인다.
보발의 표현이 부드러우며 상호는 원만한 상으로 양미안과 비량 등은 잘 남아 있으나, 입은 파손되었다. 삼도가 돌려지고 천의는 편단하였으며, 오른발을 구부려서 앉고, 왼발은 직각되게 펴서 왼손을 받치고 있다. 각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고려 전반기로 추정 된다. 이 보살입상에서 특이한 것은 왼손을 넓게 펴고, 그 위에 연꽃등의 공양물을 올려놓아 오른손으로 이것을 잡고 있는데 이러한 형상은 흔한 것이 아니다.
이 작은 동산 한편 물이 흐르는 작은 골짜기 한편에 다소곳이 앉아 천년을 보내다니. 암벽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음각을 한 선이 굵지가 않아서 언뜻 눈에도 띠지 않는다. 그렇게 천년 세월을 이곳이 앉아 역사의 변화를 보면서, 묵묵히 한손에 받친 공양물을 부처님께 올리는 저 보살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려고 했을까?
총탄을 맞은 마애공양보살, 역사의 아픈 흔적
작은 계곡 앞에 철버덕 주저앉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다만 보고 있다. 무엇인가 우리에게 암시를 하는 것은 아닐까? 저 손에 들고 있는 공양물이 혹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아줄 정신적인 먹을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세상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향해, 나에게로 와서 배를 채우라는 고함소리는 아니었을까? 그렇게 눈을 들어 앞을 바라다보는 마애공양보살상은, 말없이 한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만 같다.
이 보살상의 입은 심하게 파손이 되었다. 누가 일부러 무엇인가 단단한 것으로 찍은 듯하다. 그도 마애보살상은 우리에게 암시를 하려고 한 것 같다. 시끄러운 세상, 그저 입단속 잘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입만이 아니다. 얼굴에도 신체 부위에도 총탄을 맞은 흔적이 나 있다. 아마도 전쟁 중에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나보다.
이렇게 훼손이 된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되고, 전쟁 통에 부서지고, 그것도 부족해 별별 이유로 훼손이 되어가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이 된 이 평장리 마애공양보살상은 이렇게 아픈 역사를 보듬고, 천년 세월을 개울가에 무릎을 꿇고 있다.
어머니의 손맛인 시골스런 밥 한상에 피로를 잊다
참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물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언제부터인가 우리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되고, 그것을 찾아 하나하나 어디엔가 소개하는 것이 나의 일처럼 되어버렸다. 남들은 이런저런 일로 음식을 소개하고, 그것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재에 대한 고집스런 글을 올리다가 보니, 맛집을 발견해도 늘 식당문을 나서고 나서야 '소개를 할 껄 그랬나'라는 생각을 한다.
서로 상을 차리겠다고 하는 아이들.
원주시의 문화재를 답사하던 날, 이미 점심시간을 지나 배도 고프다. '한 가지만 더 찍고...' 라는 생각으로 돌아치다가 보니, 오후 2시가 넘었다. 아침을 7시에 먹었으니 배도 고프고 허기도 진다. 길가에 있는 식당들이 많지만, 그 중 한집이 눈에 띤다. 안으로 들어가니 살림집을 식당을 사용하는터라, 여느 식당처럼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냥 내집처럼 편안함을 주는 그런 곳이다. 밥 한상에 7,000원이라는 가격표가 보인다. 주변에 마당한 식당도 없는터에 이것저것 따질 수는 없다. 그래도 늦게나마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고마움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식당 집의 아이들인 듯, 누나와 남동생이 서로 상을 차리겠다고 주장을 한다. 서로 미루겠다고 다둘 나이인 듯 한데, 서로 상을 차리겠다는 아이들을 보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주거니 받거니 차린 소박한 밥상
특별한 것이 없다. 반찬이라야 10여가지. 거기다가 고급스런 반찬은 없다. 가갹에 비해 비싼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든다. 하지만 허기진 배에서는 연신 들어오라고 난리다. 조금 있으니 된장 냄새가 구수하게 나는 찌개를 갖다 놓는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돌솥밥을 새로 하느라고 조금 늦었다고 정중히 이야기를 하는 남자녀석의 행동에 웃음이 난다. 하지만 반찬을 하나하나 먹어보니, 어디선가 많이 먹어 본 맛이다. 아주 오래전에 어머니가 텃밭에서 구해다가 만들어준 반찬맛이랄까? 그런 맛이 난다. 거기다가 식당이 가정집 거실이니 더 더욱 그러하다.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은 조금은 텁텁하고 깔깔한 맛. 참으로 오랫만에 보는 맛이다.
답사를 다니면서 온갖 맛이 있다는 집은 많이도 들려보았다. 집의 전면을 덮고있는 '무슨무슨 방송국 무슨무슨 프로 출연' 등의 문구가 적힌 곳도 수없이 들어가보았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조미료를 싫어해서인지, 그런 곳도 그렇게 맛있게 느끼지를 못한 것만 같다. 오히려 소박하면서도 어머니의 손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집. 어느 가정의 점심상처럼 편안한 식단. 그래서 이 식사 한끼로 피로를 잊은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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