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맛이 있는가? 보다는, 얼마나 낫이 있게 먹느냐가 중요하다는 개똥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음식은 정성이라느니, 아니면 손맛이라는지 하는 말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음식을 먹을 때 중요한 것은,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이 얼마나 맛있게 먹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어릴 적 아이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저 녀석은 참 복스럽게 먹네, 이다음에 잘 살거야’라든지 ‘어째 밥을 그렇게 깨작거리고 먹느냐, 복 달아나게’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결국 음식은 먹는 사람이 얼마나 복스럽게 잘 먹어 주는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평소 소식을 하는 습관

 

난 평소에도 소식을 하는 편이다. 어디를 가나 밥을 한 공기 이상 먹어본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소식을 한다고 하루에 끼니를 늘리지도 않는다. 그저 하루에 세 끼 식사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그 체격에 그것 먹고 버티느냐’고 말을 한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렇게 먹어왔기 때문에, 별 지장은 없는 듯하다.

 

그런 내가 아주 오랜만에 뼈다구탕 한 그릇과 밥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물론 산행을 하고 난 후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딴 때 같으면 그저 얼만 큼은 남기고 했으니 말이다. 함께 식사를 한 사람들도 그런 나를 보고 이상한 듯 쳐다본다. 아마도 그렇게 바닥이 보이도록 그릇을 비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난 이렇게 맛집을 소개한다.

 

난 맛집 블러거가 아니다. 하기에 맛집 블러거들처럼 이것저것 모든 것을 찍어대지도 않는다. 내가 맛집을 소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은 내가 먹었을 때 맛이 있어야 한다. 화학조미료를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나로서는, 조미료가 첨가되지 않은 음식을 제일로 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식당을 들어가면 우선은 상차림을 한 장 찍어 놓는다. 그리고 반찬이며 이런 것들을 세세하게 찍는다. 이렇게 찍는다고 해서 그 다음으로 진척이 되지는 않는다. 우선은 찍어놓고 음식 맛을 보는 것이다. 음식이 맛이 있으면 그 다음에 차림표 등을 찍고, 그리고 나오면서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한다.

 

일단은 내가 명함을 달라고 하면, 그 집을 소개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맛이 있고 없음은, 순전헤 내 주관임을 밝혀둔다. 하기야 음식을 소개하는데 있어, 몇 사람의 입맛을 들어보고 난 뒤 소개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내 입에 맞으면 우선은 소개하는 절차를 거치니까. 전문적인 맛집 블로거와 나와의 차이가 바로 이런 점이다.

 

 

뼈다구에 잔뜩 붙은 고기, 바닥보인 그릇.

 

10일(토) 산행은 정말 악조건이었다. 천둥과 번개, 거기다가 들이붓듯 쏟아지는 장대비. 그 속에서 몇 시간을 산속을 헤맸으니 말이다. 그리고 찾아간 식당이다. 일부러 먼 길을 달려 맛이 있다고 소문난 집을 찾아간 것이다. 여주군 북내면 주암리 215에 소재한 ‘주암삼거리식당’. 이 집이 바로 뼈다구탕을 먹으러 간 집이다.

 

식당은 주암리라는 크지 않은 시골의 구석에 있다. ‘이 촌구석에 무슨 맛집이람?’하고 생각을 하면 오산이다. 식당 앞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 차 있다. 그 비가 쏟아지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것이다. 삼거리식당의 앞으로는 금장천이라고 하는 큰 네가 흐른다. 이 물이 여주 신륵사 쪽에서 남한강과 합류를 하는 것이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 뼈다구탕을 시킨다. 일행들도 모두 같은 것을 시켰다. 그런데 바로 나오지를 않는다. 오는 사람마다 뼈다구탕을 시켜 순서가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밑반찬이라야 별 것이 없다. 김치, 깍두기, 야채(오이, 당근, 고추)와 양파, 그리고 된장이 다이다. 그리고 질그릇 안에 팔팔 끓는 뼈다구탕을 놓아준다.

 

그런데 이 집은 뼈다구가 좀 다르다. 고기가 많이 붙어있다. 그리고 뼈다구의 양도 만만찮다. 도심에서 먹던 뼈다구탕 보다는 양이 많은 듯하다. 뼈다구는 앞 접시에 건져내고 밥을 말았다. 뼈다구에 붙은 고기를 골라먹으면서도 양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먹다가 보니 맛이 담백하다. 오래도록 끓인 국물 맛이 일품이다.

 

결국엔 탕 그릇이 바닥이 보이고 말았다. 이렇게 깨끗하게 식당 음식을 먹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특히 탕 종류에서는. 한적한 시골의 작은 마을에 있는 ‘주암섬거리식당’. 다음에 이곳을 찾아간다면 한 번 또 먹어보아야겠다. 그 때도 지금처럼 맛이 있을 것인지를.

 

주소 : 여주군 북내면 주암리 215 주암삼거리식당

전화 : 031-882-0157

가격 : 뼈다구탕 6,000원

 

“이 장마 통 장대비가 내리는 날 미치지 않고서야 무슨 문화재 답사람?”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난 거의 어김없이 문화재 답사를 떠난다. 그것이 어디가 되었거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그런 날 꼭 문화재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하필 장대비가 내리는 날 문화재를 보아야만 할까? 남들은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나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비를 맞은 문화재들은 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선명하게 드러난 문화재들을 잘 살피다가 보면,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샅샅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맛비에 찾아간 고달사지

 

7월 12일(금) 중부지방에는 정말로 장대비가 내렸다. 그 빗속에 찾아간 고달사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를 찾은 것이다.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되어 있다. 아직도 발굴 중인 이 고달사지에는 국보를 비롯한 보물들이 소재해 있는 옛 절터이다.

 

혜목산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 처음에 절이 창건된 지 벌써 1250년이 지난 옛 절터이다. 이 절은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병화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굵은 빗줄기 속에 희뿌옇게 모습을 보이는 고달사지. 그 안쪽 한편에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있다. 탑비는 없이 귀부 위에 이수만 얹힌 모습이다.

 

바람이 날 것 같은 콧구멍과 왕방울 눈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59년에 태어났다. 90세인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인근 원주의 거돈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광종은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고 할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몸돌은 깨어져 딴 곳으로 옮겼으며, 비 몸돌에는 가문과 출생, 행적 등이 적혀있다고 한다.

 

 

몇 번이나 들린 고달사지이다. 그러나 갈 때마다 이 귀부를 보면 딴 곳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이렇게 이 귀부에 마음이 가는 것은 귀부의 모습 때문이다. 문화재를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난 이 귀부를 볼 때마다 알 수없는 힘을 느낀다. 마치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내딛을 것만 같은 발. 격동적인 발은 발톱까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였다.

 

장맛비에 들어난 조각, 정말 장관일세

 

머릿돌인 이수에는 명문에 혜목산 고달선원 원종대사의 비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귀면이 조각되어 있다. 이 원종대사 탑비의 이수에는 용들이 용틀임을 하고 있는데, 비를 맞은 용의 비늘이 장관이다. 돌에 새겨놓은 비늘이 바로 꿈틀거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장관을 보기 위해 비속을 뚫고 답사를 다닌다.

 

 

발을 본다. 두려움이 느껴진다. 비에 젖은 앞발이 힘 있게 대지를 움켜잡은 모습이다. 어떻게 저렇게 표현을 했을까? 탑비의 뒤편으로 돌아가 웃음을 터트린다. 힘이 넘치는 앞모습과는 달리, 뒤편에 말려 올라간 꼬리가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라야 이러한 것들이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래도 비가 오는 날 답사를 나간다고 난리를 칠 것이여?”

미쳤다고 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비가 오는 날, 그것도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답사를 해보지 않은 분들은 그 멋을 모르니 말이다.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에 소재한 신륵사. 경기도내의 절 중에서는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고찰이다. 이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은, 보물 제231호로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곳에는 보제존자의 석등과 석종, 그리고 석종 비가 한 자리에 모여있다.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보제존자(1320∼1376)는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을 말한다. 석등으로 오르기 전 신륵사 조사당에는 나옹화상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성은 아(牙)씨였으며. 속명은 원혜이다.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 신륵사에서 강월헌(원래의 강월헌은 수해로 인해 사라졌다)에 기거하였다.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臺下江流百丈聽. 當年說法句紳聽.(대하강류백장청. 당년설법구신청).

川女朱下方丈實. 龍王惹參蓮花經.(천여주하방장실. 용왕야참연화경).

동 아래 강물은 일백 장으로 맑구나. 당시 설법하면 귀신이 와서 들었다네.

천녀는 낮에 방장에 내려오고 용왕은 밤에 연화법석에 참여하였지.

 

신륵사에서 나옹화상이 설법을 하면 귀신도 참여를 하였다고, 정두경의 고시 ‘신륵사’에 적고 있다. 그럴 정도로 나옹화상은 뛰어난 법력을 지녔는가 보다.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글도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고려 말 예주부(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에서 출생한 나옹화상. 그는 원나라 유학을 했고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로서, 인도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역사적 인물로서 조선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스승 이었다,

 

 

이무기를 조각한 아름다운 석등

 

6월 17일(월) 한 낮의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날이다. 신륵사를 찾아가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 후 조사당을 거쳐 뒷산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른다. 오후의 시간이라 땀이 비 오듯 흐르지만, 그런 것이 대수이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은 더위도 잊게 만든다. 그런 즐거움을 느끼기에 답사를 계속할 수 있는 가보다.

 

석등은 그리 크지 않다. 고려 말에 나옹화상이 입적을 한 후 세웠다고 하니 700년 가까운 새월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석등의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비천상과 함께 화사석에 새긴 이무기. 화사석을 들고 승천이라도 할 기세이다. 비천상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얼굴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허공을 가르며 날리고 있는 복대를 보고 있자니, 곧 석등을 뛰쳐나와 하늘로 오를 듯한 기세이다.

 

석등은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인 1379년에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정말 죄송합니다. 혼자만 이렇게 살고 있어서요. 하지만 기회는 드릴 수 있습니다. 엊그제 6월 22일(토), 아우가 한 명 있습니다. 그저 아우가 아니라 정말 좋아하는 형제입니다. 저희들은 나름 ‘달빛파’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모임 이름 이상하다고요. 아닙니다. 대충 이렇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달이 뜰 때부터 술자리가 시작되면 다음 날 달이 뜰 때까지 마시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때로는 2박 3일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모임에 막내가 있습니다. 머 대충 알고 계신분들도 있겠지만, 이 막내도 나름 유명한 블로거입니다. 이 막내가 형들을 보겠다고 여주로 온다고 합니다. 왜 하필이면 여주냐고요? 물 맑고 공기 좋고, 거기다가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려있으니까요. 형들은 막내를 위해 무엇을 해줄까를 고민합니다.

 

자연산 더덕백숙을 막내한테 먹이고 싶다

 

여주에 사는 아우와 상의를 했습니다. 사실은 우리 막내가 얼마 전에 큰 수술을 했습니다. 먹는 것도 조심하고 있는데,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 고민을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주에 사는 아우가 자연산 더덕 백숙을 먹이자는 겁니다. 자연산 더덕을 캐자면 정말 힘들게 산을 타야합니다. 지금 부터는 사진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산 속에 들어가면 시원하냐고요? 천만예요. 습합니다. 땀이 나느냐고요? 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죽습니다. 등산로가 아니라 계곡을 따라 다니니까요. 더덕은 아무데나 나느냐고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물이 있는 곳에 있으니 거의 습한곳만 찾아다닙니다. 땀이 얼마나 흐르냐고요? 체험 해드릴 수 있습니다. 네 시간 동안 산행에서 캔 더덕이 바로 위에 있는 사진입니다. 향이 좋으냐고요. 1박 2일 신청하시고 여주로오세요. 빡쎄게 산 한 번 타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더덕백숙이 익을 동안 미리 본 상입니다. 그런데 저 야채 샐러드 보이니요? 양상추, 블루베리, 양파. 더덕잎 등 10가지가 넘는 순수 무공해 야채만 갖고 만든 샐러드입니다. 거기다가 옆에 딸린 것들요. 모두 여주에 사는 아우 내외가 농사를 짓거나 집 주변에서 채취한 것들입니다. 무공해냐고요? 당연하죠. 여주에 사는 아우는 일체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비료도 천연재료로 스스로 만들어 사용합니다. 오직하면 밭에 비료를 뿌리고 그 손을 닦지 않고 밥상으로 올까요. 그 정도로 자연입니다. 일주에 한 번 여주에 가는 이유요. 저도 자연이고 싶어서입니다.  

 


 

드디어 더덕백숙이 나왔습니다. 더덕 잎으로 부끄러운 곳을 대충 가린 저 닭. 정말 침 넘어가지 않습니까? 야채 샐러드를 함께 접시에 담았습니다. 이 정도 백숙이면 시중 가격으로 따지면 한 10만원은 됩니다. 정말 드시고 싶으신 이웃님들은 신청하세요. 언제나 1박 2일 힐링 가능합니다. '망설이면 평생 후회하고도 늦는다'는 명언입니다. 그리고 맨 아래 사진은 국물입니다. 더덕의 향이 그대로 솔솔 배어나오죠.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끼리만 이렇게 잘 먹고 살아서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 더덕백숙을 하면서 지난번에는 엄나무 가지를 하나 넣었더니 맛이 별로였다는. 하지만 그것을 먹은 분들은 돌아가실 뻔 했습니다. 너무 맛있다고요. 저희들은 더덕 향이 별로여서 이번에는 더덕 왕창넣고, 거기다가 대추와 마늘만 넣었습니다. 그랬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이 맛요 안 먹어본 사람은 말하지 마세요. 정말 끝내줍니다. 향도 향이지만 닭의 육질이 거의 솜사탕 수준입니다. 닭 가슴살은 팍팍하죠, 천만예요 그냥 입안에서 녹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끼리만 이렇게 살아서.   

 

 

 

위 사진은 무엇이냐고요. 맨 위는 가지가 찢어지게 달린 블루베리 열매입니다. 여주에 사는 또 다른 아우가 갖다 심어 놓은 나무에 엄청 달렸습니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아우가 비료 엄청 준 듯합니다. 그 비료 만드는데 저도 늘 일조를 하고 옵니다. 아시는 분은 대충 눈치를 치셨을 듯. 그리고 다음 사진은 아우네 집 채소밭입니다. 별별 것들이 다 있습니다. 화학비료 한 방울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못 미더우면 와 보세요. 맨 아래 사진은 전날 먹은 더덕 백숙 국물에 찹쌀 넣고 야채 넣고 끓인 찹쌀더덕죽입니다. 여주에 오시면 기본 제공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맨날 먹을 것만 보여드려서. 하지만 사람이 먹어야 사는 것 아닌가요?  사실은 저희끼리 이렇게 먹고살면서 딱 목에 걸리는 분이 있습니다. 막내와 한 집에 사는 분이죠. 막내가 큰 수술을 받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막내제수씨 때문입니다. 남편 주변에 참 껄쩍지근한 형들만 있다고 생각하면 막내한테 잘 하겠습니까? 그런데요 정말 막내제수씨 막내한테 잘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더덕찹쌀 죽을 먹고 다시 산을 탔습니다.

 

왜냐고요? 이번에는 막내 제수씨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려고요. 전날 캐온 더덕 중에서 큰 놈 두 뿌리는 제수씨 몫으로 남겨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갖고는 조금 부족한 듯해, 아침부터 오른 산행에서 산에서 채취한 산삼 두어 뿌리를 제수씨 몫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은 냉 국수로 했죠. 반찬도 간단하지 않나요?    

 

 

 

무슨사진? 저희들끼리 모여서 술 마시고 더덕백숙 먹는 곳입니다. 1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산수유 나무 그늘에 아우가 만든 평상에 모기장을 떡하니 펼쳐놓고, 쑥을 피워 모기향도 만들고, 앞 논에서는 개구리들이 합창을 하고, 바람은 솔솔 불고....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끼리만 이렇게 살아서요. 그런데요 정말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돈 많고 집 크고, 잘 먹고(잘 먹는 것이야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겠지만) 그래야 행복한 것일까요?

 

그런네 정말 저희들은 바보같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이 좀 부족해도 정이 넘치고, 남들처럼 비싼 고기는 먹지 못해도, 자연에서 캐온 것들로 상을 마련하고, 엄청 값나가는 양주 안마시고 패티병에 든 싼 맥주마셔도 좋습니다. 누가 더 잘 살고 있는 것일까요? 재벌요? 마음에 재벌이 진정한 재벌이죠. 자연과 더불어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런 체험 필요 하신 분은 연락하세요. 딱 몇 분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큰 애로사항은 바로 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요즈음은 숙소야 어디를 가든지 시설 좋은 숙박업소가 많아 그리 걱정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먹거리는 다르다. 자칫 잘못 찾아 들었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정말 좋은 식당을 만나면 그날은 운수대통한 날이란 생각이다.

 

6월 17일(월), 평소 같으면 지역에서 땀 흘리며 취재를 하겠지만, 오랜만에 도시를 벗어났다. 마침 함께 동행을 할 사람이 있어, 여주군으로 향했다. 이번 여주군의 여행은 문화재 답사도 중요하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남한강의 보 주위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남한강에는 강천보, 여주보, 이포보 등 세 곳에 보가 설치되어 있다.

 

 

시간 늦은 점심, 답사 때마다 제 시간을 못 맞춰

 

답사를 하다가 보면 언제나 제 시간에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날 답사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천년고찰이라는 신륵사부터 들렸다. 신륵사는 언제보아도 좋은 절이다. 앞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주변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있기 때문이다. 이런 절을 찾아가면 그야말로 횡재를 한 기분이다.

 

오래 묵은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보물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보물만 6점에 보호수 2그루, 거기다가 지방문화재 등이 널려있는 곳이다. 신륵사는 매년 한 번 정도는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강에 세 곳의 보가 들어서고 주변이 직강하천으로 정리가 되면서, 무엇인가 달라진 것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제일먼저 찾아갔다.

 

여기저기 불사를 하느라 부산하기도 하다. 평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은 찾아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항상 사람들이 찾아오는 절집이기도 하다. 신륵사에서 나와 때 늦은 밥집을 찾아들었다. 신륵사에서 북내면 소재지로 찾아가다가 우측 다리를 건너 북내면 신접리로 들어섰다.

 

 

시간은 벌써 오후 2시 가까이 되었다. 아침을 일찍 챙겨먹은 것도 이럴 때는 탈이다. 동행을 한 분도 많이 시장 끼가 돌았을 텐데, 내 생각만 나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미안하기도 하다. 경치 좋은 곳을 찾다가 보면 너무 시간이 오래일 듯해 길가에 있는 집을 찾아들었다. ‘돈정’이라는 식당이다.

 

푸짐한 밥상,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여주군 북내면 신접리 180-1에 소재한 두루치기 촌밥상 전문인 ‘돈정’.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넓지 않을 것 같은 식당인데, 안으로 들어가니 방과 홀이 큼지막하다.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골치고는 시설이 꽤 깨끗하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손님들이 방에 차 있다. 메뉴판도 나무에다가 써 놓았다.

 

 

시골스런 촌 밥상이 한 상 차려진다는 안내문구와 함께 촌밥상의 메뉴가 보인다. 두루치기 촌밥상을 주문했다. 1인 분에 15,000원. 그리 싼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음식을 시켰으니 우선 나오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음식 운반차에 한 가득 실어 내오는 반찬들. 말마따나 반찬들이 시골에서나 만나 봄직한 것들이다.

 

음식이야 특별한 맛이 아니면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하지만 이 집은 자랑이 하고 싶다. 가격은 그런대로 싼 편은 아니라고 해도, 우선 벽에 걸려있는 문구들이 마음에 든다. 정성껏 내온 찬도 그렇지만, 하나라도 무엇인가 더 주고 싶어 하는 주인장의 마음이 따듯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시간 늦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가 만난 촌밥상 한 상. 함께 동행을 한 지인도 좋았다고 한다. 하긴 음식 맛이야 누구나 비슷한 입을 가졌으니 말이다.

전화 / 031) 883-9975 / 010-3944-7051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