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찾아가기도 쉽지가 않다. 도로 이정표에 적혀있는 사찰명 하나만을 갖고 찾아 나선 절이다. 백련사,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가실리 신43번지. 주소를 알았다고 하면 내비게이션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절이었지만, 그저 이정표의 화살표 방향만 보고 따라갔기 때문에 애를 먹었다.

 

용인 에버랜드를 지나 도로로 마장IC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산길로 들어가다가 또 다시 오래된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갔다. 아마도 거의 산길을 3km 정도를 돌아 돌아 찾은 것만 같다. 일반차량은 들어갈 수 없다는 안내판에서도 한참이나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절. 백련사는 그렇게 심산유곡에 자리하고 있었다.

 

 

신라 애장왕 2년에 창건한 백련사

 

백련사는 용인시 전통사찰 제54호이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 1791년 석담대사가 쓴 약사에 보면 신라 애장왕 2년인 801년에 선응선사에 의해서 창건된 고찰이다. 고려 경종 원년인 1399년에 천공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조선 태종 4년인 1404년에 무학대사가 중건하면서 18 나한상을 조성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현종 12년인 1671년과 정조 11년인 1787년에 수경스님과 석담 스님에 의해 각각 중건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종 18년인 1891년에 편찬된 용인현 읍지 사찰조에 백련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도 사찰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 거의 폐사가 되었던 백련사는 청신녀 청정월의 화주로 요사와 법당을 중수하였고, 성월스님의 중창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석불상 1구와 조선후기 나한상 13, 수경스님의 부도 등이 남아있다. 당우로는 대웅전, 산신각, 나한전, 요사, 종각 등이 있다.

 

가파른 계단 위에 자리해

 

주차장에서 백련사의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 계단 중앙서부터 위까지 3층으로 된 전각은 방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수행을 하기 위한 방으로 보인다. 그 전각의 중앙으로 경내의 삼층석탑의 상륜부가 보인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우측에 종각이 있고, 앞으로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의 우측 조금 위로는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대웅전의 좌측으로는 지장전이 있다. 그리고 지장전 좌측으로 소대와 조금 떨어져서 나한전이 자리한다. 나한전은 원형으로 만들었으며 기와와 황토를 이용해 특이하게 조성을 하였다. 나한전 앞에서 절 경내를 내려다본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석가모니불의 진신 사리탑이라고 한다.

 

절을 들어가 대웅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심산유곡에 자리한 사찰치고는 대웅전이 큰 편이다. 창호는 꽃창살로 조성을 해 아름답다. 나한전 앞은 유리로 막아놓아 안이 들여다보인다. 수미단의 위에는 작은 나한들이 여러 형태로 좌정을 하고 있다. 아마도 저 나한상들이 조선후기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내려오니 커다란 사자를 닮은 개 한 마리가 마당에 앉아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사람이 가까이 가도 영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그저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는 듯한 자세이다. 절에서 오래 살다가 보니 해탈의 경지라도 이른 것일까? 축대 밑에 있는 샘에 가서 물 한 잔을 떠 마신다. 내장까지 다 시원해진다.

 

이렇게 깊은 산 속에 자리하고 있는 절의 물이니 얼마나 그 맛이 좋을까?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 이 물이야말로 정말 깨끗할 것이란 생각이다. 고즈넉한 고찰에서 마시는 물 한 대접. 이 물로 인해 세상에서 묻힌 허물을 조금이라도 가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저 이런 절에서 며칠만 살 수만 있다고 해도 세상 시름을 다 놓을 것만 같다.

감악산 연수사. 그 이름만큼이나 어느 오랜 옛날, 꿈속에서 돌아본 듯한 정겨운 이릉이다. 6월 10일, 한 낮의 온도가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시간에, 감악산 연수사를 찾았다.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에 소재하는 연수사는, 해발 951m의 감악산 기슭에 자리한 절이다. 연수사를 찾은 것은 경내에 있는 수령 600년이 지났다는 은행나무가 보고 싶어서이다.

연수사는 신라 애장왕 3년인 802년에, '감악조사(紺岳祖師}‘가 현 사찰 남쪽에 세우려 했던 절이다. 이 연수사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감악조사가 절을 짓기 위해 서까래를 다듬어 놓았다. 그런데 잠을 자고 일어나니,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큰 통나무 기둥이 사라진 것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 연수사 은행나무

서까래가 옮겨진 곳에 터를 잡은 연수사

아침에 주변을 살펴보니 현 연수사 대웅전 자리에 서까래가 놓여있어, 그 자리에 대웅전은 짓고 가람을 이룩했다고 한다. 연수사는 조선조 숙종 시에 벽암선사(1575-1660)가 사찰을 중수하고, 십여 사원을 지어 불도를 크게 일으킨 절이라고 한다. 연수사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바위 구멍에서 떨어지는 맛 좋은 샘물이 있으며, 극심한 가뭄에도 절대로 마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라의 헌강왕은 이 샘물을 먹고 중풍을 고쳤다고 전해지고 있어, 연수사의 물이 병 치료에 좋기로 소문이 나 있으며, 이 물은 사철 물 온도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이 연수사를 오르기 전에 만나는 일주문을 바라보고, 좌측에 수령이 600여년이 지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여승이 심었다고 전하는 연수사 은행나무

예전이나 지금이나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연수사 은행나무도 애틋한 세상사의 이야기 한토막이 전한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연수사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육백여년 전 어느 젊은 여인이 10살 먹은 자신의 유복자와 이별을 하고 비구니가 되면서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두 모자는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전나무를 심고 어머니는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전나무는 1980년 경 강풍으로 부러져 없어지고 은행나무만 남았다는 것이다. 연수사 은행나무는 높이가 38m에, 밑동둘레가 7m나 되는 거목이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는 동서로 21m, 남북으로 20m 정도에 이른다.



물맞이 시설, 땀을 흘리며 찾아갔는데

연수사 일주문 곁에 있는 은행나무를 돌아보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양편에는 누군가 돌탑을 여러 개 쌓아놓았다. 이렇게 돌탑을 쌓은 사람은, 돌 하나를 놓으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대웅전 우측으로는 호리병에서 물이 흐른다. 아마도 저 샘물이 그 용하다는 물은 아니었는지. 대웅전 뒤편 산비탈에는 크지 않은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절을 한 바퀴 돌아 내려와 일주문 앞 암석에 잠시 다리를 뻗는다. 눈앞에 물 맞는 곳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180m. 천천히 걸어 산길로 접어든다. 아름드리 고목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린다. “딱딱딱딱...” 더운 여름 날 그 소리가 마치 청량음료 한 잔을 마신 듯한 기분이다.

저만큼 강돌로 쌓은 구조물이 보인다. 끈끈한 몸을 물이라고 적실 요량으로 달음질을 쳐 구조물 안으로 들어간다. 한편에는 여탕이라는 간판이 놓여있다. 그 반대편으로 들어가니 입구를 꺾어 안으로 들어가게 조성을 하였다. 당연히 물이 쏟아질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물기 하나 없이 마른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물을 연결한 물길과 호스가 따로 떨어져 있다.




갑자기 목도 마르고 더위가 몰려온다. 괜히 이마에 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이다. 속으로 투덜대면서 돌아 나오는 길에, 저 밑으로 거창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별로 올라온 것 같지가 않은데, 꽤나 지역이 높은가보다. 심호흡을 한 번하고 산길을 돌아 나오니 은행나무가 보인다. 그 오랜 시간 저리고 꿋꿋이 서 있는 은행나무.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음이 후회스럽다. 저리도 불평 없이 오랜 세월을 서 있는데, 나는 그 작은 것 하나에도 순간적으로 혈기를 내다니. 또 한 번의 부끄러움에 허한 웃음을 허공에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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