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성주사지에 소재한 보물 제19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 성주사지 중문지를 지나 석등과 오층석탑, 금당지가 일렬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한다.

 

성주사는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는 성주사를 지난 106일에 찾아보았다. 바람이 불고 간간히 빗방울도 뿌리는 날 찾아간 성주사는, 인적도 없이 고요함뿐이었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이 절의 금당 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다. 금당 터 뒤로는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에 양 우주를 새겼으며, 가운데는 탱주를 새겨넣었다.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평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도 기둥 모양인 양 우주를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가서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우아한 모습의 오층석탑

 

성주사지 오층석탑의 전체 높이는 634cm이다. 기단부와 목개석, 몸돌 등이 완만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좁아져, 우아하고 경쾌한 모습으로 균형미가 돋보인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 두었으며, 1층 몸돌에 사리공이 있다.

 

대개 신라의 석탑은 기단부 위에 삼층의 몸돌을 올리는 것이 기본이지만, 이곳이 옛 백제의 지역이므로 신라와 백제의 석탑의 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이 시기가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이므로, 새로운 양식의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형태로도 보인다. 현재는 상륜부가 사라진 오층석탑은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다.

 

문화재 보호는 개인이 할 수 없어

 

전국에 산재한 많은 문화재들은 어느 누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아니다. 문화재 보호란 해당관청은 물론이려니와, 언론, 종교단체, 사회단체, 개인 등 모든 분야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하지만 언론이나 그런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것을 종용해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는 포털 사이트 등은 아예 외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문화재보호, 참으로 소중하고 우리가 함께 책임을 져야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나 몰라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늘 문화재보호 운운하는 그런 속보이는 짓거리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정한 문화재보호를 해야 하는 것은, 그 안에 우리의 정신세계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 절을 다니면서 보면 제일 먼저 일주문을 두고, 이어서 금강문 또는 사천왕문, 마지막이 불이문 등으로 나열을 한다. 불이문을 들어서면 금당(대웅전, 극락전, 미륵전 등)을 짓고, 금당 앞에 탑, 금당 뒤에 요사채, 강당 등이 있다. 이렇게 절의 배치를 하는 것을 가람배치라고 하는데, 가람이란 범어의 승가람마(Sangharama)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약하여 가람이라 한다.

 

승가란 중을, 람마란 원의 뜻하는 것으로, 가람은 본래 많은 승려들이 한 장소에서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다. 하기에 이를 합해 중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사찰의 대표적인 구성요소로는 문과 루, 종각, 법당, 회랑, 탑 등 다양한 축조물들이 있다.

 

가람의 배치는 어떻게 하나?

 

가람의 배치란 절의 건물 배치를 말한다. 이는 탑, 금당, 강당 등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를 뜻하는 말로, 그 배치는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르다. 통일신라 때는 수많은 절이 있었다. 이 절들의 배치는 주로 일탑일금당식이나, 혹은 쌍탑일금당식의 가람 배치법을 하였다.

 

쌍탑일금당식은 일탑일금당식과 마찬가지로, 금당 앞에 동서로 불탑을 2기 세우는 배치법이다. 통일신라 8세기까지의 가람은 쌍탑일금당식으로 절이 산에 건립되었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절이 산 속으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산지가람이 발달하여, 가람 배치가 자연의 지세에 따라 건물이 건립되었다. 그런 연유로 금당 앞에 쌍탑이 두거나, 일탑일금당식, 혹은 경우에 따라 탑이 없는 무탑 절도 생겨났다.

 

많은 탑을 조성한 성주사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에 소재한 사적 제307호인 성주사지.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당시의 절들은 산골에 자리 잡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충남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석등, 보물 제19호인 5층석탑, 금당건물과 그 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26호인 동삼층석탑, 보물 제20호인 중앙 3층석탑, 보물 제47호인 서삼층석탑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성주사지는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4탑 형식의 독특한 가람배치

 

현재 남아있는 문화재와 주춧돌 등으로 본 성주사지는 웅장하였다. 중문지를 지나면 석등과 그 뒤에 웅장한 오층석탑이 서 있다. 그리고 금당지가 있고, 좌우로 동남회랑지와 서남회랑지가 있다. 동남회랑지의 뒤편으로는 삼천불전지가 자리하고 있어, 성주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가 있다.

 

 

금당의 뒤편으로는 삼층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3기의 석탑 뒤에는 강당지가 있고, 그 한편에는 석불입상이 서 있으며, 한편에서 조금 비켜선 북서쪽에 국보 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서 있다. 이러한 가람의 배치는 금당 앞에 오층석탑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일탑일금당식과 같은 가람의 배치이다. 금당 뒤편에 3기의 탑은 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 사적기에 따르면 이 금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3기의 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탑으로, 정광, 가섭, 약사여래사리탑 중 하나이며, 발굴조사 결과 딴 곳에서 가져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성주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선종 중심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9산 선문 중 하나인 성주산문은 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으며,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다. 수많은 문화재만을 남겨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성주사. 잔뜩 흐리고 바람이 부는 날씨였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음은 옛 성주사를 다시 한 번 가늠해보고자 함이다.

석탑은 대개 3층 석탑, 혹은 5층석탑 등 그 층수를 앞에 붙인다. 하지만 전북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6에 소재한 금당사의 경내에 있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인 금당사 석탑은 그냥 앞에 층수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것은 현재 남아있는 부재들로 보아, 처음에는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 석탑의 기단부는 가운데돌이 없어져 다른 돌로 대신하였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형태로 남아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꼭대기에 놓인 상륜부의 머리장식은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탑으로, 제작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호국, 항일의 절 금당사

 

삼국유사 제3권 홍법조에 보면 금당사는 신라 때 처음으로 창건된 절로 전해진다. 무상, 금취 화상이 서기 650(백제 의자왕 10)에 마이산(신라 때는 서다산, 고려 때는 용출산, 조선개국 후에는 속금산이라 불렸다)에 열반종의 사찰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금당사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이 절이 상당히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려 말에는 나옹스님이 금당사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태조 이성계가 이곳 도장굴에서 100일 기도 후,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아 조선을 개국하였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을 혈암사라고 적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주둔지로, 승병이 패퇴함에 따라 절이 전소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전봉준의 딸이 이곳 고금당에서 10여 년간 숨어 지냈으며, 1906년 윤 4월에는 호남최초의 항일의병 경사체이기도 한 장의동맹이 이곳을 진앙지로 삼았다고 한다.

 

금당사에는 보물 제1266호인 금당사 괘불탱이 전해지고 있다. 이 괘불탱은 조선조 숙종 18년인 1692년에 제작한 것으로 높이 약 9m에 넓이 약 5m 정도이다. 한국의 괘불탱 중에는 유일하게 화관에 4마리의 봉황이 그려진 화려함의 극치를 선보이고 있다. 이 외에도 전북 지방문화재 제18호인 금당사 목불좌상이 있다.

 

 

연못 가운데 서 있는 석탑

 

이 석탑은 당시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작은 형태의 석탑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석탑이 크게 파손이 되었다. 기단부도 사라져 현재는 원래의 석탑에 사용한 부재가 아닌, 딴 돌을 이용해 채워놓았다. 조선조 숙종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와 고쳐 세운 탑이다.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금당사 석탑은, 구조나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덮개돌의 밑받침은 3층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추녀는 밋밋하게 꾸며졌다. 탑의 몸돌에도 특별한 조각이 없이, 사각형의 탑신으로 올려놓은 형태이다.

 

한 때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병들의 거점으로, 승병을 키우는 곳으로,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개국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금당사. 그 대웅조번 앞쪽에 오롯이 서 있는 금당사 석탑, 그 석탑은 금당사의 역사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까? 무더운 날 찾아간 금당사에서 만난 석탑 한기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

이천시 관고동 401-2에 소재한 이천시 향토유적 제5호인 관고리 오층석탑’. 이천 도자기 축제장이 있는 설봉공원 안쪽, 관고리 저수지 안을 지나 토야랜드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탑의 형태나 규모로 보아서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되는 이 오층석탑은 훼손이 심해 거의 원형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 탑이 발견이 된 곳은 관고리 저수지 위편 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석재를, 1978년에 수습하여 옛 절터 앞에 복원을 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석재들이 흩어져 있던 곳을 절터라고는 하지만, 어떤 절이었으며 어느 시대에 창건된 것인지 등은 알 수가 없다. 또한 현재 이 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도, 원래의 탑이 있던 자리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훼손이 심한 오층석탑

 

탑은 한 마디로 훼손이 너무 심해, 이 탑의 원형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또한 밭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아 쌓은 탑으로, 한 기의 탑의 석재인지도 불분명하다. 현재의 탑은 기단부와 일층 몸돌이 있고, 그 위에 지붕돌인 옥개석을 오층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다. 만일 이 오층석탑의 석재들이 한 기의 탑이었다고 하면, 상당히 장엄한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탑들은 대개가 장엄하다. 그것은 옛 고토를 회복하려는 뜻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관고리 오층석탑의 경우에도 현재 몸돌이 사라진 채로 쌓아올린 높이만 보아도,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가 있다. 현재의 오층석탑은 탑의 상륜부는 존재하지 않고, 전체적으로는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훼손이 심하다.

 

고려 탑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기단은 일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위에 4매의 돌을 이용해 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기단의 덮개돌은 일석으로 조성을 했으며, 기단 덮개돌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기단의 돌에는 양 우주를 표현하였으며, 덮개돌의 윗면에는 탑의 몸돌을 받을 수 있는 괴임부분을 층이나게 표현하고 있다.

 

몸돌은 1층만이 남아있는데 이것도 1층의 몸돌인가는 정확치가 않다. 몸돌 위에는 5층의 덮개동인 옥개석을 쌓아 올렸는데, 그 크기는 층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있다. 층급은 1층의 덮개돌은 4단으로 표현하고 있고, 2층부터 5층까지의 층급은 각각 3단이다. 덮개돌의 높이는 1층서부터 150cm, 122cm, 100cm, 74cm, 70cm로 줄어들고 있다.

 

 

현재의 몸돌이 사라진 채 높이가 4.3m에 이르고 있는 점으로 보아, 원래의 이 관고리 오층석탑의 높이는 7~8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비교적 넓고 평평한 편이다. 옥개석의 하면에 낙수 홈이 없는 것도 이 탑의 특징이다.

 

전체적인 규모에서 고려의 힘을 느끼다

 

44일 오후에 찾아간 관고동 오층석탑. 그저 하나의 조형물처럼 저수지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은, 멀리서 보아도 그 규모가 상당해 보인다. 2층 이상의 몸돌이 사라졌고 상륜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상당하다. 전체적인 규모로 따진다면 상당히 거대한 석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탑의 8m정도가 된다고 하면, 기단석이나 1층에 올려놓은 몸돌의 형태로 보아 비례가 잘 맞지는 않을 듯하다. 이런 탑의 형태는 대개 지방에 거주하는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이 되어있지만,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상당히 위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고려의 석탑에게서 느끼는 강인함이, 관고리 오층석탑에서도 보인다. 이렇게 탑을 장엄하게 조성을 한 것은,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탑 하나를 갖고도 느낄 수가 있는 옛 고려의 염원. 오늘 관고리에서 다시 한 번 그 기운을 받아간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숱한 문화재를 찬탈해간 일제는, 우리의 수많은 문화유산에 어지간히 욕심을 내었던 것만 같다. 그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예, 조선 전체를 들고 가지 그랬어!”라는 말이다. 그런 말이 하고 싶을 정도로 일제는, 우리 문화재를 수도 없이 일본으로 가져갔다.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뒤뜰에 서 있는 보물 제276호인 발산리 오층석탑. 지금은 오층은 사라지고 사층만 남아있다. 이층의 기단위에 세운 이 오층석탑은 원래는 완주군 고삼면 삼기리 봉산사 터에 남아있던 석탑이다. 이 석탑을 군산 개정면에 농장을 갖고 있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오층석탑

 

아마도 처음에는 이 석탑도 오층이었을 것이다. 그런 탑의 맨 위층이 사라졌다는 것은, 다 들고 갈 수 없어, 그 위층만 가져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석탑은 신라 탑의 모양을 본 따 제작한 우수한 석조공예품이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간결하게 정리가 된 고려 탑의 조형미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탑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졌으나, 그 후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를 옮겨 딴 곳에 터를 잡고 있지만, 이 석탑과 석등은 제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 소재가 분명한 것을 이렇게 엉뚱한 곳에 놓아둔다는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옥개석의 아름다운 곡선에 반하다.

 

발산리 오층석탑은 받침돌은 신라 석탑을 모방하였다. 네 개의 기둥을 새긴 몸돌인 탑신석과 머릿돌인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을 하였다. 삼단 받침으로 꾸민 지붕돌은 끝이 약간 위로 치켜져 있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백제탑의 양식이 화려하고, 신라탑의 모습은 장중하다고 한다. 고려 초기의 석탑의 형태를 보면 이런 백제탑과 신라탑의 형태를 모방해,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탑의 형태를 창출해 내었다.

 

 

그 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지붕돌인 옥개석의 추녀 끝이다. 마치 한옥의 처마가 치켜 올라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내듯, 그렇게 엷은 곡선을 그리고 있다. 자칫 딱딱한 석조 조형물인 석탑을, 그 곡선하나가 여유로움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지붕돌에서 보이는 처마 끝이 올라간 곡선이 고려탑의 특징이다.

 

투박한 이층기단을 몸돌이 살려내다

 

발산리 오층석탑은 이층의 기단 위에 오층을 올린 탑이다. 이층의 기단 중 아래기단은 삼단의 낮은 단으로 쌓았는데, 그 낮은 기단 안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하였다. 고려의 석조물에서 보이는 안상은 보이지 않는다. 상층 기단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 장의 돌로 표현을 하였다. 상층 기단의 몸돌에는 우주를 표현하고, 지붕돌인 덮개돌은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그런 형태가 탑의 몸돌과 구분이 된다.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을 한 오층석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그 꾸밈새 안에는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자칫 기단의 투박함이 몸돌이 표현한 부드러움에 묻혀있다. 돌을 이용한 탑을 조성하면서도, 나름 그 아름다움을 창출해 낸 고려탑. 그 처마 선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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