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은 영월 땅에서 어린 나이에 삼촌인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영월에서 멀지 않은 영주 땅에서는, 수양대군의 친 동생인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라는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가 끝내는 죽음을 맞았다.

 

그 슬픈 역사의 장소인 금성단.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70번지 일원에 자리한 사적 제491호 영주 금성대군 신단. 한 많은 세월을 살다가 간 금성대군 역시, 권력에 의해 불행하게 일생을 마친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다. 소수서원에서 부석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좌측에 금성제군 신단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위리안치지에 세운 금성대군 신단

 

사적 제491호인 금성대군 신단은 세조 2년인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가 되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 당한 곳이다.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순흥부사 이보흠과 향중 유림들과 더불어,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순절을 하였다. 금성대군 신단은 바로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마련된 제단이다.

 

단종복위를 꾀했다는 이유로 순흥부는 폐부가 되었다. 그 후 숙종 9년인 1683, 200여년이 훨씬 지난 다음에 순흥부가 복원이 되고, 순절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제단을 꾸몄다. 숙종 19년인 1693년에는 순흥부사 정중창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 당했던 자리에 제단을 쌓았고, 숙종 45년인 1719년에는 부사 이명희가 삼단으로 고쳐쌓았다.

 

그 후 영주 18년인 1742년에는 경상감사 심성희가 처음 자리에서 서쪽으로 30~40보를 옮겨 단을 정비하고, 순의비를 세웠다. 그때부터 관리사를 지어 매년 봄 가을에 제향을 지낸다.

 

 

 

찾는 이 하나 없어 외로운 신단

 

금성제군 신단을 찾은 날은 마침 제각을 도배하고 있었다. 집은 여기저기 도배를 하느라 정리가 되어있지를 않아 단으로 올랐다. 문을 들어서니 양편 담장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자른 흔적이 보인다. 오래된 고목인 듯한데, 왜 잘라내었을까? 돌담을 두른 제단에는 중앙에 금성대군지위란 쓴 상석이 보이고, 양편에는 부사이공보흠지위제의사지위라 음각한 상석이 있다. 금성대군의 상석 곁에는 유명조선 단종조충신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라 음각한 순의비가 서 있다.

 

넓지 않은 금성단. 푸른 잔디들이 애써 그 푸름을 자랑하지 않는 것도, 아마 그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싫어서는 아니었을까? 차가운 상석 하나 남겨놓고 사라져간, 그런 슬픔은 아니었을까? 찾아주는 이도 없고, 아무도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를 눈여겨보지도 않는다.

 

 

 

 

그저 길 앞으로 하루 종일 오가는 그 많은 차들도, 이곳에 멈추지도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외로움은 마찬가지인지. 아마 그 혼백은 아직도 위리안치의 고통에서 가시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근처 고목에서 까치 한 마리가 시끄럽게 울어댄다. 모처럼 들린 객을 반기는 것인지.

 

근처에 위리안치지도 조성해

 

금성대군신단은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된 유적으로 18세기에 탕평정치의 움직임이 활성화됨에 따라 국왕에 대한 의리가 다시금 강조되는 정치적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당대 왕조의 인신(人神)을 위한 제단의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사적지로 지정을 받아 관리가 되고 있지만,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금성대군의 위리안치지를 조성해 놓은 곳이 있어 마음이 더욱 애잔하다. 위리안치,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친 동생까지 죽여야 했을까? 위리안치는 왕족의 형벌 가운데서도 가장 독한 형벌로 알려져 있다.

 

 

금성대군의 위리안치지. 금성대군 신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성을 해 놓았다. 초가지붕 밑으로는 구덩이를 파고 돌로 벽을 둘렀으며, 그덩이 외부로는  탱자나무를 촘춤히 심어 놓아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구덩이를 파고 그 벽을 돌로 에워 쌓고 구덩이 주변은 모두 탱자나무를 촘촘히 심어 놓는다. 구덩이에서는 벽에 기댈 수도 없다. 땅은 축축해 앉아있기도 힘들다. 구덩이 밖으로 나온다고 해도 탱자나무를 촘촘히 심어놓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있다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친형에게 위리안치라는 극악한 형벌을 받고 결국엔 목숨까지 잃어야했던 금성대군. 이곳을 들릴 때마다 마음이 아픈 것은, 권력은 형제도 죽일 수 있다는 역사의 아픔 때문이다. 지금도 별반 다를 것은 없지만 말이다.

당간이란 절에서 커다란 행사를 할 때 내거는 깃발을 말한다. 대개는 절 입구에 당간을 내 걸게 되며, 이 당간을 거는 지주 대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당간을 세우는데 필요한 버팀기둥인 당간지주는, 돌을 양편에 세우고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워 당간을 고정시킨다.

 

과거 전국의 있는 절집을 찾아가면 이 당간을 만날 수가 있다. 당간은 대개 나무나 돌로 만들어 세우는데, 어느 곳에는 철로 만든 당간이 있는 곳도 있다. 국보 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은 당간지주를 세우고, 깃대를 세우는 당간을 철로 만들었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에 자리한 용두사지는 고려 광종 13년인 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 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된 절이다.

 

부석사 입구에 선 당간지주

 

지금은 국보로 지정된 철당간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라지만 이 철당간의 위용으로 보아 당시 용두사가 어떠한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17에 소재한 부석사. 많은 국보와 보물이 있는 부석사 입구에 서 있는 이 당간지주는 보물 제25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는 이 당간지주는,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양쪽의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으며,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다. 옆면에는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통일신라 전기에 세운 당간지주

 

천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부석사의 입구에 서서, 부석사를 드나드는 많은 인간들을 비켜보았을 당간지주. 높이 2.28m의 부석사 당간지주는 양 기둥의 꼭대기에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호선을 그리며 외부로 꺾어졌다. 이 호선은 1단의 굴곡을 두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이 밋밋하다.

 

이 굴곡부에서 당간지주 사이에는 아름다운 연꽃을 조각한, 원형의 간대석이 놓여 있다. 앞뒷면이 중앙에 종선문이 내려오고, 정상부에는 2단의 아름다운 원호가 경사진 형태로 조각이 되었다. 측면에도 3조의 종선문이 있다.

 

 

부석사 당간지주는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당간지주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그 오랜 시간을 풍화에 노출이 되어있었으면서도,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부석사의 당간지주를 만나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이 절집을 드나들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당간지주 앞에 서서 합장을 하고 얼마나 많은 서원들을 했을까? 그리고 그 서원들이 모여, 이 당간지주가 천년을 넘기면서도 이렇게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다. 아마도 앞으로 또 천년, 부석사의 당간지주는 그렇게 손들을 맞을 것이다.

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경내에 자리한다. 국보 제1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무량수전 앞에 서 있다고 하여,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이라고 명명하였다.

 

석등은 흔히 ‘광명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석등은 절의 가장 중요한 곳인 대웅전 앞이나 탑과 같은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간주석과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단아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석등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석등은 문화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고 해도, 그 균형이 잘 맞는다고 느낄 정도이다. 4각으로 조성한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 기중인 간주석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간주석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인다.

 

간주석의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받침돌의 끝마다 조각한 귀꽃이 더 없이 아름답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이 보살상들은 금방이라도 불을 밝히고 석등을 빠져 나올 것만 같다. 그만큼 이 석등은 간결하면서도 조각 하나하나가 세련된 미를 자랑하고 있다.

 

뛰어난 균형미에 아름다운 선

 

지붕돌도 역시 8각이다. 지붕돌은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 부석사 석등은 그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무량수전 측면에서 석등을 바라본다. 하늘 끝과 맞닿은 안양루와 석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아마도 이런 멋진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석등이 가장 아름답다고 표현을 하는가 보다. 그 앞에서 걸음을 땔 수가 없다. 언제 또 이곳을 들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인지.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재를 하나하나 만날 때마다 항상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이렇게 문화재 답사를 할 수 있도록 내가 답사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만일 이렇게 전국을 돌아다니지를 않았다면 생활은 좀 더 편했겠지만, 우리 문화재에 대한 고마움은 느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례석의 조화로움

 

자칫 석등에 빠져 그 앞에 놓인 배례석을 놓칠 수도 있다. 석등 앞에 놓인 배례석은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답다. 네모난 일석으로 조성을 한 배례석은 윗면에 커다란 연꽃 한 송이를 돋을새김 하였다. 그 밑으로는 조금 층지게 파 들어가서 둘레를 안상을 새겨 넣었다. 밑 부분은 밋밋하게 표현을 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잡혀있다.

 

영주 부석사에서 만난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석등. 크지 않은 석등이지만, 그동안 만나왔던 수많은 석등보다 월등히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늘 길 위에 서 있는 것이지만.

노송 몇 그루가 만들어 내는 멋진 풍광. 그리고 주변으로 흐르는 물과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빼어난 주변경관과 무슨 이야기 하나 있을 듯한 분위기. 바람과 물, 송림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만들어 내는 곳. 이런 곳이 바로 누정를 짓는데 꼭 필요한 요건이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 입구를 들어서 송림 사이를 지나는 길, 하늘 높게 자란 노송들이 즐비하다. 열을 맞추어선 노송 사이를 지나면서 깊은 호흡을 한다. 솔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런 좋은 송림에서 사람들은 노송의 자태를 닮아 푸른 마음을 가졌던 것일까?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 건너다보니, 내를 건너 노송 몇 그루와 함께 어우러진 정자가 보인다.

 

 

500년 세월 고고한 자태를 지니다


취한대, 조선조 명종 5년인 1550년, 당시 풍기군수이던 이황선생이 처음으로 지은 정자다. 이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고, 소수서원의 원생들이 시를 지으면서, 청운의 꿈을 키우도록 한 것이다. 누구인들 이 아름다운 풍광에 젖지 않았을까? 아마도 이런 곳에 지은 이 취한대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풍운의 끔을 안고 큰 발걸음을 옮길 수가 있지 않았을까?


취한대를 오르기 위해 내를 건너간다. 물살이 흐르는 곳에 시멘으로 넓적하니 징검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내를 건너 천천히 취한대를 향한다. 그저 바쁜 일이 없다. 이 절경에 나를 맡겨본다. 그것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길이다. 바쁜 걸음을 걷다가도 이런 곳을 만나면, 그저 시간을 붙들어 놓은 듯 여유를 부릴 수가 있다.

 


바쁠 길 없는 여정, 서낭에 돌을 놓다


가는 길에 보니 서낭이 있다. 예전 이 내 곁으로 난 길을 따라 걷던 사람들이, 여정의 평안함을 위해 돌 몇 개를 올려놓고 안전을 빌었을 것이다. 서낭 주변에는 금줄이 처져있는 것을 보니. 주변 마을에서 이곳에 제라도 지내는 모양이다. 아마도 오랜 시간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했을 것이다. 


주변에 구르는 돌 하나를 집어 서낭에 던진다. 돌과 돌이 부딪치며 내는 "딱" 소리가 경쾌하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서낭을 만날 때마다 돌 하나라도 더하고 간다. 그 숱한 여정의 무탈을 위하는 마음에서이다.

 

 


정자는 보수를 하였는지 말끔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맨살을 드러낸 나무들이 소수서원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주변의 소나무들이 오히려 이 맨살의 나무들을 더 아름답게 치장을 해주는 듯하다.


호연지기를 키우는 정자, 취한대


‘취한’이란 맑은 물 푸른 솔과 함께 호연지기를 키우라는 뜻이다. 이렇게 맑은 물이 흐르고 노송이 푸르른 자태를 자랑하는 곳이라면, 그 누군들 호연지기를 키우지 않으리오. 아마 젊은이들이 이 취한대를 자주 찾아드는 것도 그런 꿈이 있기 때문인가 보다.


취한대를 보고 있는데 젊은 남녀들이 앞을 질러간다. 취한대 마루에 앉아 담소를 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세월은 지나고 사고는 달라져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나보다. 젊은이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옛 소수서원의 원생들도 이들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시를 짓고 세상을 논하고 자신을 알아가고, 아마 그런 꿈을 만들었을 것이다.

 


취한대의 모습에 녹아본다. 저 대들보 위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젊음의 이야기가 쌓여있을까? 그 이야기를 훌훌 털어내어 한 아름 엮어내고 싶다. 그 이야기들을 오늘 꿈을 잃어버리고 대학이라는 문을 향해 달려가고만 있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왜? 탱자가 익어가는 가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을 가? 이상한 사람이구만’ 그래 난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려, 안 가고는 견디질 못한다. 나하고 순흥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순흥은 경북 영주시에 속한다. 순흥에는 유명한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순흥을 왜 술병을 들고 찾아갈까?

소수서원은 조금 지나면 금성대군 신단이 있다. 그곳을 조금 지나 좌측 마을 길 안으로 들어서면, 내가 가을마다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다. 이 계절, 탱자가 익어가는 계절만 되면 그곳을 찾아가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허허로운 벌판의 땅굴 속에서 죽어간 금성대군 때문이다.


32세에 처형이 된 불귀의 원혼

금성대군은 이름이 유이며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종의 숙부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세종 15년인 1433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복위하자 형 수양과 함께 단종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수양이 왕위에 오를 야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한다.

단종 3년인 1455년 금성대군은 모반을 했다는 협의를 뒤집어쓰고, 현 경기도 연천인 삭녕으로 유배가 된다. 세조 2년인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를 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이곳에 와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을 당한다.



위리안치, 그 통한의 형벌이여

조선시대 형벌 중에 유배형에 해당하는 것은 부처와 안치가 있다. 부처란 유배형을 당한 죄인이 부인과 함께 유배지에 머물며 생활을 하는 형벌이다. 안치란 부처형을 받은 죄인이 왕족이나 고관일 경우, 유형을 받은 장소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시키는 형벌제도이다. 아마도 처음 이곳 순흥에 온 금성대군은 단순한 안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치에도 종류가 있다. 고향 등으로 행동을 제한시키는 본향안치. 육지와 떨어진 절해고도에 안치를 시키는 절도안치. 그리고 가장 중형에 속하는 위리안치이다. 위리안치는 형벌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형벌이라고 한다. 큰 죄를 범한 죄인을 허허벌판에 돌우물 같은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이다.




이곳 순흥에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 남아있다. 위리안치는 그야말로 인간을 말려죽이기에 적당한 형벌이다. 장정의 키보다 높은 돌 웅덩이 안은 지름이 2m가 조금 넘을만한 둥근 형태이다. 그 안은 맨바닥이고, 어디 편하게 기댈 수조차 없다. 사방이 모두 돌로 쌓여 있으니, 벽에라도 기댈라치면 배기기 일쑤이다.

거기다가 인근에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바닥은 축축하다. 어디 한 곳 발을 뻗고 편히 몸을 누일만한 곳이 없다. 지붕은 비를 피하도록 덮었다고 하지만, 비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웅덩이 안으로 물이 차 들어올 것이다. 웅덩이 밖으로 나간다 해도 도망을 갈 수가 없다. 위리안치지 주변이 모두 탱자나무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촘촘히 심어 놓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어떻게 빠져 나갈 것인가? 가시에 온 살이 찢겨도 빠져 나가지를 못한다. 나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입구뿐이다. 그곳은 더욱 나갈 수가 없다. 결국 처형을 당할 때까지, 그 습한 웅덩이에서 발 한 번 제대로 뻗지 못하고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그것이 위리안치이다.

오늘 이 술 한 잔으로 몸이나 녹이시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순흥을 간다.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죄 없이 역사의 제물로 희생이 된 분에게 너무 죄스럽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처음으로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찾아간 곳에서, 역사의 아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월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술 한 병을 사들고. 그 뒤 10월이면 이곳을 간다. 요즘 사극이 인기를 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재미로 보는 사극 뒤편에는 이런 엄청난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술 한 잔 따라놓고, 넋두리를 해댄다. 세상을 달라졌다고 해도, 아직 대군의 통한의 아픔을 따라 사는 자들은 그치지를 않았노라고.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으로 길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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