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424(), 채인석 화성시장과의 인터뷰를 마친 후, 당성으로 올랐다. 당성은 옛 명칭으로 당항성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름 그대로 당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곳이다. 4월인데도 날이 덥다. 성벽 위로 걷는데, 숨이 가쁘다. 그도 그럴 것이 오후에 나선 답사 길을 재촉하느라,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삼국이 번갈아 차지했던 교통의 요지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복원 중이다. 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세 곳 정도로 나누어서 복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석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148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성은 그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테뫼식으로 쌓은 토축 산성이었다, 그 길이는 336m이다.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복원을 마친 곳 외에 드문드문 옛 성의 흔적들이 잡풀과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망해루터와 건물지, 우물터 등이 남아있어

 

얼마를 돌아보니 지대가 높은 곳에 돌이 쌓여있고, 뒤편으로는 넓은 터가 보인다. 아마도 건물이 들어있던 곳 같다. 앞에는 '망해루 터'라는 석비가 있다. 이곳에 망해루라는 누각이 서 있었다는 것이다. 망해루는 목은 이색이 지은 남양부 망해루기에 보면, 고려말 남양부사 정을경이 고을의 치소에 외관을 웅장하게 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직은 복원이 되지 않은 곳에 문지인 듯한 곳이 보인다. 성을 한 바퀴 돌아 밑으로 내려오니, 우물터가 보인다. 이 우물터는 당성 안에 식수를 공급한 곳으로 추정한다. 지름이 50cm 정도에 깊이는 1m 정도로 비교적 작은 우물이다. 우물은 원형으로 땅을 판 후, 주변에 돌을 쌓아 올렸다.

 

 

당항성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

 

원효(617-686)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이었다.

 

원효대사의 행적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당으로의 유학을 시도했던 원효대사가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대사는 45세에 두 번째로 의상대사와 함께 이번에는 해로로 해서 당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항성 아래에 도착을 하였다. 당항성 아래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원효대사는 거기서 깨들음을 얻는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며 다시 서라벌로 발길을 돌렸다. 원효대사의 이 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채인석 화성시장 대담

 

- 과거 당성의 무역항으로서의 역할과 역사적 가치는 무엇인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한 당성1971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된 삼국시대 당항성으로 추정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 신라가 중국과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특산물을 수출하던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헌 자료의 부족 등으로 그 동안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간 2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석축 성벽, 토석혼축 성벽과 망해루지 및 다각형건물지 등의 내부 건물지가 확인됐습니다. 특히, 산성 내부의 시설들은 군사적행정적 건물들뿐만 아니라 원형(다각형)의 건물지를 통해 당시 당성이 의례적 기능을 하고 있었던 국가적으로 핵심적인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성이 원료 대사의 대오각성의 현장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661, 원효와 의상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중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고 그 날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진리를 깨닫고 발걸음을 돌렸다는 이야기, 즉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의 큰 깨달음을 얻은 현장이 당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입니다. 이렇듯, 당성은 문화재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우리 53만 화성시민은 물론이고 전 국민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중요한 정신 문화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 화성시의 당성 복원을 위해 그간의 노력과 향후 계획은?

우리 화성시는 그간 2차례(1998, 2000)의 발굴조사를 실시했으며, 639m의 성곽을 복원했으며, 또한, 당성을 종합적으로 정비하고자 지난해 10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127일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화성시 주최,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당성의 황해연안교류에서의 역할(당성의 역사지리적 가치)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이 세미나를 통해 당성의 황해 교통로,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의 당성의 역사적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이을 통해 우리시는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당성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동안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당성과 남양지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만들어졌으며, 앞으로 당성 정비에 있어 초석으로 작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시는 당성 종합정비계획을 통해 당성의 성벽과 내부시설물 정비는 물론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 당성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당성복원과 관련한 세부사업으로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해 주차장, 진입도로 등 부대시설 조성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당성 주변 토지 매입 시작하고, 201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시작해 2017년까지 연차적으로 착수하려 합니다. 또한, 2014년부터 성곽, 건물지 복원과 외곽지역 종합정비를 위해 성내 시설물 보수 공사와 당성의 성벽과 내부 시설물, 성벽(석축), 망해루지 등의 복원을 연차적으로 착수할 계획입니다.

 

또한, 안내시설, 편의시설, 안전 및 방제시설을 설치하고 탐방로 정비, 홍보관 건립, 전시공간 등을 확보하고, 스토리텔링을 이용한 교육 및 관광 활용 방안도 마련해 당성의 역사 문화적 인식을 확대하고 타 지역의 문화재와 차별화된 전략을 통해 당성의 고유한 특성을 발현시킬 계획입니다. 특히, 당성 정비가 일정한 성과를 나타내는 2024년 이후에는 역사길 조성, 교육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역사와 생태환경 교육 등 생동감 있는 현장을 전달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를 개발할 계획입니다.

 

- 역사적인 관점에서 과거 당성의 역할을 현재의 화성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중국을 비롯한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통로의 역할을 했던 곳이 당성입니다. 오늘날로 보면 부산항이나, 인천항의 역할과도 같은 곳으로 무역은 물론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리 화성시는 대한민국 최고의 역동적인 도시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시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세계로 거침없이 나가려는 도전과 개척정신의 상징이었던 당성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화성시와 화성시민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성이 상징하는 도전과 개척정신은 미래를 향해 큰 꿈을 갖고 달려 나가는 우리 시민들에게, 용기를 주는 어디에도 없는 정신문화재가 될 것입니다.

 

- 긴 시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동마을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담아 내

 

책을 받아 들고 표지를 보는 순간 책 참 예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표지부터 남다르다. <지동마을 이야기>는 작은 제목으로 사람 향기 진한 화성 동쪽 마을 이야기라고 적고 있다. 지동 마을의 이모저모를 사람 중심으로 엮은 책이다. 우선 이 책은 일 년 동안 지동을 내 집처럼 드나 든 필진들이, 직접 골목과 시장을 누비며 글을 엮었다는 것에 묘미가 있다.

 

140쪽에 달하는 지동마을 이야기는 재질부터가 남다르다. 그리고 한 페이지마다 특색이 있게 꾸며졌다. 책을 디자인 한 유순혜 작가는 지동벽화골목 조성의 총괄책임자로, 전에 방송사 일러스트로 활약을 한 바 있다. 책은 모두 여섯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지동의 문화유산, 지동의 땅이름 이야기, 지동 시장이야기, 지동 사람들, 지동 시장사람들, 지동 마을만들기 이다.

 

 

편집부터가 남다른 책

 

책의 판형도 남다르다. 이 책의 발간을 기획한 지동주민센터 기노헌 총괄팀장은 책의 판형을 색다르게 한 이유를, 서가에 꽂혀있을 때 딴 책과 구별이 되게 했다고 한다. 집필을 한 사람들도 각자 일 년 동안 끊임없이 지동을 누비며, 지동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지동의 문화유산을 쓴 염상균은 향토사학자로 경기문화연구원장이다. 아주 오래된 지동의 역사와 지동이 품은 화성에 대해서 글을 썼다. 지동 땅이름 이야기와 지동 시장을 쓴 김우영은 오랫동안 지역 일간지에서 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e수원뉴스의 편집주간이다. 지동사람들과 지동 마을만들기를 쓴 하주성은 민속학자로 지동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지동이야기를 적고 있다.

 

 

지동시장 사람들을 쓴 김해자는 주부이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지동이야기를 글로 쓴 e수원뉴스의 으뜸시민기자이다. 벌써 몇 년 째 지동을 드나들면서 지동 사람들과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동 사람들 중 몇 편의 글을 쓴 정다겸은 웃음치료사이면서 e수원뉴스의 시민기자이다.

 

마을만들기 정책의 일면을 정리한 책

 

염태영 수원시장은 책머리의 인사말에서 지동은 참으로 매력이 넘치는 마을이라고 적고 있으면서, 이 작은 책자 한권이 수원시의 마을만들기 정책의 일면을 정리하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지동은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아름다운 동쪽 성벽을 바라보고 형성된 마을입니다. 그래서인가 지동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강인하면서도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밖으로 표출을 하지 않고 묵묵히 속으로 되새김질 하고 있습니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변화한 지동은 이제 마을만들기의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염태영 수원시장의 발간사 중에서)

 

 

박찬복 지동장은 지동은 관광의 중요한 다섯 가지 요소를 갖고 있으며, 수원에서 발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마을이라고 했다. 그 다섯 가지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의 창룡문에서 남수문까지의 동쪽 구간이라는 점과, 성곽과 연결된 다양한 벽화가 그려진 오밀조밀한 주택가 골목길, 이웃과 소통하여 훈훈한 정을 나누는 순박한 지동 사람들, 지역의 명소로 활용할 수 있는 수원제일교회의 노을빛 전망대와 갤러리, 그리고 지동, 미나리광, 못골시장 등 상인들의 활기를 느낄 수 있는 세 곳의 전통시장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는 책

 

책의 평가를 시민 몇 사람에게 부탁을 해보았다. 우선 처음 책을 접한 사람들은 이렇게 아름답게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시원하게 배치한 책은 처음이라는 답이다. 그리고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더니, ‘사람들 이야기는 역시 재미있다라는 대답을 한다. 지동마을이야기는 지동에 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주민들과 사장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참 감칠 맛나게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을 기획한 기노헌 팀장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을 만들고 싶었다고 표현을 한다. 페이지마다 공백에 여러 가지 일러스트로 공백을 메우고, 글마다 독특한 편집을 했다. 오랫동안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을 한 유순혜 작가의 공이기도 하다.

 

 

나의 아내 김희경은 30살에 멈추어있지요. 우아한 외적 미모도 있지만, 젊어 보이는 남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이들(14)을 잘 키워주어서 예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커서 더욱 예쁩니다.” 면서 실제 나이를 끝내 밝히지 않았다.

 

지동시장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쓴 김해자의 글 중에서 넓은 가슴으로 시장을 품은 사나이 표영섭 지동자치위원장에 대한 글이다. 이 책은 이렇게 훈훈한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꾸며졌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가슴 안으로 파고든다고 한다. 벌써부터 다음 편에는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줄까가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동마을이야기 전자책 보러가기 => http://ebook.suwon.go.kr/20130123_112843

금연’이란 담배를 끊는다는 것이다. 담배는 ‘백해무익’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담배 한 대가 스트레스를 많이 완화시켜 준다고도 한다. 의학적으로야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본인들이 그리 생각한다면 그도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흡연인구가 줄어든다고 한다. 발표를 그대로 믿을 사람도 없겠지만, 실제로 생활을 하면서 보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만 같다. 실제로 흡연구역을 가보면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세상살이가 힘든데 담배라도 피워야지’하던 말이 생각이 난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계가 없습니다

흡연인구가 점점 어려지고 있다.

요즈음 철도역은 모두가 다 금연지역이다. 예전에는 기차 안에서도 마음대로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흡연 칸이 생겨났고, 이제는 아예 기차 안 어디서도 담배를 피울 수가 없다. 그러더니 기차역까지 금연지역이 되어버렸다. 역사 밖 한편에 마련해 준 흡연 장소, 그것도 문 앞에서 밀려나 저만치 역사 끝으로 떨어진 곳에 마련을 했다.

그런데 몇 년 전만해도 흡연을 할 수 있는 장소를 가면, 대개는 어른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젊은 청년들이 더 많이 보인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제 갓 20대를 넘겼을까 한 아가씨들이 담배를 물고 있다. 주위에 시선일랑은 아예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물론 담배는 기호품이다. 자신이 알아서 피울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정서에는 젊은 사람, 그것도 젊은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조금은 조심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곁에 어른이 있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담배를 물고 연기를 내뿜는다. 아주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
우리 같은 사람은 어디 가서 피워?'

어제 남원으로 내려오기 위해 역사에 나갔다. 시간이 많이 남아 밖으로 잠시 나가보았더니, 웬 어르신 한 분이 화가 나 들어오신다. “젊은 것들이”란 말이 귀에 꽂힌다. 그냥 무시해 버리려다가 어르신께 여쭤보았다. 불편한 것이라도 있느냐고?

“저기 좀 보셔. 새파란 것들이 담배 꼬나물고 있는 꼴을”

그러고 보니 젊은이들과 아직 앳된 젊은 여성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담배를 피우러 나갔던 어르신이 그 모습을 보았나보다.

“젊은 사람들이 있어서요?”
“그럼 저기서 저 어린 사람들하고 나하고 맞담배질을 해야겠소?”

아마 어르신 생각에는 그것이 몹시도 불편하셨나보다. 하기야 연세가 드신 분들 앞에서는 담배를 삼가는 것이 우리네 습속이었다. 그것이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보기가 좋지 않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런 점이다. 금연을 하라고 하면서 모두 담배를 피울 수 없는 지역으로 설정을 하고, 그 한편에 내동댕이치듯 흡연구역을 만들어 준다. 그러면 그곳에서는 어르신들이나 젊은이들이나, 그저 함께 담배를 맞대고 피울 수밖에 없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담배를 피우는 연령은 다양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꼬우면 담배 끊어’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젊은이들에게 어른을 공경하라고 가르치는 나라. 그리고 담배는 해롭다고 끊기를 바라는 나라. 적어도 이런 나라라면 아주 사소한 것 정도는 생각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르신들이 담배 한 대 피우는 것조차 불편한 나라가 되어서야, 어디 이 나라에서 삼강오륜이나 어르신 공경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스스로 돼먹지 않은 나라로 만들어가고 있는 분들, 어떻게 좀 해봐봐!

500년이면 강산이 50번이나 변하는 시간이다. 이 긴 시간 동안 한 자리에 뿌리를 박고 사는 나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 그 나무가 꼭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소중한 천연자원임에는 강조할 필요가 없다.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 407-1에 소재한 수령 520년의 느티나무. 보기에는 그리 오래된 나무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나무를 한 바퀴 돌아보면, 괴이한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고유번호는 강원 원주 10호이다. 1984년 6월 13일에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다. 나무의 높이는 20m에 이르고, 둘레는 6,2m나 되는 거목이다. 나무 밑동에서 윗부분의 줄기에는 여기저기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인다. 나무는 일반적인 느티나무들이 가지를 위로 뻗는데 비해, 마치 춤을 추듯 둥긇게 뻗기도 해 기괴한 느낌마져 준다.



호저면 용운사지 곁에 서식해

호저면은 칠봉과 용운사지가 있어 유명하다. 여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흐르는 물가를 찾아 모여든다. 칠봉은 섬강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곱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물가에 서 있어 절경이다. 이 칠봉을 지나 들어가면 용곡리가 나오며, 이곳은 예전에 용운사지가 있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탑과 석불이 나란히 있는데, 이 느티나무는 그 옆에 서식하고 있다.

느티나무의 옆으로는 맑은 하천이 흐르고 있어, 늘 풍부한 수분이 나무를 자라게 하고 있다. 느티나무는 그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줄기에 가득한 이끼들을 보아도 깊은 세월을 느낄 수가 있다.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나도 몰래 침을 삼킨다. 그것은 이 나무가 살아온 세월이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이기 때문이다. 이 나무가 처음으로 싹을 티었을 당시는 조선조 성종 때였으니, 그 세월이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500년 성상을 살아온 나무답게 나무는 기이한 모습으로 서 있다.

나무를 보며 기운을 얻다

나무를 보면 무엇인가 기운을 얻는다고 한다. 무슨 기운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그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킨 용곡리 느티나무.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수 많은 보호수들이 있다. 이 나무도 그 중 한 나무일뿐이다. 그러나 용곡리 느티나무는 조금은 특이해보인다. 밑동서부터 여기저기 혹같은 것이 돌촐이 되어있다. 아마 오랜 역사의 흔적인 것만 같다.

줄기에는 푸른 이끼가 덮고있어, 이 나무가 얼만 오래되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다. 혹은 또 다른 혹을 만들어내며, 두껍잔등 같은 표피를 보호하는 듯하다. 자연적으로 스스로를 치유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보면 볼 수록 그 경이로움에 감탄을 한다. 수많은 천연기념물을 보아왔지만, 조금도 부족하지가 않다. 그래서 이 느티나무에게서 받는 기운이 남다르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느티나무.  그러나 그 나무마다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호저면 용곡리의 느티나무는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보이면서, 50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그렇게 서 있다. 이러한 나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연의 위대함을 배운다.

자연은 스스로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힘을 갖고 있다. 하기에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서서 나름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 느티나무는 그 오랜 성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앞으로도 또 얼마나 오랜시간을 우리와 함께할 지 모른다. 그것이 바로 나무에게서 우리가 받아야 할 기운이란 생각이다.

여주장. 그냥 여주에 있는 장이 아니고, 500년 긴 성상을 한 자리에서 열리고 있는 여주 5일장에 대한 책이다. 2009년 10월 가을이 깊어갈 때부터 시작해, 2010년 6월 더위가 막바지로 치솟고 있을 때까지 9개월 동안을 5일장 바닥을 누비고 다녔다. 가을부터 여름까지 4계절을 장에서 지낸 셈이다. 그렇다고 장돌뱅이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은 책이다.

여주문화원에서 의뢰를 받다

여주는 전통 있는 고장이다. 남한강을 끼고 발달한 여주는 예전부터 땅이 비옥하고 풍부한 농산물에 한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한 곳이다. 주변의 도시와는 달리 여주는 목(牧)을 둘 정도로 큰 도시에 해당했다. 한강의 4대 나루인 마포나루, 광나루와 함께 이포와 조포나루가 있었다. 이 중 여주에 이포와 조포가 있을 만큼 여주는 수운을 통한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이러한 여주의 5일장은 그 역사가 500년이나 된다. 그러나 아직 여주 5일장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여주문화원에서 의뢰를 받고 책을 쓰기위해 모든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자료라고 나온 것은 다만 몇 줄에 불과하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책을 쓴다는 것은 더욱 힘들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었다. 9개월의 여주 5일장 순례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여주 5일장은 독립운동의 시원지

여주 5일장. 그냥 장돌뱅이들이 모여드는 곳이 아니다. 여주 5일장에는 역사가 있다. 그리고 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고 난 뒤, 여주는 큰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유림을 위시한 많은 여주사람들은 일제에 항거를 시작한다.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일본군을 습격하는가 하면, 여주장에 숨어들어 일본군 등 50여명을 척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주의 마을들이 일본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기도 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3, 1만세운동이 발발했으며, 13도 의병 총사령관을 여주 출신 이인영대장이 맡기도 했다. 결국 여주 5일장은 구국의 상징적인 곳이었다.

여주 5일장에서 만난 사람들

여주 5일장을 참으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물론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외에도 함께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세상 이야기를 한 사람들도 많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부부장꾼, 비가오나 눈이오나 제 자리를 지키면서 몇 명 안되는 단골들을 기다리는 할머니, 멀리 꿈을 안고 이국으로 와 피곤한 삶을 소주 한잔에 털어버리는 이주노동자들. 손톱이 다 뭉그러지도록 하루 종일 마늘을 까고 계시는 할머니. 대물림인 뻥튀기를 하는 어느 분의 이야기. 그 안에 삶의 모습이 있었다.



‘마을 사람은 장으로, 도독은 마을로’

5일장은 인정이 가장 많은 곳이다. ‘말만 잘하면 그냥도 준다’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5일장으로 모여든다. 장날이 되면 마을은 텅 비어버린다. 장으로 다 나가기 때문이다. 꼭 물건을 사기 위해서 나가는 것은 아니다. 5일 동안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친하지 않아도 친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5일장이다.

여주 5일장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를 접고 또 접었다. 한정된 페이지에 글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 중에서 이야기꺼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정리하면서 많은 고민도 했다. 그 중 어느 이야기 하나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9개월의 작업 끝에 작은 책자 하나를 펴들었다. 『500년 세월의 여주 5일장』 비록 책은 볼품이 없지만 땀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여주 5일장’ 책 안에는

이 책 안에는 5일장의 의미, 5일장의 역사, 5일장의 기능, 그리고 5일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5일장 책을 집필하면서 느낀 한담을 적은 ‘강한루 마루에 땀을 식히다’로 되어 있다. 발품을 수도 없이 팔아 만들어 진 책이다. 예산이 풍족하지 않아 컬러사진 한 장 넣지 못했다. 한정판이기 때문에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줄 수도 없다.



21번째 쓰는 책이지만 이번만큼 힘든 적은 없었다. 그만큼 다리품을 팔아야만 했다. 손이 얼어오고, 몸에서 쉰내가 날 때까지 걸었다. 그렇게 손에 받아 든 책이다. 이것이 여주 5일장의 모두는 아니다. 앞으로 또 다른 여주 5일장이 정리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500년 세월의 여주5일장’

발행일 : 2010년 6월 25일
발  행 : 여주문화원
발행인 : 이 난 우
지은이 : 하 주 성
디자인 : 김 금 자
비매품, 한정판 158쪽

(주) 이 책은 비매품 한정판이므로 많은 수량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혹 꼭 필요하신 분이 계시면, 제 방명록에 비공개로 받으실 주소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6분께만 드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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