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시 목천읍 동리 79-2에는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가 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던, 석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8월 29일은 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동녕 선생의 존재는 남다르다. 이곳 천안은 이동녕 선생 외에도 유관순 열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동녕 선생은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이 집은 충남 기념물 제7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원래는 9칸 반의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생가지 조성을 하면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말끔하게 조성 된 이동녕 선생 생가지

이동녕 선생은 이병옥의 장남으로 1869년에 태어났다. 1904년 1차 한일협약이 체결이 되자,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상설 등과 북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1907년에 귀국하여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강영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의 일을 함께 보았다.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이사장이 되고,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 당수로 활약하였다. 1940년 중국 사천성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으며, 그곳에 안장하였다가 1948년에 효창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생가지 앞마당에는 선생의 앉아계신 모습이 있다. 생가지의 대문채와 안채(아래)

국지성 호우가 미친 듯 쏟아지고 난 뒤,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를 방문했다. 그렇게 쏟아지는 비는 요즈음 들어서도 처음인 듯하다. 마치 국치일의 아픔을 씻어내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또 다른 국치를 만들고 있는 윗분들 때문에 마음이 울적해 찾은 곳이다.

깨끗이 정리된 생가지 ‘옥의 티’가 즐비해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생가지 주변은 정리가 잘 되어있다. 그 집 앞에 선생이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엷은 미소를 띠우고 계시다. 물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조성된 선생의 모습이다. 집을 배경으로 한 선생의 모습이, 찾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려는 듯하다.


원래 집의 모습은 ㄱ 자형의 안채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집의 구조를 대충은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더욱 9칸 반이었다고 하면 그 집이 어떤 형태로 지어졌었는가는, 지역마다 갖고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대충 알 수가 있다.

현재 이동녕 선생의 생가는 앞으로 대문채인 광채가 - 자로 있고, 뒤편에 ㄇ 자형의 안채가 놓여있어 튼 ㅁ 자형으로 공간구성을 하였다. 현재 안채는 중앙에 세 칸 대청이 있고,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부엌과 안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끝에 다락방인 듯한 반 칸 정도의 방을 드려 모두 4칸으로 구성을 하였다. 대청 좌측으로 보이는 곳도 네 칸으로 구성을 했으며, 대청에 달아낸 부분에는 사랑방을 드렸고, 부엌과 방, 그리고 개방된 마루방을 놓았다.


안방문은 도대체 저런 기발한 생각을 어떻게 한 것일까? 그리고 한편에 붙은 마루방은 또 무엇일까

이 집을 돌아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생가지에 새롭게 집을 짓는다고 해도 가급적이면 예전집의 형태로 복원을 했어야만 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다고 하면, 앞쪽으로는 사랑채가 있고, 그 뒤편에 ㄱ 자형의 안채가, 그리고 한편에는 광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현된 집은 도대체 그 비슷한 형태조차 갖추고 있지가 않다.

생가지의 집에는 무슨 옥의 티가 있을까? 우선 안채의 좌측 끝에 있는 개방마루방이다. 이런 구조를 어떻게 생각해 낸 것일까? 개방마루방을 꾸미려면 마루를 높여 정자와 같이 앞뒤로 개방을 했어야만 했다. 이런 식의 마루방은 전국을 돌면서 한옥을 보았지만, 내 안목이 좁아 그런지 본 적이 없다. 만일 이것이 광을 들인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판자문을 달아야만 한다. 

뒷벽에 난 창문을 보면 이것은 방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광일 경우 뒷벽도 막아야하고, 상단에는 까치구멍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사랑방과 안방의 문이다. 대개 안방의 문은 네 짝 짜리 미닫이문을 달아야 한다. 그런데 커다란 문 한 개와 작은 문 한 개를 만들어, 위로 올려 붙들어 매게 만들었다.



뒤편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보고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정도였나?
역사적 인물의 흔적이 있는 고장에서, 이렇게 흉내만 내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뒤편으로 돌아갔더니 우물이 보인다. 맑은 물이 차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다가갔더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우물 안에는 자갈만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찾아와 들여다보고는 하는 우물인데, 지하수라도 끌어다가 채웠으면 좋았을 것을. 역사의 한 인물이 살다가 간 흔적이 있는 집을, 이렇게 터무니없이 만들어 놓다니. 일제에 의해 수도 없이 조작이 된 우리의 역사다. 그런데 이것은 또 다른 조작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몸 받쳐 온 선생의 생가지에, 이런 집이라니.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선생의 곁에 가서 앉았다. 쏟아지는 폭우에 젖은 선생에게 정말 죄스런 마음이 들어서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또 다른 슬픔을 이곳에서 보고 가네요.” 선생의 손을 잡아본다.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에서 왈칵 눈물이 솟는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집을 돌아보고 난 뒤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에
비에 젖은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선생님의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이다. 전봉준은 1854년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전창혁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전봉준을 그리는 소리 ‘새야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불러본 노래다. 음률이 처량하기도 한 이 노래는 전봉준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난 뒤 순창으로 피해 다시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김경천 등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한성부로 끌려간 전봉준은 1895년 3월 30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는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하고 난 뒤,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이 성공하지 못하고, 양반들의 세를 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음을 한탄하는 소리이다.


조촐한 초가에서 세상을 바로잡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마을 한편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조금 안쪽에 초가로 지은 집이 보인다. 고택지에는 살림채 한 동과 헛간 채 한 동이 있을 뿐이다. 지난 날 어려웠던 살림살이가 느껴지는 집이다.




살림채는 전봉준이 살던 집으로 조선조 고종 15년인 1878년에 지어졌다. 4칸의 - 자형으로 지어진 살림채는 동쪽으로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 방인 골방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골방 앞으로는 바람막이 벽이 있고, 그 앞에는 한데 아궁이를 두었다. 큰방과 윗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달아내고, 마루 끝에는 부엌과 연결이 되는 문을 달았다.

살림채 앞에 있는 헛간채는 측간과 헛간으로 사용이 되었으며, 두 칸으로 되어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의 훈장 일을 맡아하면서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가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그저 어느 양반집 하인들의 방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허름한 가구 몇 가지가 놓여있고, 천정은 서까래와 흑이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다. 집을 지을 때 사용한 부재도 모두 인근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그러한 나무들을 이용했다.

부엌은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은 조개무덤이 가득하다. 예전 어머니들은 이 조개무덤이 부자가 될 징조라고도 했다. 집 뒤에는 장독대가 있고, 물길을 낸 골방 뒤로는 물길 위로 지나는 연도와 굴뚝이 서 있다. 연도와 굴뚝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집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설치하고 과중한 물세를 징수하는 등, 각종 명목으로 수탈을 일삼자 고종 31년인 1894년 1월, 말목장터에서 조병갑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고 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기습 점령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집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오니 우물이 보인다. 지금은 장방형 돌을 이용해 우물주변을 잘 정비를 해놓았다. 전봉준의 고택 우물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아직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조소마을 주민들이 사용하던 공동우물이다.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녹두장군. 지금은 이렇게 집과 우물만이 남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한 인물을 기억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민초들의 아픔은 채 가시지를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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