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하리, 상왕산 영탑사의 우뚝 선 암벽에 돋을새김 한 높이 3.5m의 마애불이 있다. 원래는 연화봉 자연 암반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던 것이었는데, 유리광전이라는 전각을 지어 보존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에 새겨진 그대로였다면 좋았을 것을, 오히려 전각이 마애불의 멋스러움을 가로막은 듯한 느낌이다.

 

이 마애불은 약사여래마애불이다. 약사여래는 인간의 질병과 함께 무지(無智)까지도 고쳐준다는 부처님이다.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은 고려말기의 마애불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무학대사가 조성했다는 영탑사 마애불

 

영탑사 마애불은 무학대사가 조성을 했다고 한다. 고려 말기 무학대사가 전국을 돌아보면서 도읍터를 찾고 있을 때, 이곳에 들렸는데 바위에서 이상한 빛을 내고 있었다. 대사가 가까이 가니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보이고, 그 바위에서 아름다운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고. 이를 이상히 여긴 대사는 이 바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여기에 불상을 조각해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는 것이다.

 

현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악사여래 마애불은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지막하게 표현이 되어있다. 얼굴은 윗부분은 넓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가름해진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길게 표현하였다.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라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영탑사 마애불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무학대사님 조각 실력이 영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세련되지는 못했으니 친근한 마음이 들어

 

눈과 코, 입은 길고 큼직한데 다소 서투르게 표현을 하였다. 그런 조각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둔한 느낌을 준다. 이런 유형의 마애불은 고려 말기 이 지역의 마애불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형태이다. 마애불을 조각한 바위는 인근 바위와는 다르게 하나의 산처럼 생겼는데, 마애불은 근엄한 부처이기 보다는 친근함이 드러나는 형태이다.

 

그리 크지 않은 암벽 면에 조각을 한 탓인지, 몸은 사각형으로 건장하나 움츠린 듯한 느낌이 든다. 무릎 또한 높고 넓어서 얼굴과 함께 둔중함을 나타낸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치고 있으며, 가슴께는 V자 형으로 되어있어, 유려하지가 않다. 안에는 속옷이 표현되어 있으며, 굵은 선으로 새긴 옷주름은 오랜 세월동안 마멸이 심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은 둔중하면서도 친근미가 느껴지는,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병을 고쳤다고 소문이 나 있다. 아마도 무학대사의 마음이 전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어! 여기 마애불 사진이 또 있었네

 

영탑사 마애불을 답사하고 난 후, 집에 와서 사진 정리를 하다가 무엇인가를 잘 못 만졌는가 보다. 사진이 보이지를 않는다. 일반적으로 답사를 하면, 문화재 한 점을 30~40장 정도를 찍는다. 물론 고택 등을 답사할 때는 그보다 더 많은 양을 찍기도 하지만.

 

그런데 사진이 보이지를 않는다. 세세하게 찍어 온 사진이 온데간데없다. 마애불을 촬영하면 모든 부분을 세세하게 찍어오는데, 도대체 어찌 된 것일까?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 몇 시간을 땀을 흘리고 마음을 졸이면서 카메라를 만져보았지만 단 한 장의 사진밖에 눈에 띠지가 않았었다. 그런데 몇 장이나 되는 사진이 보인다. 순간적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친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있나, 이 사진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전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단 한 장의 사진 밖에는 보이지가 않았는데 정말 희한하다. 답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지만, 이렇게 이상한 일을 당한 마애불이다. 영탑사 마애불이 그래서 더 영험한 것은 아닐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갑사석조약사여래입상(甲寺石造藥師如來立像)’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번지, 계룡산 갑사 경내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이 만들어진 시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갑사의 동쪽 계곡 약 100m 지점, 자연 동굴 안에 있는데, 원래는 갑사 뒷산의 사자암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이 갑사의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서 있는 자리는, 갑사 경내에서 우측 계룡산으로 오르는 등반길 곁이다. 여래입상이 바라보는 곳은 갑사계곡의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곳으로, 갑사구곡의 제6곡인 명월담의 물이 모이는 곳이다. 그만큼 차고 맑은 물이 바로 앞을 흐르고 있어, 이 자리에만 가도 절로 몸 안에 병이 씻기어 나갈 듯하다.

 

 

고려 중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

 

이 석조약사여래입상의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인 육계가 큼직하게 조성이 되어있고, 얼굴은 긴 편이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 입었으나, 가슴을 약간 노출시키고 있다. 법의는 무릎 아래까지 늘어져 있으며, 가슴 아래로는 반원형의 옷주름으로 표현하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쪽 어깨 부근에서는 한 가닥의 주름이 어깨너머로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양 팔은 가슴까지 끌어 올렸으며, 손 모양을 살펴보면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제작 연대가 미상인 이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전체적인 구성미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석조불상으로 추정된다.

 

 

치성 드린 술, 그대로 계곡에 쏟아

 

공주 갑사를 다녀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지난 7일에 다녀왔으면서도, 중간에 이것저것 기사를 쓸 일이 많다보니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다. 벌써 20여 일이 훌쩍 지나버렸으니, 문화재 답사를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 30년 가까이 문화재 답사를 계속했으면서도, 아직도 이렇게 글을 바로 쓰는 버릇을 갖지 못하고 있다.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을 찾아가던 날, 그 곳에는 몇 사람의 여인들이 막 치성을 끝내고 있었다. 모습들을 보니 아무래도 무속인들 같다. 술병을 챙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불자들 같으면 약사여래입상에 굳이 술병을 들고 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진촬영을 하기 전 잠시 석조여래입상 앞에 고개를 숙이고 참례를 한다.

 

황급히 술병을 감추는 사람들 앞에서 사진을 함부로 찍을 수가 없어 잠시 기다린다. 카메라만보고도 놀라 술병에 담긴 술을 황급히 따라버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래 계곡 가까이 가니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렇게 치성을 드리고 난 뒤 막걸리며 소주 등을 그냥 계곡에 버리고 가는가 보다. 명산이라는 곳 계곡에 들어가면 이런 일을 하도 많이 목격했기 때문에 이젠 나도 무엇이라고 말도 하지 않는다. ‘쇠귀에 경읽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약사여래님 정말 효험이 있죠.”

 

잠시 계곡 촬영을 하고 있으려니 40대로 보이는 여인 한 사람이 약사여래입상 앞에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절을 하는 것만 보아도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전국의 사찰을 문화재를 답사한다고 수없이 돌아다니면서, 이제는 절을 하는 모습만 보아도 간절함의 척도를 알 수가 있을 정도이다.

 

곁으로 다가서니 사진은 찍지 마세요.”라고 한다. 그럼 사진만 찍지 않으면 질문은 괜찮다는 말이 아니던가?

오늘 처음 오셨나요?”

아뇨, 여러 번 다녀갔어요.”

이 정도면 쾌재를 불러도 될 듯하다. 답이 시원하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잡 안에 환자가 있어서요.”

,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리고 좀 나아셨나요?”

그럼요. 왔다가 가면 조금씩 나아지고는 해요. 그러니까 이 멀리까지 와서 불공을 드리죠.”

 

 

대답은 거기까지였다. 차 시간이 바빠서 얼른 불공을 드리고 돌아가야 하니, 더 이상은 말을 시키지 말라고 한다. 사실은 누가 아픈 것인지, 어떻게 아픈 것인지, 차도가 얼마나 있는지 등을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이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고, 이곳을 다녀가면 좋아진다고 믿고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물을 수 있으랴. 다시 한 번 발치 끝에서 고개를 숙이고 나서 걸음을 옮긴다. 나야 세상 모든 아픈 이들을 위해 통으로 드린 서원이지만.

전북 남원시 도통동에 소재한 천년고찰 선원사.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절이다. 도선국사는 남원의 지세가 객산으로 힘이 센 교룡산을 누르고, 주산으로 힘이 약한 백공산을 복돋아야 남원이 번창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고, 백공산의 모체는 천황봉 밑 만행산 줄기이므로 만행산의 힘을 빌어 교룡산의 힘을 누르고자 백공산 날줄기 끝에 선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천년고찰 선원사는 현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선원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철조여래좌상과, 약사전, 대웅전, 범종 등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남원팔경 중 '선원모종'이 들어있는 유명한 절이다. 이 고찰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작은 일주문 안으로 절집을 들여다본다. 한때는 30여채의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곳이다. 범종각 앞에도 가을은 깊어간다.




가을은 절집 어디에나 자리하고 있다. 절집 안에 피어있는 가을꽃들이 이제 절정에 달했다




선원사는 돼지감자차를 생산하는 곳이다. 절집 여기저기에도 꽃들이 가을을 알린다. 그리고 수확을 하고 난 밭에도 노란 은행잎들이 떨어져 가을이 깊었음을 이야기한다.



밭에서 수확을 한 형형색색의 호박들이 정겹다. 그리고 이 고찰에는 봉춤을 추는 봉순이가 산다. 

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하리, 상왕산 영탑사의 우뚝 선 암벽에 돋을새김 한 높이 3.5m의 마애불이 있다. 원래는 연화봉 자연 암반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던 것이었는데, 유리광전이라는 전각을 지어 보존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에 새겨진 그대로였다면 좋았을 것을, 오히려 전각이 마애불의 멋스러움을 가로막은 듯한 느낌이다.

이 마애불은 약사여래마애불이다. 약사여래는 인간의 질병과 함께 무지(無智)까지도 고쳐준다는 부처님이다.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은 고려말기의 마애불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무학대사가 조성했다는 영탑사 마애불

영탑사 마애불은 무학대사가 조성을 했다고 한다. 고려 말기 무학대사가 전국을 돌아보면서 도읍터를 찾고 있을 때, 이곳에 들렸는데 바위에서 이상한 빛을 내고 있었다. 대사가 가까이 가니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보이고, 그 바위에서 아름다운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고. 이를 이상히 여긴 대사는 이 바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여기에 불상을 조각해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는 것이다.

현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악사여래 마애불은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지막하게 표현이 되어있다. 얼굴은 윗부분은 넓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가름해진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길게 표현하였다.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라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영탑사 마애불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무학대사님 조각 실력이 영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세련되지는 못했으니 친근한 마음이 들어

눈과 코, 입은 길고 큼직한데 다소 서투르게 표현을 하였다. 그런 조각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둔한 느낌을 준다. 이런 유형의 마애불은 고려 말기 이 지역의 마애불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형태이다. 마애불을 조각한 바위는 인근 바위와는 다르게 하나의 산처럼 생겼는데, 마애불은 근엄한 부처이기 보다는 친근함이 드러나는 형태이다.

그리 크지 않은 암벽 면에 조각을 한 탓인지, 몸은 사각형으로 건장하나 움츠린 듯한 느낌이 든다. 무릎 또한 높고 넓어서 얼굴과 함께 둔중함을 나타낸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치고 있으며, 가슴께는 V자 형으로 되어있어, 유려하지가 않다. 안에는 속옷이 표현되어 있으며, 굵은 선으로 새긴 옷주름은 오랜 세월동안 마멸이 심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은 둔중하면서도 친근미가 느껴지는,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병을 고쳤다고 소문이 나 있다. 아마도 무학대사의 마음이 전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단 한 장의 사진이 남아

영탑사 마애불을 답사하고 난 후, 집에 와서 사진 정리를 하다가 무엇인가를 잘 못 만졌는가 보다. 사진이 보이지를 않는다. 일반적으로 답사를 하면, 문화재 한 점을 30~40장 정도를 찍는다. 물론 고택 등을 답사할 때는 그보다 더 많은 양을 찍기도 하지만.

그런데 사진이 보이지를 않는다. 세세하게 찍어 온 사진이 온데간데없다. 마애불을 촬영하면 전 부분을 세세하게 찍어오는데, 도대체 어찌 된 것일까?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 몇 시간을 땀을 흘리고 마음을 조리면서 카메라를 만져본다. 그런데 단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적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친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있나, 이 사진은 어떻게 남은 것일까? 아마도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이 사진을 찍어 영험이라도 사라진다고 생각을 하신 것일까? 아니면 내가 촬영을 하면서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일까? 답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지만, 이렇게 이상한 일을 당한 마애불이다. 영탑사 마애불이 그래서 더 영험한 것은 아닐지.

여름철 답사는 평탄치가 않다. 특히 산에 문화재가 있는 경우에는 곤욕을 치르기가 일쑤이다. 비가 오고 난 후 부쩍 키가 자라버린 각종 풀이며, 넝쿨들이 길을 가로막기가 일쑤이며, 땀 냄새를 맡은 날파리며 산 모기들이 극성스럽게 달라붙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여름철의 문화재 답사이다.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에는 전남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담양 분향리 석불입상’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길을 지나다가 이정표가 보여 무작정 찾아들어간 곳이다. 그러나 마을 분들에게 물아보아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시겠다는 대답이다. 마침 어르신 한 분이 지나시다가


“그 돌부처 저 산 위에 있어. 이리로 돌아 올라가“

라고 말씀을 하신다. 마침 알려주신 곳으로 가니 작은 토굴 하나가 있고, 그 앞에 안내판이 걸려있다.

가로막힌 풀을 헤치고 산을 올라

작은 암자처럼 생긴 산 밑 절로 들어갔다. 이곳에 석불입상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런데 대답은 산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있다고 한다. 처음엔 그래도 길처럼 나 있더니, 조금 더 올라가니 대와 풀들로 인해 길이 사라졌다. 아침부터 길을 찾느라 애를 먹었는데, 이 곳 역시 남다를 바 없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대밭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나마 길의 흔적이 남아있어 다행이다. 날파리와 모기떼가 달라붙는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것이 여름철 문화재 답사의 가장 큰 고통이다.


대숲으로 들어가 대나무 잎을 헤쳐 가며 산길을 오르다보니 저만큼 석불입상의 윗부분이 보인다. 석불입상 주변은 모두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놓아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자연과 스스로 어우러진 모습을 기대했는데, 영 사각으로 발라놓은 시멘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랜 풍상에 훼손이 된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은 연화좌대와 불상이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이 되어있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는 낮아 거의 민머리 형태이다. 얼굴은 둥글넓적한데 귀는 짧은 편인데 거의 알아보기가 힘들고, 코는 누가 떼어내 시멘으로 발라놓았다. 전체적인 표정은 둔화된 모습이다. 양 눈썹 사이와 코, 입 등은 형식화 되어있으며, 마모가 심해 자세한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다.




이 석불은 2m가 넘는 비교적 큰 불상이다. 전남지방에서는 이렇게 큰 석불입상이 그리 흔하지가 않다.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게 선각되어 있는데 간격이 넓게 표현하였다.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에서 굵은 곡선으로 물결모양을 그리다가, 양쪽 다리 밑으로 내려오면서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외곽으로는 한 줄 띠를 돌려 마무리를 하였으며, 양쪽 팔에 걸친 옷자락은 직선으로 길게 늘어뜨려 다리 하단으로 내리뻗어 있다. 팔에 걸린 법의의 소매 끝자락은 약간 밖으로 외반되어 옷 주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발은 길게 늘어진 옷주름에 가린 채 발등만 보인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발밑에 놓인 연화대좌는 8각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16잎의 앙화가 아래로 향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수인이다. 양쪽 손바닥을 안으로 구부려 서로 대치하게 하여 허리춤에 대고 있다. 특히 왼손에는 약병을 쥐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약사여래석불입상으로 볼 수 있다. 뒷면은 머리 부분에서 두발이 보이며 그 외에서는 평평하게 처리하였다.

조성시기가 고려 전기로 추정되는 이 석불입상에서 보여주고 있는 옷주름 양식이나 수인 등은, 보기 힘든 특이한 기법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이 조금은 편안하지 않은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석불입상의 형태가 뒤로 약간 젖혀져 있어 거만스런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저렇게 거만한 모습으로 서 계신 것일까?


아마도 손에 든 약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쳤기 때문은 아닌지. 달라붙는 모기들을 쫓아내며 괜히 헛웃음을 날린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 산으로 들로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그런 황당한 생각이 힘든 답사 길을 조금은 가시게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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