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산재한 수 많은 고택 답사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참으로 많다. 어디는 사랑채가 너무 멋이있어 그곳을 떠나기가 싫을 정도였는가 하면, 집 안에 자리한 정자의 아름다움에 매료가 되어 몇 시간을 늘어지게 자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고택들을 둘러보면서 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많은 글들이 올라오지만 정작 집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대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문은 집안의 귄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집의 대문을 보면 그 집안의 내력을 대개는 이해할 수가 있다. 하기에 대문은 그 집을 돌아보는데 있어, 가장 먼저 만나게 되지만 그만큼 눈여겨 보아야 할 곳이기도 하다. 어딜가나 만나게 되는 많은 고택들. 과연 그 대문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대문을 만나보기로 하자.

중요민속자료 제196호 충남 아산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

솟을대문은 위엄있는 사대부가의 상징


솟을대문이란 중앙에 높게 지붕을 올리고 그 양편을 낮게 만든 대문을 말한다. 이 솟을대문은 대문 양편을 얼마나 크게 조성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집안의 내력을 가늠할 수도 있다. 대개는 지방의 세도가와 양반가의 대문에 즐겨 사용을 했으며, 솟을문 옆으로는 하인들이 묵는 문간채와 헛간, 마굿간, 광채 등이 함께 자리를 잡는다. 솟을대문의 모습은 어떤 형태인지 살펴보자.





맨 위는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 소재한 충남 민속자료 제7호인 이삼장군 고택 대문이다. 이삼(1677~1735) 장군이 이인좌의 난(1728)을 평정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하사 받아 지은 집이다. 이 대문은 기단을 높게 쌓고 그 위에 솟을대문을 두었다. 대문 옆으로는 하인이 사용하는 문간방을 들이고, 그 굴뚝을 대문 밖으로 빼냈다. 헛간과 마구간이 있는 비교적 단아한 형태의 대문이다.

두 번째는 충북 음성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141호인 김주태 가옥의 솟을대문이다. 이 대문은 사랑채에서 내려다 본 안쪽의 모습이다. 김주태 가옥은 약 300년 전에 이익이 세운 집이라고 전하지만, 안채는 19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솟을대문은 마을의 길과 같은 높이로 놓이고, 대신 사랑채가 3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자리하고 있다. 대문의 양편은 모두 광채로 사용을 하고 있으며, 밖에서 대문의 우측을 보면 쪽문이 있다. 즉 아랫사람들은 대문을 열지 않고 출입을 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세 번째는 전북 정읍시 산외면에 소재한 중요민속자료 제26호인 김동수 가옥이다. 99칸의 대저택인 김동수 가옥의 솟을대문은 전국의 고택 중에서도 그 규모가 큰 대문이다. 이 대문채에는 방과 광, 마구간 등이 나열되어 있으며, 끝 부분은 꺾어서 ㄱ 자 형태로 꾸몄다. 김동수 가옥은 집 밖에 호지집이라고 하는 별채를 둘 정도로 지역에서 대부호로 꼽히는 집이기도 하다.

맨 아래는 경주의 독락당 솟을대문이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계곡가에 자리하고 있는 독락당은 보물 제4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독락당은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를 말한다. 이 집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독락당의 솟을대문은 화려하지가 않다. 그저 중앙을 높이고 양편을 낮게 해 담을 판벽으로 하였다. 선생의 심성을 그대로 닮았다는 생각이다.

솟을대문의 극치 함양 정여창 가옥



솟을대문의 극치는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의 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인 일두 정여창 고택(정병호 가옥)에서 만날 수가 있다. 일두 정여창 선생은 조선조 5현의 한 분으로, 이 집은 선생이 타계한지 1세기 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3,00여평의 대지가 잘 구획된 12동(최초에는 17동이라고 전한다)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 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으로, 솟을 대문에는 충. 효 정려 편액 5점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초가가 정겨운 작은 대문

기와에 주로 나타나는 대문은 솟을대문이 주를 이룬다. 이것은 그 집의 위세를 떨치고자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분의 차이가 뚜렷한 조선조에서는 이러한 대문의 형태가 곧 그 집안의 가세와도 관계가 지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안과 관계없이 초가에 묻혀 세상을 살아간 반가의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집들은 대개 작은 일각문을 사용하는데, 기와집에서도 이런 형태는 보이고 있다.


충북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48호인 정원태 가옥이 있다. 이 집은 초가로 지어졌으며, 초가집에서는 가장 큰 사랑을 갖고 있다. 그 사랑 옆으로 작은 초가로 이은 일각문이 있는데, 이 문이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의 구실을 한다. 옛날에는 바깥 담장이 있고 그 곳에 대문이 있었는지는 정확지 않으나, 현재 이 집에서 살림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로는 이 초가 일각문이 대문이라고 하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정원태 가옥은 남도지방과 중부지방의 가옥의 형태가 습합되어 있다.


별다른 문이 없는 너와집

집은 여러 형태로 지어진다.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살고 있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달라진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가면 중요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이 된 너와집이 있다. 굴피나무를 잘라 지붕을 인 이 너와집은 '느에집' 혹은 '능에집'이라고도 부른다. 이 집들은 따로 대문이 나 있지가 않다. 집 자체가 간단한 구조로 꾸며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화전민들의 집이기 때문에 집 안에서 모든 일을 다 보아야 한다. 그래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문 자체가 대문의 역할을 한다.


가장 아름다운 대문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가장 아름다운 대문은 어던 것일까? 솟을대문도 아니고, 기와나 와가의 대문도 아니다. 대문은 그 집을 드나드는 곳이다. 그 문으로 사람도 드나들고, 수 많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들어가고 나간다. 하기에 그 문으로는 그 집의 모든 복락이 드나드는 곳이라고도 한다. 전국의 많은 집을 찾아다니면서 만난 가옥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집은 증평에 있는 연병호 생가이다.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연병호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연병호 선생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자손들에게 남겨준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단지 다 쓰러져 가는 집 한채 뿐이다. 

 

석곡리 마을 길 한편에 자리 잡은 연병호 생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계단으로 오르면, 싸리문이 손을 맞이한다. 이 싸리문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문이란 생각이다. 이 문은 평생을 나라만을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난 연병호 선생이 드나들던 문이기 때문이다.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들. 그 문에는 제각각 그 뜻이 깃들어 있음을 본다.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연병호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연병호 선생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이런저런 재산을 마련할 때도, 태어난 생가 한 채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도대체 연병호 선생이 태어나고, 만년에 다시 돌아와 살았다는 생가는 어떠한 모습일까?

 

 

 

초라한 집을 만나는 순간 눈물이 흘러

 

석곡리 마을 길 한편에 자리 잡은 연병호 생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계단으로 오르면, 싸리문이 손을 맞이한다. 안에는 모두 네 칸으로 마련된 초가가 한 채 있을 뿐이다. 지금은 마당 앞에 연병호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석비가 서 있지만, 이렇게 생가지가 정비되기 전에는 정말로 초라한 민초의 집이었을 것이다.

 

정남향으로 서 있는 초가는 네 칸이다. 좌측 세 칸은 방으로 드리고, 우측의 한 칸은 부엌이다. 정면 네 칸, 측면 한 칸 반으로 꾸며진 집은, 그저 어느 깊은 산골 외딴집을 보는 듯하다. 꾸미지도 않은 초가는 사람이 겨우 살아 갈만하다. 말이 집이라고는 하나, 이 집이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분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어이가 없다. 눈물이 흐른다. 지금의 내 신세를 탓하기 전에, 선생의 그 살아오신 일생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부인과 자녀들이 함께 생활을 했을까? 초라한 집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부인과 자녀들의 마음 씀씀이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아마 선생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 가족들 역시 함께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집에서 한 가족이 함께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평생을 나라 위한 마음으로 산 연병호 선생

 

연병호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자는 순서이며 호는 원명이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맏형인 병환을 뒤따라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상해임시 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 온 후에는, 임시정부의 후원과 국제외교를 위해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다. 1921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북경에서 독립혁명당을 조직했으며, 이듬해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됐다.

 

1937년에는 일본 관헌에게 체포돼 조선총독부로 인계된 후, 8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과 공주 감옥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이 되고 난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1948년 제헌국회의원과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제헌의원 시절에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말년에는 석곡리 집으로 돌아와, 1963년 생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남긴 재산이라고는 현재의 생가 한 채가 전부였다.

 

 

이곳을 집으로 삼아 사셨다니...

 

네 칸 중 세 칸의 방을 드린 초가. 한 칸마다 좁디좁은 문이 앞으로 나 있다. 겨우 어른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문이다. 그 중 부엌과 붙은 우측의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그것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판자로 꾸며졌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우측의 두 칸은 하나로 만들어진 큰 방이다.

 

좌측 끝 방과 연결하는 문은 문짝이 없이, 그냥 토굴의 구멍처럼 만들어졌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하였다는 생가의 형태는 바라볼수록 마음이 아프다. 큰 방의 천정 아래에는 시렁대가 놓여있다. 집이라고 너무 좁아, 어디 한 군데도 마음 편하게 사용을 할 수가 없다.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가니 부엌문도 없다. 벽은 짚을 엮어 바람을 막았다. 부엌 안은 아궁이와 진흙으로 다져놓은 것이 다이다. 뒤편으로 나가도 문이 없다. 뒤편 부엌 반대편에는 벽을 일부 담을 둘러 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살면서도 나라를 위한 생각만을 하셨다니.

 

대선을 위해 뛰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집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요즈음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과연 선생과 같은 입장에 있다면, 그들도 이런 집에서 살 수가 있었을까? 당연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란 것이 내 대답이다. 혹 모르겠다. 그 시절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선생의 마음은 닮지 못했을 것이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수 없이 많은 집들을 보아왔다. 말대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집을 본 적이 없다. 비록 초라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안에는 선생의 아름다운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대선을 앞두고 저마다 난리를 치시는 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들에게 묻고 싶다.

 

“이 집에서 살다 가신 연병호 선생님처럼, 세상 모든 것 다 버리고 오직 나라와 국민들만을 생각할 수 있는가?”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을 앞두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저마다 국회로 입성을 하겠다고 난리들을 치는 사람들. 그 중에는 참으로 국회로 보내 국민들의 살림을 맡길만 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건 머 턱도 아닌 사람들조차 난리를 치는 모습을 보면 한 마디로 가관이다.

저마다 자신만이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고 난리법석을 치는 사람들. 그들에게 꼭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바로 고택에서 좀 배우라는 것이다. 그 안에 정말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올바로 끌고 갈만한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증평에 있는 연병호 선생 생가. 선생은 제헌국회의원과 2대 국회에서 활동을 하셨다. 집은 모두 네 칸으로 아랫방과 윗방을 연결하는 문에는 문짝도 없는 집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의 집을 보라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연병호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연병호 선생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이런저런 재산을 마련할 때도 태어난 생가 한 채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도대체 연병호 선생이 태어나고, 만년에 다시 돌아와 살았다는 생가는 어떠한 모습일까?

여주군 북내면에 있는 의병 이인영 팔도의병 총대장의 집. 이런 집에서 나라를 위해 떨치고 일어난 의병총대장이 살았다.


석곡리 마을 길 한편에 자리 잡은 연병호 생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계단으로 오르면, 싸리문이 손을 맞이한다. 안에는 모두 네 칸으로 마련된 초가가 한 채 있을 뿐이다. 지금은 마당 앞에 연병호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석비가 서 있지만, 이렇게 생가지가 정비되기 전에는 정말로 초라한 민초의 집이었을 것이다.

정남향으로 서 있는 초가는 네 칸이다. 좌측 세 칸은 방으로 드리고, 우측의 한 칸은 부엌이다. 정면 네 칸, 측면 한 칸 반으로 꾸며진 집은, 그저 어느 깊은 산골 외딴집을 보는 듯하다. 꾸미지도 않은 초가는 사람이 겨우 살아 갈만하다. 말이 집이라고는 하나, 이 집이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분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어이가 없다. 눈물이 흐른다. 지금의 내 신세를 탓하기 전에, 선생의 그 살아오신 일생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보성 이용욱 가옥의 담장에 난 소리통. 마을 사람들의 소리를 이 소리통을 통해 듣고 아픔을 달래주었다 


고택에는 국회의원이 가져야 할 덕목이 있다

연병호 선생은 독립운동가이다. 나라의 독립은 위해 두 번이나 옥고를 치루면서도, 정작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4월 11일이 제19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다. 제발 이번에 의원이 될 사람들은 연병호 선생의 백분지 1이라도 닮은 사람들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병호 선생뿐이 아니다. 정말로 나라를 위해 자신을 버리고 수많은 일을 하다가 간 선조들의 모습을 보면, 지금 국회로 나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을 보면 먼저 답답해진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에 자리한 의병 총 대장 이인영의 생가, 동학을 일으킨 전봉준의 생가 등을 보면, 이 분들이 진정 이 나라를 살피기 위해 어떻게 살았나를 알 수가 있다.

구례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말로 남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전남 보성군에 이용욱의 고택에 가면 담장에 소리통이 있다. 그 밖은 마을 공동우물이다. 땅의 한편을 담을 들여쌓고 우물을 마련해, 그 우물가에서 들리는 동네의 모든 소리를 소리통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마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을사람들의 작은 고민까지도 일일이 소리통을 통해 듣고 해결을 했다니 놀랍기만 하다. 이런 소리통이 되어야한다.

구례에 가면 운조루가 있다. 알만한 사람은 이 운조루 안에 타인능해가 있다는 것을 다 안다. 타인능해는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식량창고이다. 누구나 다 먹을 것이 없으면 이곳에 와서 쌀을 가져갈 수가 있다. 엄청난 재산을 갖고 해마다 이런저런 일로 재산을 늘리는 것을 자랑삼지 말고, 타인능해가 되어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아야 한다.

의원나리들. 저마다 잘났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다. 이제는 그렇게 바보스럽게 국민들이 넘어가 주지 않는다. 스스로 소리통이 되고, 타인능해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연병호 선생의 생가, 전봉준 선생의 생가, 이인영 대장의 생가에서 좀 보고 느껴라. 국회의원은 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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