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 기온이 35도를 넘나든다고 한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른다. 사실 이런 날 취재를 하려면, 웬만한 정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도 한 낮 가장 뜨거운 시간에 취재란 그리 반길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취재를 다닌다는 것이, 어디 내 입맛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인가?

 

11일(일), 한 낮의 기온이 34도를 넘나든다고 한다. 시원한 소나기라도 한 줄기 쏟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늘도 제대로 없는 행궁동 일대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것이나 아닌지. 그래도 이왕 나선 김에 몇 곳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행궁 앞 분수대는 좋은 피서장소

 

행궁 앞 차도 가까이에는 분수대가 있다. 물줄기가 차이를 두고 솟아올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이 분수대에서 솟아오르는 물은 깨끗하다. 아이들이 아무리 뛰어놀아도 걱정할 염려가 없다. 어머니와 같이 놀 수 있는 도심의 분수대. 이런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원이 좋다고 한다.

 

“정말 이곳이 참 좋아요. 물론 수원천 물이 흐르는 곳에 들어가고도 싶지만, 냄새도 나고 조금은 꺼림직 하거든요. 그런데 이 곳 분수대 물은 정말 깨끗해요. 아이들을 이곳에 데려다 놓으면, 정말 여름 피서 딴 곳으로 갈 필요가 없어요.”

 

 

아이를 데리고 물놀이를 나왔다는 김아무개(여, 34세)씨의 말이다. 괜히 주변 수영장이나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면, 복잡하고 사람들과 부딪치기도 해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

 

“어머니들이 더 즐기는 것 같아요”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한 낮의 살인적인 더위가 조금은 가시는 듯도 하다. 그래서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송아무개(여, 32세. 남수동)씨는 가까운 곳에 이렇게 즐길 수 있는 분수대가 있어 정말 좋다고 한다.

 

“어머니들이 더 즐기는 것 같아요. 아이를 데리고 와서 저렇게 어머니들이 더 신나게 물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아마 어머니들도 아이처럼 마구 뛰어놀고 싶은가 봐요.”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어머니들이 물장난을 하면서 더 재미있어 한다. 아이들과 함께 물장난을 하는 어머니들. 그런 어머니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더 신나게 물놀이를 즐긴다. 그렇게 옷을 다 버려도 어머니에게 혼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함께 물놀이를 즐기는 어머니들이 아이를 혼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어릴 적으로 돌아간 기분이에요.”

 

아이와 함께 옷을 다 버려가면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 어머니 한 분.

“그렇게 옷을 다 버리시면 집에 가실 때 어떻게 하시려고요?”

“걱정 없어요. 잠시만 의자에서 쉬고 있으면 바로 말라요.”

“물놀이가 재미있으세요?”

“그럼요.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 같아요. 이렇게 도심 한 복판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면서 피서를 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 수원에서나 가능하죠. 그래서 수원이 좋아요. 괜히 길 막히는데 몇 시간씩 고생하고 가서, 바가지 써 가면서 왜 불쾌하게 피서를 해요. 작년에는 동해안으로 피서를 다녀왔는데,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요. 올해는 벌써 아이를 데리고 세 번을 나왔는데 아이도 즐거워하고요. 피서가 따로 있나요? 이렇게 깨끗한 물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으면 그것이 피서죠. 다음번에는 남편도 함께 나와야겠어요.”

 

 

하긴 피서가 별거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아이와 함께 즐기고 있는 어머니들. 아마 아이 핑계를 대고, 실은 어머니 본인들이 더 즐거워하는 것이나 아닌지. 구경만 해도 더위가 가시는 듯하다. 물놀이를 즐기는 어머니들을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괜히 아이들 핑계대고, 어머니들이 더 신나게 물놀이 하는 거 아냐?”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그리운 어머니

한평생을 자식 위해 살다 가신

우리 어머니

바다와 같은 사랑 제게 주시고

온 몸이 부서져라 일만 하시다

이 자식 효도 한 번 못 받으시고

밤하늘 별이 되어 저를 비추네

어머니 아~ 어머니 보고 싶은

우리 어머니

 

가수 이채영. 올 해 나이 47세에 음반을 냈다. 음반에는 시인 같은 인생, 허수아비 사랑, 보고 싶은 어머니, 토요일 오후 등 4곡이 노래와 MR로 수록되어 있다. 이름이 생소한 이채영이라는 가수는 과연 누구일까? 올 5월에 늦깎이로 첫 음반을 냈다는 그녀. 재능봉사로 노래를 하고 있는 가수 이채영에게 깊은 인생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처녀 때의 꿈인 가수를 접고 호주로

 

“아마 저는 어머니의 재주를 이어받은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 옛 노래를 잘하셨다고 하는데, 저도 어릴 적부터 노래를 좋아 했죠. 처녀 때는 가수가 될 꿈도 키워보았지만, 결혼을 하고 호주 시드니로 이주를 했어요. 그곳에서도 시드니 가요제에 나가 수상을 하기도 했고, 노래봉사도 했죠. 그러다가 2002년에 한국으로 아이들과 함께 나왔는데, 다시 시드니로 돌아가지 않고, 시민권을 포기했어요.”

 

그 때부터 혼자의 몸으로 아들 2명과 막내인 딸을 데리고 가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세상 물정을 잘 모르다가 보니 가까운 지인에게 속아 많은 것을 잃었다고.

 

 

“아마 그 사람도 지금은 속이 편치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별별 일을 다 해 보았죠. 어차피 숨길 것도 없잖아요. 내가 누군지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데, 무엇을 숨기겠어요. 그러나 아직 남을 아프게 한 적은 없어요. 그러면 잘 산 것이 아닌가요? 저는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요. 공부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인성이라고요. 사람답게 살라는 말이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그래서 수원에 와서 세류동에 거주하면서 안 해 본 일이 없단다. 전에는 잠시나마 세류지킴이 예능국장을 맡아도 보았고, 그 뒤 재능봉사를 하고 다닌다고 한다.  아마도 요양원을 찾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기 때문인가 보다.

 

“저는 어머니가 늘 그리워요. 그래서 제 음반에도 ‘보고 싶은 어머니’라는 곡이 들어있어요. 어머니께서 요양원에서 돌아 가셨어요. 제가 갈비집을 하다가 이리저리 다 날리고 너무 힘들어서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는데, 건강이 많이 악화되셨어요.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 깊은가 봐요. 지금도 요양원에 재능봉사를 하러 찾아가서 어르신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한 것이 많이 아파와요.”

 

1년이면 보훈처 등에 20회 정도 봉사를 다니고 있지만, 생활을 해야 하다 보니 더 자주는 못 간다는 것이다. 그런 것조차 미안하다고 말을 할 만큼 심성이 착한 그녀이다. 앞으로도 재능기부로 봉사를 계속하겠다는 그녀는, 봉사를 하고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시인 같은 인생을 살고픈 여인 이채영

 

속속들이 말 못하는 이 내 사연을

저 구름이 알아줄까 바람이 알아줄까

지나간 세월이 야속하지만

미련도 후회도 없을 것이다

막아보고 잡아 봐도 세월만 흐르네

남은 인생 사랑도 주고 정도 주다가

저 바람이 알려주는 길을 가면서

시인처럼 바람처럼 살자구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 ‘시인 같은 인생’이란 노래의 가사이다. 어쩌면 이 노래는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하는 노랫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모든 아픔을 다 훌훌 털어버리고 재능기부로 남은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는 늦깎이 가수 이채영.

 

 

“지금은 나아졌지만 처음에 요양원에 노래봉사를 갔을 때는 눈물이 나서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어요. 어머니 생각이 나서요. 그래서 앞으로도 딴 곳은 몰라도 요양원 봉사는 계속하려구요.”

 

7월 24일(수) 수원시 팔달구 월드컵 경기장 내 컨벤션 웨딩홀에서 열린 장애인들에게 삼계탕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만난 가수 이채영은 무대 위에서도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곳에 어머니를 그릴 수 있는 많은 어르신들이 함께 하고 있기에.

 

‘텃밭’이란, 그야말로 집 안 뜰 한편이나 귀퉁이에 작은 밭을 말한다. 요즈음은 이런 텃밭의 개념이 달라졌다. 흔히 주말농장이라고 해서 집에서 떨어져 있는 밭을 임대해 일 년간 농사를 짓기도 하니 말이다. 또는 대문이나 벽 밑에 화분 등 여러 가지 식물을 키울 용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집안에서 먹을 수 있는 채소 등은 스스로 키우기 시작했다. 집터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마당에 깔라놓았던 보도블록 등을 들어내고, 그 곳에 채소 등을 가꾸기 시작한 것이다. 농산물까지 수입품이 급증하자, 이제는 가족들을 위한 먹거리를 직접 재배를 한다는 것이다.

 

 

마음에 담겨있어 더욱 아름다운 텃밭들

 

시골에 사시는 어르신들은 땅 한 뙤기도 함부로 놀리는 법이 없다. 고추를 심거나 상추, 혹은 옥수수라도 심어 놓는다. 상추 같은 것이야 여름 내내 즐길 수 있으니, 그 또한 즐거움이다. 멀리 타지에 나가있는 자녀라도 찾아오면, 정성스레 텃밭에서 가꾼 상추며 고추 등으로 정성어린 밥상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집 뒤편 비탈에는 호박을 심는다. 이 호박 역시 가을이 되면 대개 자손들에게 나누어 줄 용도로 사용한다. 몇 포기 심지 않은 옥수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머니의 텃밭에는 별별 것들이 다 심겨져 있다. 그리고 그 몫은 순전히 자녀들의 것이다. 손수 품 들여 농사를 지은 것을 자손들에게 나누어 주는 어머니의 마음. 텃밭에 정겨운 것은 바로 그런 마음이 함께 자랐기 때문이다.

 

 

“그거 거름만 준 것이야”

 

어머니의 텃밭은 조그맣지만, 그 안에 들은 내용물은 그 어딴 것보다 값지다.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등 굽은 어머니가 산에서 부엽토 한 삽을 떠오시느라 땀을 흘리신다. 그리고 그 부엽토를 텃밭 여기저기 소복하게 쌓아준다. 텃밭에 심어놓은 채소들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머니, 채소가 참 자랐네요.”

“그거 비료 안 준 것이지. 아이들이 먹을 것에 벌레 좀 생긴다고 비료를 주면, 우리 아이들이 안 좋아질 것 아녀. 그래서 벌레도 내가 다 손으로 잡아주어”

 

어머니의 마음이 고맙다. 자손들에게 화학비료를 준 채소를 먹이지 않겠다고 뙤약볕에서 채소의 잎을 들춰가며 벌레를 잡고 있는 노모의 마음을 자식들은 제대로 알기는 할까? 텃밭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이런 마음 때문이다.

 

 

벌레를 잡겠다고 텃밭에 친 화학약품

 

시골에 텃밭이 있다면, 도심에는 작은 공간마다 놓인 화분 텃밭이 있다. 화분이나 스티로폼 빈 박스를 이용한 텃밭들은 별별 것이 다 심겨져 있다. 심지어는 작은 스티로폼 상자에 고구마도 보인다. 요즈음 도심의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잘 자라고 있는 채소들 덕분에 한결 기분이 맑아지는 듯하다.

 

그런데 한 곳을 보니 잎에 무슨 허연 반점들이 보인다. 벌레가 생긴 것을 걱정해, 화학약품을 준 것 같다. 집안 식구들이 먹을 것에 저렇게 잘 키운 채소에 화학약품이라니. 괜한 걱정이 앞선다.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곁으로 지나는 어르신이 한 마디 하신다.

 

“집에서 잘 키운 채소에 저렇게 화학약품을 주면 우짜노? 그냥 벌레 좀 먹어도 가족들이 먹을 것인데, 함께 나누어 먹어야지”

 

자연과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여유를 갖고 키운 채소. 그리고 그 텃밭에서 함께 자란 어머니의 마음. 텃밭의 미학이란 바로 그런 마음일 것이다.

자장가에 숨은 힘

 

우리소리의 힘은 어디까지 일까? 그 해답은 예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예전 부모님들의 품안에서 자라난 시대는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지금처럼 패륜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시대에 따른 불효야 있었겠지만, 그 불효라는 것이 지금의 패륜과는 차이가 있다. 왜 이렇게 세상이 각박하게 변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소리를 잃어버린 후다. 어머니의 살가운 정이 느껴지는 자장가를 잊고 난 후 아이들이 변한 것이다.

 

얼마 전인가 며칠 사이에 우리는 충격적인 뉴스를 연이어 접했다. 후배를 시켜 가족들을 죽인 사건. 강남에서 살고 싶어 어머니와 누나를 방화를 죽게 만들고, 본인은 그 시간 딴 곳에 놀라가 있었다는 얄팍한 머리를 쓴 사건이다. 더구나 출타 중이던 아버지를 범인으로 몰아가려고 했다는 이야기에 정말 어의가 없다. 며칠 후 술이 취해 어머니를 괴롭힌다고,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또 발생 해 세상을 경악시켰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왜일까?

 

 

자장가를 잃은 세대, 정이 없어

 

그저 우리 것은 모두 불량품이나 골동품 정도로 알고 있는 사고, 외국의 것이라면 ‘개똥도 보약’이라는 문화적 사대주의가 이 나라의 정신을 병들게 만들었다. 남이야 잘못 되어도 관계없다는 이기주의적인 발상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이다.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물론 가정교육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교육현실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본다.

 

인성을 제외하고 주입식 교육에 치중한 사회가, 이런 불행한 아이들을 양산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느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 음악교과서에 우리 전통에 대한 내용은, 고작 몇 분의 일도 안 된다고 한다. 왜 그래야만 할까. 교육이 정체성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우리는 교육이라는 중요한 사안을 놓고도, 자리배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필요로 할 것인가?

 

‘우리’라는 개념조차 알려주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국제화만 부르짖는 정책. 그리고 제나라 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남의 나라 말부터 가르치는 정책. 이런 것들이 우리 아이들을 황폐화시킨 것이다.

 

 

 

어머니의 자장가에는 모든 교육이 들어있어

 

그 자손이 추울세라 덮은데 덮어주고,

발치발치 눌러주시며 왼팔 왼젖을 물려놓고

양인양친이 그 자손의 엉둥이 허릴 툭탁치며

사랑에 겨워서 하시는 말씀이

은자동아 금자동아 은이로구나 금이로구나,

만첩청산의 보배동아 순지건곤의 일월동아,

나라에는 충신동아 부모님전 효자동아,

동네방네 귀염동아 일가친척의 화목동아

둥글둥글 수박동아 오색비단의 채색동아

채색비단의 오색동아

은을주면 너를사고, 금을준들 너를 사랴

 

회심곡의 한 부분이다. 이런 소리를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를 재우면서, 또는 등에 업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면서 불러주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 잘못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면서 아이들은 잠재적으로 이 소리를 기억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충신이고 효자로, 동네방네 사랑을 받는 예의가 바른 아이로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리는 잠재적인 기억으로 사람의 성격을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런 잠재적인 기억이야말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따스한 정을 느끼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소리를 듣고 자란아이, 나쁘게 될 수 없어

 

소리는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 검증이 되지 않은 이야기 같지만 사실이다. 어느 누구는 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슬프게 되어버렸다. 누구는 무명시절 ‘쨍하고’를 부르더니 그야말로 쨍하고 해가 떠버렸다. 이것이 바로 소리의 힘이다. 알지도 모르는 말을 떠들어 대면서 연신 건들거리고 사는 아이들이, 과연 온전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화! 세상 사람들아 오륜가를 들어보소. 부모 없는 자식 없고 임군 없는 신하 없다.

부모 공을 알려거든 제 자식을 길러보고, 군의신충 모르거든 효양부모 옮겨가리.

부모에 효도하는 사람이면 임군에게 충성한다.

존장을 존대하고 친구 간에 신 지켜라. 부부간에 화목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라.

이러고야 사람이지 저마다 사람이냐. 철모르는 짐승의 기특함을 들어보소.

 

오륜가(五倫歌)의 사설 중 일부분이다. 오륜가는 사람이 태어나 살아갈 도리를 알려주는 소리다. 이런 좋은 소리를 어릴 적부터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 나쁜 일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소리의 힘이다. 알게 모르게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은 성격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뛰어노는 아이들, 새를 보고 개구리를 보고도 그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이 바로 어머니의 따스한 자장가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다. 어머니의 자장가는 그저 입속으로 중얼거리듯 부르는 소리다. 특별한 곡조도 없다. 아이에게 사랑을 가득 담아 소리를 할 뿐이다. 그 소리 안에는 어린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러한 소리를 일어버린 요즈음의 아이들은 너무나도 황폐화 되어있다. TV에서는 선정, 폭력이 난무하고, 컴퓨터 게임에서는 살인과 폭력이 저질러진다. 이런 것을 보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바랄 것인가. 이제는 모두 정신을 차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삶의 소리, 사랑의 소리, 어머니의 가슴에서 울려지는 살가운 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피부로 맞닿는 소리를 듣고 자라난 아이들은 그 따스함을 온전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신 효자였다. <난중일기>에는 이러한 이충무공의 내력을 적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3년 6월에서 12월 사이에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를, 여수 웅천동 송현마을 정대수 장군의 집에 모셔다 놓고 수시로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하루는 노모를 뵙기 위해 일찍 배를 타고 송현마을로 문안을 드리러 왔는데, 기운이 많이 떨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군은 어머니를 뵈러 갈 때는 흰 머리카락을 모두 뽑고는 했는데, 이는 늙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해서였다고.


장군의 모친이 살던 집터를 찾아가다.

10일 아침 일찍 여수 수산시장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다. 여수에 사는 지인을 만나 함께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장군의 어머니께서 사셨다는 집터를 찾아갔다. 길가에는 ‘이충무공 어머님 사시던 곳’이란 푯말이 붙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요즘 주변 정리를 하느라, 한창 공사 중이다. 전남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 1420-1번지. 옛 집터 인 듯한 곳에는 거북선에 비를 세운 형상물이 있는데, 이 근처 어디인가 이충무공의 모친이 5년간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거북비가 서 있는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7칸 정도에, 측면 두 칸 반 정도의 팔작 겹처마 지붕으로 된 집이 있다. 현재 이 집은 사람들이 거주를 하고 있는데, 현재 거주를 하시는 분은 정평호(남, 79세)로 임지뢔란 시 활동을 하던 정대수 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분은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들이 대대로 이 터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고택다운 옛집, 1930년대 지은 것으로 전해져

현재의 집주인도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상 대대로 이 집터에서 살았다는 분들. 집터는 옛집 터지만, 집은 그동안 여러 번 개축을 한 것인지 옛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 이 집은 예전 충무공의 어머니께서 사시던 집은 아니다. 당시 발굴을 할 때 대들보 등이 발굴된 곳은, 현재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정평호옹이 살고 계시는 집의 부엌과 장독대에 걸쳐 있다고 전한다.

현재 주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 옛 선조들이 살던 집터에 나중에 보수, 개축을 했다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는 아마 사랑채나 별채에 기거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대수 장군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 선 안내문에 보면 「1972년 옛 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대들보, 마룻대, 세살창문과 같은 집 구조물과 맷돌, 디딜방아용 절구, 솥 같은 세간들을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 주변으로는 수령 300년이 넘는 팽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팽나무는 수고가 25m에, 나무의 둘레는 5.2m나 되는 거목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후 문화재지정도 고려 해

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사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주춧돌은 원형으로 다듬었으며, 그 위에 팔각기둥을 세웠다. 사방에는 처마 끝에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전체적으로 보아도 고택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배어있다.

여수시 문화재 관련 담당자는 내년에 발굴에 필요한 예산 신청을 했다고 한다. 발굴 후에 이 터가 정확하게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살던 집이라고 밝혀진다면, 이곳에 복원계획도 고려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현재의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만일 이 터가 발굴조사 후에도 정확한 고증이 들어나지 않는다면, 관광자원으로 활용을 할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난중일기에 밝혔듯이, 송현마을에 어머니를 모셨다고 기록이 있고, 현재의 집이 당시 정대수 장군의 집터이기 때문이다. 충신이요 효자인 이충무공의 어머니가 살았다는 집터. 그곳에는 충무공에 관한 역사를 안내판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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