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10월 1일, 역마산 기슭서 영화동 당제 열려

 

2012년 11월 14일(음 10월 1일) 장안구 조원동, 경기도교육연구원 북쪽 주차장 뒷산인 역마산 자락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영화동 당제’가 열렸다. 오래도록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가내의 안과태평을 위해, 음력 10월 1일을 기해 지내오던 산신제가 한국전쟁 이후 20년까지 지내졌다고 한다.

 

이곳의 산신제는 조안말 사람들보다 영화동 주민들이 더 많이 참석을 했으나, 당이 유실되고 난 뒤 산신제도 그치고 말았다. 1997년 지역 어르신들의 모음인 삼오회가 주관이 되어, 다시 역마산 줄기에서 당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는 수원시에서 지원을 받아, 영화동 당제추진위원회를 조성해 올 해로 3년 째 당제를 올리고 있다.

 

 

옛 ‘종교용지’가 역마산에 남아있어

 

역마산의 당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고 있다. 다만 지적도에 ‘종교용지’라고 표시된 부분이 있어, 그곳이 예전 당 터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당굿의 전 보유자였던 고 오수복 선생은 살아생전, ‘역마산에 옛날에 도당굿을 하던 당집이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당이 소실된 것은 40여 년 전쯤으로 추정한다.

 

당제를 준비하고 있는 제장에서 만난 수원시의회 한규흠 의원은,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지내오던 당제를 복원했다고 하면서

 

“저희 영화동 당제는 전통이 있습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르면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또 당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마을에서는 당집 터를 찾아 당집을 복원하고, 주민들의 공동체를 창출할 수 있는 마을의 축제로 이끌어 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

 

 

당제 전에 먼저 산신고사를 올려

 

제관들이 유교식 절차에 의해 올리는 당제가 시작되기 전에, 역마산 중턱에서는 영화동 통장협의회 진수진(남, 53세) 회장 등이 주관하는 산신제가 먼저 열렸다. 간단하게 포와 막걸리 등을 놓고 ‘올 한해 잘 보내고, 내년에도 영화동 주민들이 평안하게 하소서’라는 제관의 인사와 배례로 산신제를 마쳤다.

 

영화동 당제는 예정시간보다 조금 늦은 10시 10분께 시작이 되었는데, 간단한 국민의례와 내빈소개, 축사와 당제로 이어졌다. 당제에 참석을 한 라수홍 장안구청장은 축사를 통해

 

“역마산에는 지적도에 종교부지로 표기된 부분이 있어 당을 복원할 수가 있다. 이 당제로 인해 올 한해가 풍요롭고 내년에는 모두가 안과태평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영화동 당제의 당주는 영화동 통장협의회 진수진 회장이 맡았으며, 초헌관은 박정애 영화동장이, 아헌관은 박주복 영화동당제 추진위원장이 맡았다. 종헌관은 이순형 삼우회장이 맡아서 했으며, 특히 영화동 당제에는 영화동과 자매결연을 맺은 서산시 인지면의 장동규 면장 및 주민 20여명이 동참을 해 영화동 당제를 축하하기도 했다.

 

마을 공동체를 창출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날이 쌀쌀한 가운데 진행이 된 영화동 당제는, 250명 정도의 주민과 외지인이 참여를 했다. 제에 참석을 한 영화동이 거주한다는 이아무개(여, 45세)는

 

“종교를 떠나 이렇게 주민들이 모여, 서로 영화동의 안녕과 함께 가정마다 평안함을 기원하는 당제를 처음 보았다. 어찌 보면 우리 조상님들의 마음에는, 내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을 할 수 있도록 주변에 많이 알려야겠다.” 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위해 지내는 영화동 당제. 소실이 되었던 역마산 당제가 복원이 되었다는 것에, 관계자 여러분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또한 오래도록 이 당제가 주민들의 공동체를 창출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

“우리 장안거북시장은 정조대왕의 화성 축성 시, 처음으로 시장을 개장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벌써 2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 시장이죠. 당시 지금의 거북시장은 모두 영화역에 있던 마방(말을 키우고 관리하던 옛 장소) 이었다고 합니다.”

 

거북시장 상인회 차한규(남, 59세) 회장의 설명이다. 9월 12일 오후에 찾아간 거북시장. 수원에 장시를 열고 있는 22곳의 재래시장 중에서, 넓이로 따지자면 1~2위 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현재 거북시장에는 200여개의 점포가 사방으로 뻗은 길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다.

 

 

“처음에 이 시장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거북시장이란 명칭을 사용 한 것은 40~50년 정도입니다. 당시 이곳이 거의 한 사람의 땅이었는데, 그 분의 별명이 거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북시장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죠”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상권을 자랑하던 곳

 

18세기 우리나라의 싱권의 형성은 개성과 수원, 안성을 잇는 ‘의주로(義州路)’가 바로 삼남대로였다. 개성상인인 ‘송상’, 수원의 ‘깍정이’, 그리고 안성의 유기상인 ‘마춤이’ 등이 그것이다. 수원의 상거래 중심지는 당연히 거대한 마방이 있는 영화역(현재의 영화동사무소 인근)이었을 것으로 본다.

 

정조대왕은 당시 화성인근에 6개소의 장시를 개설하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중 한곳이 바로 거북시장이다. 거북시장은 수원상권의 발원지였으며, 정조의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역이 500여평 규모에 말을 쳤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상당히 번화한 장시였음을 알 수 있다.

 

 

예전 우리나라에는 ‘역원(驛院)’이 있었다. 역은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말을 바꾸어 타는 곳이고, 원은 공무를 보는 관리들이 묵는 곳이다. 영화역은 당연히 말을 관리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영화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말을 관리를 했을까? 장안문 앞에 있는 영화역에서는 단연히 정조의 능행차에 필요한 말들 수백 마리를 관리를 했을 것이다. 현재 거북시장 인근이 모두 마방이었다는 것을 보아도 그 규모를 알 수가 있다.

 

52칸이나 되는 영화역과 역마산, 마장산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년 8월 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당시 영화역은 찰방역이었는데 이를 군제에 포함시키고, 북성(화성의 북쪽)의 척후장을 겸직하게 하였다. 한데서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정조 20년인 1796년 8월 1일에 정조는 수원부 유수 조심태에게 지시를 한다. 북문 밖에 역관을 설치하고자 하나 재력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영화역의 규모는 정당 및 삼문이 있는데 모두 남향이며, 내아는 모두 52칸이라고 했다. 지금도 영화초등학교의 뒷산을 마장산, 또는 역마산이라고 한다. 이 곳에 말을 놓아먹이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변화를 시도하는 거북시장

 

장안문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은 ‘새 수막거리’였다. 여정에 지친 행인들이 국밥 한 그릇에 텁텁한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곳이다. 장안문을 벗어나 이 거리에 들어서면, 웃음 띤 주모의 얼굴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지나쳤을 것이고, 그런 행인을 상대로 한 장시도 상당했을 것이다.

 

“저희 거북시장이 1980~90년대 까지는 그래도 상당히 번화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희 시장은 특성이 없는 재래시장으로 변하고 말았죠. 저희들도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관광버스가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거리 정비를 할 생각입니다. 전신주 지중화사업, 간판정리 등의 예산도 확보되었습니다. 현재 용역을 마치고 11월이면 공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거북시장 차한규 상인회장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거북시장의 옛 영화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새 수막거리’라는 이름은 날마다 술집이 새로 생겨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더구나 정조 당시에는 장안문 밖에 장용외영의 훈련장이 있었다고 하니, 그 때의 번화한 거리는 새삼 가늠할 수가 있다.

 

수막거리 형성이 거북시장을 살리는 길

 

차한규 회장과 인터뷰를 마치고 시장 길을 돌아본다. 현재 거북시장은 여기저기 온통 먹거리 집들만이 즐비하다. 재래시장의 특성상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특화된 것이 있어야 하는데 비해, 거북시장은 그런 것이 눈에 띠질 않는다. 꼭 이곳을 찾지 않아도 어디서나 쉽게 찾아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옛 수막거리를 돌아본다. 과거 분내 풍기고, 웃음을 팔던 주모들이 있던 곳. 치미자락을 위로 끌어 잡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뭇 남정네들의 마음을 녹이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은 그런 특화된 거리가 필요할 때이다. 장안문을 나서 현 수성중학교까지 길에 뻗어 있었다던 새 수막거리. 그 거리가 새삼 그리운 까닭이기도 하다.

 

영화역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거북시장 상인회. 아마도 그 꿈이 머지않아 이루어지고, 분내 나는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수막거리를 감도는 날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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