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상하리만치 고래 등 같은 기와집보다는 초가집이 마음에 와 닿는다. 아마 나더러 초가집과 기와집 중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초가집을 택할 것이다. 초가집의 역사는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신라시대의 경우 서라벌 안에는 기와집만을 짓게 했던 곳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초가가 전해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초가라 하면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집을 말하지만, 원래는 자연에서 채취한 갈대나 억새, 띠 등을 이용하여 지붕을 엮은 새나리 지붕이 그 원조였을 것으로 본다. 새나리 지붕은 비교적 수명도 길고 깨끗하기는 하지만 재료를 구하기가 힘들어 쉽게 구할 수 있는 짚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가집. 가장 정겨운 집의 이름이다.

 

그래서 농촌에서는 볏짚으로 이은 것이 많다. 그리고 기둥은 소나무, 벽면은 흙을 이용하여 집을 지었다. 볏짚은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단열과 보온성이 우수하여 많은 집들이 짚을 이용하여 지붕을 덮었다. 그러나 여름철에는 벌레가 생기며 화재의 위험이 높다는 점도 있다. 또 볏짚을 매년 한 번씩 다시 바꾸어 지붕을 이어야 하므로 번거롭기도 하다.

 

초가집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나무로 기둥을 세운 다음 벽체는 대나무나 수수로 엮어 흙벽으로 하여 지붕을 올리는 <뼈대집>, 앞쪽을 제외한 세 면을 블록처럼 찍어 만든 흙 담을 쌓아 지붕을 올리는 <담집>이다. 이러한 초가집은 한때는 가난과 게으름의 상징이라고 하여 철거를 하고, 새마을 가옥이라고 하여 양철지붕을 올리고 붉은색과 푸른색을 칠해 우리의 전통적인 미를 말살시키기도 했다.

 

요즈음에는 집단으로 초가집이 있는 곳은 민속마을이라고 하여 보존을 하기도 하는 등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새롭게 초가에 대한 아름다움을 재조명 하고 있기도 하다.

 

 

이웃의 온기가 전해지는 초가

 

난 나름대로 초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 초가 안에 아주 작고 소담한 우리 민초들의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초가의 지붕을 새로 올릴 때 용마루에 해당하는 것을 용마름이라고 하여 머리를 땋듯 엮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는 그런 기능도 연세가 드신 몇 분만이 제대로 하신다고 하니 그 기능을 전승시키는 것도 적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즈음에는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용마름을 엮는 방법 등이 소개가 되고 있어 기본적인 내용이 글과 그림으로 정리가 되어있다는 점일 것이다. 용마름이란 용을 엮어 말아 놓은 단을 말한다. 이러한 마을사람들이 모여 공동작업으로 하는 초가집 이엉엮기 등은 모두 우리의 공동체를 지켜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가 안에는 따듯한 이웃의 온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왜 지붕을 '용마름'이라고 했을까?

 

용이란 임금을 뜻한다. 아마도 나랏님을 상징하는 용을 지붕 위에 얹어, 그 보호를 받는 것을 상징한 것은 아니었을까? 용으로 지붕을 덮는 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었을 것이다. 그 예로 궁의 임금의 숙소나 왕비의 숙소를 보면 그 곳에는 용마루가 없다. 한 지붕 안에 두 마리의 용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란다.

 

즉 임금이 용이기 때문에 용 위에 또 용이 군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모든 가옥의 지붕 중앙의 가장 높은 곳을 용마루, 혹은 용마름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이란 생각이다.

 

 

이제는 단순히 서민을 상징하고 가난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그 안에서 찾는가 하면, 좀 더 우리답고 멋스러움을 찾는 초가집. 난 그래서 황토로 벽을 올리고 이엉을 엮어 용마루를 튼 초가집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짚이 부족하다고 하니 원초적인 모습대로 갈대와 억새, 띠와 칡넝쿨을 이용한 초가 한 칸을 짓고 살고 싶다.

 

가을이 되면 초가지붕 위에 무게가 나감직한 박덩이가 달린 모습을 보며 살고 싶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웃과 함께 보리밥에 직접 농사를 지은 풋고추 몇 개 따서, 된장을 찍어먹는 소박함을 맛보고 싶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다양한 모습을 만날 때마다 신비롭다는 것이다. 어떻게 선조님들은 이렇게 다양하게 하나하나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답을 얻을 수가 없다. 아마도 오랜 세월을 그렇게 조형을 한 문화재마다, 그 문화재를 조성한 장인들의 혼이 들어있을 것이란 생각 밖에는 말이다.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에 위치한 용천사는, 꽃무릇으로 유명한 절이다. 이 용천사의 가을 풍취는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다. 용천사를 찾았을 때는 꽤나 늦은 가을이었는가 보다. 절집 여기저기 아름다운 단풍이 온통 치장을 하고 있었을 때였으니. 그런 곳을 다녀오면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쉽게 잊히지가 않는 법이다.

 

작은 석등 하나, 거 참 신기하네

 

용천사 경내의 여기저기를 찍다가보니, 전각 앞에 작은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석등은 부처님의 말씀을 온누리에 펼쳐 사바세계를 밝게 비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석등은 절 경내뿐만 아니라 묘역 등에도 세우는데, 이것은 유택에 잠든 영혼의 저승길을 밝힌다는 뜻을 갖고 있다. 묘역에 세우는 석등은 장명등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석등을 바라보다 한찬 넋을 빠트리고 말았다. 크지 않은 석등이지만 일반적으로 보아왔던 석등과는 많이 다르다. 이렇게 낯선 문화재를 만날 때면 괜히 가슴이 콩닥거린다. 비밀스런 그 무엇을 찾은 기분이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작은 석등 하나가 주는 즐거움은 답사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함평 용천사의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받치는 기둥인 팔각 간석에, 강희 24년이라 음각을 해 놓았다. 조선조 숙종 11년인 1685년에 조성한 석등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한 조성연대까지 음각을 한 경우도 드문 예이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보던 석등과는 다른 용천사 석등. 그 모습이 자꾸만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간주석 거북이들, 어디까지 오르려고?

 

우선 이 석등의 머릿돌은 팔작지붕을 본떠 만들었다. 지붕의 형태도 그렇지만 처마에 부연을 달아낸 것까지 조각을 하였다. 부연 밑에는 투박하기는 해도 공포를 조각한 것도 보인다. 이런 석등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화사석은 간단한 무늬를 음각해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으며, 둥글게 창을 내었다.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간석은 연꽃문양을 조각하였다. 석등의 아랫 간석에는 두 줄을 내고 네 마리의 거북이가 매달려 있었는데, 현재는 두 마리만 남아있다. 거북이의 형태는 흡사 줄에 매달린 듯 재미난 형상을 하고 있다. 저 거북이들이 저렇게 위로 오르다가는 화사석에 낸 창 안으로 들어갔다가 불에 델 것만 같다. 혹 두 마리는 벌써 탄 것은 아닐까? 괜한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키득대본다.

 

용천사는 6·25 동란 때 불에 타서 거의 모든 유물들이 소실이 되었는데, 이 석등만은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높이 2.37m의 화강암 쑥돌로 조성된 이 석등은 투박하지만, 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현재 이 용천사의 석등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일반적인 석등과는 달리 팔작지붕을 얹고 원형의 화창을 낸 화사석. 그리고 간석에 붙은 거북의 모습 등, 조금은 매끄럽지 못한 듯한 모습으로 조성이 되었지만, 가치가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답사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문화재 하나가 주는 즐거움. 용천사 석등은 바로 그런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 문화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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