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은 많은 이름이 전한다. 장승, 장생, 장성, 수살, 수살목, 돌하루방, 벅시, 벅수 등 지역마다 그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긴다, 마을 입구에 선 장승은 나무나 돌을 깎아 마을 입구에 솟대나 돌탑과 함께 세우지만, 장승만을 별도로 세우는 경우가 많다.

원래 장승은 절 입구에 세워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경게표시를 하는 표시장승이 시초였다. 그러던 것이 점차 마을을 지키는 수호장승의 역할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장승의 역할은 표시장승, 수호장승, 그리고 길을 안내하는 로표장승 등으로 구분을 할 수가 있다. 장승의 복판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등 기본적인 대장군이 가장 많지만, 동방청제축귀대장군, 상원주장군 등 마을마다 각기 특징적으로 적기도 한다.



내를 건너 좌측에 서 있는 석장승. 왕방을 눈에 주먹코가 해학적이다.

모두 남자뿐인 실상사 장승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소재한 실상사. 실상사 경내를 들어가려면 작은 내 하나를 건너게 된다. 그런데 이 내를 건너기 전에 좌측을 보면 석장승 한 기가 서있다. 이 장승은 다리를 건너면 좌우에 또 한 기씩의 석장승이 서 있다. 원래는 다리를 건너기 전과 건넌 후에 두 기씩 모두 네 기의 장승이 서 있었으나, 1936년 홍수에 한 기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장승은 일반적으로 남녀 한 쌍을 세우거나, 남녀를 구분해 양편에 집단으로 세운다. 그러나 실상사 석장승은 모두 남자이다.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눈은 왕방울 눈이 튀어나왔다. 입에는 양편에 송곳니가 솟아나오고, 코는 주먹코가 얼굴에 비해 커다랗게 표현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절을 지키는 장승이라기 보기에는 해학적이다.



내를 건너 우측에 선 장승. 건너편에 있는 장승과 길을 사이에 마주한다.

300년 전에 절의 수호를 위해 세운 장승군

절 입구에 세우는 장승은 신성한 지역을 알리기 위한 표시장승이다. 즉 이곳서부터는 절의 경내이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상사 입구에 서 있는 장승은 표시장승이라고 보기보다는 수호장승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상사가 평지에 자리하고 있고, 앞으로는 내가 있어 물과 불 등에서 실상사를 지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실상사 석장승은 장승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조선조 영조 1년인 1725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300년이 다 되어가는 장승들이다. 사방에 세운 장승의 형태는 거의가 같은 모습이다. 한 기가 없어져 버린 실상사 장승은 절을 수호하는 험상궂은 장승이기 보다는, 해학적인 모습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 생긴 모습이 재미있다. 세 기가 남은 석장승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조성이 되었다.


짝을 홍수에 잃은 다리를 건너기 전 좌측에 있는 장승
 
볼수록 웃음이 나와

땅위로 솟은 장승의 높이는 2.5m ~ 2.9m 정도이다. 너비는 40~50cm 정도이며 모두 남장승으로 비슷한 형태로 조각이 되었다. 모자 밑으로는 불거진 이마가 있고, 눈은 왕방울 눈이다. 양편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코는 커다란 주먹코인데 코가 차지하는 면적이 넓다. 그 밑으로는 금방이라도 이를 보이며 웃을 것만 같은 입이, 일자로 표현되었다. 두 기의 장승은 송곳니가 보인다.

중요민속자료 제15호인 실상사 석장승. 비가 오는 지난 11월 27일에 찾은 석장승은 한기가 홍수에 떠내려가서인가, 조금은 한편이 빈 것처럼 허전히다. 실상사를 찾을 때마다 보는 장승이지만,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간다. 아마 그 해학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이 석장승이 절을 지키는 수호장승이라고 한다면, 그 모습 속에는 어느 맘씨 좋은 절집의 불목하니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따스함과 웃음이 배어있는 것이지만.

공주 공산성 안에 들어가면 '쌍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사방에 모두 훤히 트여 주변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든 개방형 정자이다. 이 곳 주변에는 유난히 큰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 쌍수정이란 정자의 명칭도, 주변에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붙여진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쌍수정은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정자는 영조 10년인 1734년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인조 2년인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인조가 공산성에 머물르고 있을 때,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 밑에서 반란의 진압소식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두 그루의 나무가 있던 자리에 세운 정자

'이괄의 난'이 평정이 되고 인조가 난 후, 인조는 이 나무에 정삼품인 통훈대부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아마 답답한 마음을 함께 풀어준 나무가 고맙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의 이름도 쌍수성이라고 부를 것을 명하였다. 영조 때에 관찰사 이수항이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정자를 지어 '삼가정'이라고 불렀는데, 이 정자가 바로 지금의 쌍수정이라고 한다.

이 쌍수정과 공주에는 재미난 설화가 전한다. 바로 인절미에 관한 이야기다. 인절미는 찹쌀떡에 고물을 묻힌 떡이다. 네모나게 만든 인절미는 차지기 때문에, 몇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이 인절미가 인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공주를 '인절미의 고장'이라 부르는 것은 왜일까?




인조의 배를 불려준 인절미

인조 2년인 162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인 이괄이 난을 일으켜, 당시 한양까지 밀고 내려왔다. 인조는 피난 길에 올라 공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황급히 떠난 피난 길에 먹을 것이 제대로 준비될 리가 없다. 피난 길에 공주 우성면 목천리 근방을 지나게 될 때, 근처의 임씨 댁에서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왕에게 진상을 하였다.

시장기가 돌았던 왕이 보자기를 열고보니, 콩고물을 가득 묻힌 떡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인조는 이 떡을 한 입 베어물었다. 배가 고픈차에 먹었으니 그 맛이 얼마나 좋았으랴. 몇 개를 먹고 난 인조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떡 이름이 무엇이냐. 참 맛이 있구나"
"...."
"아니 이 떡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단 말이냐. 그럼 이 떡을 누가 가져왔느냐"
"예! 임씨댁에서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 이 절미의 떡을 임씨댁에서 만들어왔단 말이지. 그럼 이 떡을 오늘부터 임절미라고 불러라"

임씨댁에서 만든 맛있떡이라 하여 '임절미'라고 부르던 것이 후에 인절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쌍수정을 오르는 계단 앞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있다. 공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노라면 시장끼도 드는데, 이럴 때 인절미라도 파는 곳이 있다면, 더욱 인절미에 대한 추억이 남다를 텐데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쌍수정 위에 올라 더운 날씨에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앉아있는데, 한 무리의 아이들이 찾아든다. 문화해설사가 인솔을 해수정에 오른 아이들은 연신 설명을 들으면서 무엇인가를 적고 있다. 현장학습이라도 나온 것일까? 저렇게 우리 문화재에 대한 열심인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문화재를 찾아 다닌지가 벌써 25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그 많은 문화재가 다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훼손이 된 문화재가 마음을 아프게도 하다. 하지만 저 아이들을 보니 괜한 우려였나보다. 저런 마음을 가진 아이들은 우리 문화에 대해서 남다른 마음을 갖고 있을 테니.



인절미도 그 엣날 인조대왕이 애절하게 소식을 기다리던 커다란 나무도 사라졌지만. 이렇게 이야기가 남아 전해지고 있는 쌍수정. 그래서 나그네의 발길은 또 다른 길을 찾아 떠나는가 보다. 문화와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 기다리고 있기에.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