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의 맞배지붕 양편에는 지붕 용마루 끝에서 벽을 따라 내려오는 구조물이 있다. ‘풍판’이라고 하는 이 구조물은 바람을 막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바람도 막고, 비바람에 건물의 벽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런 풍판은 대개 목재로 마련하고 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창군 고창읍 모양성로 88번지. 이곳에는 단군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단군성전은 전국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10월 23일, 고창군에 일이 있어 갔다가 길가에 한옥을 보고 올라갔는데, 계단 입구에 단군성전이라는 석비가 보인다. 비지정문화재인 이 건물은 계단 위에 솟을삼문과 그 안에 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학교 앞에 자리하고 있는 단군성전

단군성전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비탈진 곳에 계단을 놓고, 그 위에 마련하였다. 길가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들이 찾기에 편할 듯하다. 맞은편에는 고창여고인가 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보니 문이 굳게 잠겨있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때는 담장 밖을 몇 바퀴 돌아야한다.

그렇게라도 답사를 하는 것이 이제는 버릇처럼 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뒤편으로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다가 보니, 뒤 담장에 붙은 밭에서 노부부가 고구마 수확을 하고 있다. 어르신께 말씀을 드렸더니, 일 년에 한 번 개천절에 사람들이 모여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분이 열쇠를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직접 관리를 하는지 열쇠를 안 맡긴다는 것이다.




벗겨진 칠 속에 나타난 것은

“요 아래쪽에 낮은 담이 있어. 그리로 넘어가”

문이 잠겨 있더라고 말씀을 드리니, 어르신이 하시는 말씀이다. 딴 곳 같으면 월담이라도 하겠지만, 명색이 단군성전인데 어찌 담을 넘으랴. 이런저런 말씀을 듣고 나서, 다시 한 바퀴 돌아본다.

그런데 돌아보다가 보니 풍판이 영 이상하다. 칠이 벗겨진 것도 목재와는 다르다. 뒤편으로 돌아 칠이 벗겨진 곳을 바라보니 아무래도 양철인 듯하다. 앞으로 내려와 솟을문을 보았다. 벗겨진 칠 안으로 찍혀있는 글씨가 철판에 찍는 글씨이다. 풍판을 양철로 해놓았다. 비바람에 오래 견디어내도록 그리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명색이 단군성전인데, 그 건물의 풍판을 양철조각으로 해 놓았다니.




그래도 이 나라의 정신적인 지주인 단군이다. 그리고 우리는 늘 단군의 후손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 단군을 모신 사당의 건물, 양철로 마련한 풍판은 칠까지 벗겨져 흉물이 되었다. 문이 잠겨 있는 것이야 어쩔 수가 없다고 하지만, 양철 풍판을 보고는 울화가 치민다. 비지정문화재라고 해서 이렇게 대우를 하는 것일까?

지정, 비지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군의 제를 모시는 곳을 이런 식으로 홀대를 했다는 것이 화가 나는 것이다. 아무리 의식이 없어도 그렇지, 어찌 풍판을 양철로 댈 생각들을 한 것인지. 큰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제발 제대로 된 풍판하나 마련해주길 원한다. 앞쪽 학교의 학생들이 이런 몰골을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 것인지. 낯이 뜨거워 오래 지체할 수가 없다.



참 이런 정체성 없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것인지. 도대체 이런 황당한 일을 만날 때마다, 답사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아무리 상처를 받는다고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비한국적인 인간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예전에는 지붕 처마 끝에 양철로된 물받이를 만들었다. 요즈음도 시골에 가면 심심찮게 이런 양철로 된 물받이를 볼 수가 있다. 우리 한옥이야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제격이라고 하지만, 그 물이 튀어 오르면 별로 달갑지 만은 않기 때문이다.

양철 물받이의 한편에는 대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수통을 단다. 그리고 그 위에는 새 주둥이를 만들어 달기도 해서 그 주둥이를 통해 물이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그런 새 주둥이는 볼 수가 없고, 그저 수통만 물받이 끝에 달아 놓는다,

물받이에 오려 붙인 새 한 마리


그런데 참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제목이 딱 맞을듯하다. 그 물받이 주둥이에 새를 한 마리 오려 올려놓았는데, 그 앞 양철위에 어떻게 풀 한 포기가 자라게 된 것일까?

위로 올라가 보았지만 풀이 자랄만한 환경도 아니다. 그저 지붕에서 씻겨 내려온 척박한 흙 조금이 모였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풀이 자라나고 있을까? 더구나 그 풀이 자라나는 곳이 하필이면 왜 새 주둥이 앞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희안하달 수 밖에.




참으로 절묘한 모습이다. 더구나 그 풀을 바라다보고 있는 양철을 오려 만든 새 한 마리가 미소를 띠우고 있는 것만 같다. 아마 일부러 저렇게 만들려고 해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펄 물받이 위에 오려붙인 새 한 마리와 그 앞에 풀 한 포기. 더운 여름 타는 목을 풀이라도 먹고 추기라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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