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한 명성왕후 생가. 한 달이면 몇 번씩 이집 근처를 가면서도, 정작 생가를 찬찬히 들러보지를 못했다. 바람은 좀 불지만 날이 좋아 능현리로 향했다. 명성왕후 생가는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의 건물은 안채만이 남아 있었는데, 주춧돌이 남아있어 문화재위원들의 고증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다. 다만 일부 건물은 주춧돌이 없어져 복원을 못했다는 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황후가 태어날 만한 기가 응집된 곳

 

명성왕후 생가를 돌아보다가 보니 특이한 점이 있다. 생가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양편에 행랑채와 곳간, 측간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솟을대문 안으로는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는 중문에 연결되어 대청과 방으로 연결된다. 헛간을 두고 꺾여 중문채를 두었다. 중문과 사랑채, 중문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배치가 되었다. 안채는 ㄱ 자 형으로 부엌과 안방, 대청, 건넌방, 곳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안채와 중문채 사이에 일각문을 두어 별당채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명성황후 생가를 출입구는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을 들어가면 중문 곁에 붙은 사랑채의 마루가 된다. 일직선상에 놓인 대청은 솟을대문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집 주위를 두른 담장이 바람을 막는 것을 피해, 솟을대문과 마루를 일직선상에 놓아 바람이 맞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랑채는 마루와 방으로 연결이 되며 마루에 안으로 문을 내어 바람이 안채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중문은 사랑채의 마루에 붙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조금 비켜나 있다. 이 중문 안에 방과 헛간은 청지기가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안채의 부엌과 안방이 일렬로 배열이 되어있다. 안채는 중문을 들어가 방과 헛간, 부엌을 지난 후 ㄱ 자로 꺾여 있으며 대청과 건넌방, 곳간으로 마련되었다. 문제는 바로 이 건넌방이다.

 

 

대청을 지난 건넌방은 안채의 대청보다 높은 마루가 앞에 있다. 그리고 그 마루 밑에서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다. 이 건넌방은 솟을대문과 샤랑채의 마루, 그리고 건넌방이 일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집 뒤가 낮은 구릉인 명성황후 생가는 기(氣)가 이곳에 집결되는 형상이다. 솟을대문을 통한 바람이 사랑채를 마루문을 지나 이곳에서 아궁이로 들어가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들어온 기가 모이는 곳이다.

 

이곳 마루 밑에 아궁이는 무엇일까? 이 아궁이는 솟을대문을 통해서 들어온 기는 불로 부풀리고, 액은 태워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태어난 한 여자아이가, 후일 황후라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도록 한 요인이 바로 이 기가 모이도록 지은 집안의 구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좁은 대지를 최대한 활용한 기능성

 

명성황후 생가는 대지가 그리 넓지 않다. 원래는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을 관리하기 위해서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안채만 남아있던 이 집을 1995년 주춧돌을 근거로 사랑채와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였다. 묘막으로 지어진 집이라고는 해도 생가는 조선 중기의 살림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갖출 것은 다 갖춘 집이지만 넓은 대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집의 구조는 조금은 답답한 면도 있으나, 그런 점이 오히려 푸근한 느낌이 들게 한다.

 

사랑채와 중문채를 이어서 구성한 점도 그렇지만, 일반적인 반가의 집과 같이 집을 띄엄띄엄 지은 것이 아니고, 오밀조밀하니 붙여지었다. 앞으로 펼쳐지는 평지와 작은 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뒤편에 있는 구릉에 막히는 곳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형태의 집 구조가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여유를 보이는 별당채

 

안채와 사랑채의 담장이 이어지는 곳에 일각문을 통해 별당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별당채는 명성황후가 8세가 될 때까지 살던 곳이다. 별당채는 안채와 사랑채보다도 넓은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곳을 드나드는 문은 행랑채와 사랑채의 담에 연결한 일각문과, 안채에서 드나들 수 있는 일각문이 있다.

 

그런데 행랑채와 사랑채의 담장에 연결된 일각문은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다. 별당채는 안채보다도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다. 그런데 행랑채의 끝에 있는 초가로 만들어진 측간 곁에 별당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내었다는 것은, 우리 전통가옥의 구조상 어긋난다는 생각이다.

 

 

 

별당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이 별당채도 1995년 복원이 되었다. 별당채는 매우 간결하게 꾸며져 있다. 별당채는 정면 세 칸으로 좌측의 한 칸은 방으로, 우측의 두 칸은 대청으로 꾸몄다. 방과 대청의 앞으로는 길게 툇마루를 놓았다. 대청의 문은 들어 올리게 되어있어 여름이면 시원하고, 추운 계절에는 문을 닫아 보온을 하였다. 대청의 뒤는 판자문으로 막았는데, 대청 끝 우측 벽을 창호를 내어 멋을 더했다. 어린 소녀가 이곳에서 자라, 한 나라를 뒤흔들만한 역사의 중심에 서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굴뚝이 없는 거북등 연도와 부엌의 비밀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이상한 점이 있다. 연도는 있는데 굴뚝이 없다. 집을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굴뚝이 없다. 대신 거북이가 웅크리고 앉은 듯 한 연도가 있다. 안채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고 하니, 아마 이 집은 굴뚝을 세우지 않고 연도를 뺀 듯하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

 

우연히 이 집을 복원할 때 일을 맡아했다는 사람을 만났다.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복원을 할 때 안채의 부엌바닥을 조금 고쳤다는 것이다. 어째 옛 모습 그대로였다면 조금은 더 깊어야 할 부엌바닥이다. 그리고 우리의 부엌바닥은 조개무덤이 생긴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게 조개를 엎어놓은 듯한 형태로 바뀐다. 이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이다. 예전 어머니들은 이 조개무덤이 복이라고 하셨다. 많은 집들이 보수를 하면서 이런 조개무덤이 사라졌다.

 

 

부엌이 깊어야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방에 불을 때고 음식을 조리하려면 부뚜막이 있어야 하고, 그 부뚜막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서 방을 데우게 만든다. 그러려면 부엌의 아궁이가 깊어야 불길이 위로 잘 솟아 방이 빨리 뜨듯해진다. 아마 바닥 정리를 하면서 조금 돋은 듯 하다. 고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가옥의 이야기는 그래서 재미있다.

여막(廬幕)’이란 오두막집을 말한다. 사람이 기거하기 위해 짓는 정상적인 집이 아니라, 임시로 필요에 의해 일정기간 사용을 하는 움막이다. 그런데 이 여막은 일반적인 움막과는 다르다. 바로 선조의 묘 옆에 짓는 집이기 때문이다. 여막에서 생활을 하는 것을 우리는 ‘시묘살이’리고 부른다.

‘시묘(侍墓)’란 말 그대로 묘를 섬긴다는 뜻이다. 즉 성분을 하고 난 후 그 서편에 여막이라는 초막을 짓고 3년을 평소처럼 부모님을 모신다는 뜻이다. 시묘는 효의 근본이며, 가장 힘든 상례 중의 하나이다. 하기에 시묘를 마친 자손을 사람들은 극진히 대우를 하기도 했다.


2대에 걸친 시묘를 한 조씨일가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 소재한 문의문화재단지. 단지 안에는 묘와 함께 여막 한 채가 지어져 있다. 이 여막은 묘소 또는 혼백이나 신주를 모신 ‘궤연’ 가까이에 지어놓고, 탈상을 할 때까지 3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묘를 보살피는 것이다.

이 여막은 청원군 강내면 연정리에 한양 조씨 문중의 조육형과, 2000년 4월 작고한 부친 조병천이 대를 이어 시묘를 하였던 곳이다. 이 여막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고 있어, 효의 근본으로 삼고자 현지에 잇던 여막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을 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특히 부친 조병천은 1957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이나 시묘를 하였다. 그것도 하루도 빠짐없이 생식을 하면서 견디었다는 것이다. 선친묘소에 공장이 들어서자 이장을 하고 난 후, 또 다시 여막을 짓고 3년간을 다시 시묘를 했다고 한다.

효의 근본이 되는 여막

여막은 돌과 흙, 그리고 짚을 이용해 지었다. 3년이라는 시간을 눈비를 피할 수 있고,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해 돌을 쌓아 단단하게 지은 움막이다. 한편에는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안에는 만장과 상복 등이 걸려있다. 안은 제상 위에 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하루에 세 차례씩 제상을 차리고 상식을 올린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3년이라는 세월을 묘를 지키며, 생활을 일체 접어야 한다는 시묘살이. 요즈음에도 시묘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여 방송 등에 소개를 한 적도 있다. 효의 가장 근본이 된다고 하는 여막과 시묘.

아마도 ‘시묘’라는 말도 어찌 보면 ‘시집’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시집살이’라고 하는 것도 ‘시묘살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도합 9년을 보내야 시집살이에서 조금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말의 뜻처럼, 시묘살이도 그와 같은 힘든 나날은 아니었을까?


요즈음 패악으로 치닫고 있는 세상을 보면서, 여막과 시묘살이라는 것이 새삼 얼마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문의문화재단지 안에 소재하고 있는 여막. 물론 재현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우리의 부모에 대한 효에 대한 깊은 뜻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다시 한 번 깊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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