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힘들게 만나는 것은 역시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그 특성상 낮은 지역보다는 산 정상 부근의 암벽에 많이 조성을 하기 때문이다. 마애불은 나에게는 특별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마애불을 따로 한 권의 책으로 엮고 싶은 것이 내 바람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10-1번지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인 ‘삼막사마애삼존불(三幕寺磨崖三尊佛)’이 소재한다. 조선조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마애삼본불은 삼막사의 칠성각 내에 봉안되어 있다. 마애불은 암벽을 얕게 파고 조성하여, 칠성각이 전실 역할을 하고 있다.

 

 

걸으면 지쳐버릴 듯 높은 마애불

 

지금은 삼막사까지 차로 올라갈 수가 있다. 물론 절집의 관계자들이 아니고는, 쉽게 그 길을 차를 몰아 갈 수가 없다.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으면 한 시간 30분 정도가 소요가 된다.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 이곳을 걸어 올라가다가 보면 지칠대로 지친다. 땀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저 얼굴 전체에서 샘이라도 솟는 듯하다.

 

그렇게 산 정상부근에 있는 마애삼존불이다. 삼막사 대웅전에서 이 마애불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다. 지금은 계단으로 길을 잘 만들어 놓아 오르기가 수월하다. 삼막사 남녀근석을 앞에 두고 바위에 붙여 조성을 한 칠성각. 전각의 앞에 걸린 현판에는 ‘칠보전’이라고 적고 있다. 그 안에 마애삼존불이 바위에 부조로 조각이 되어있다.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본존불

 

이 마애삼존불은 조선조 영조 39년인 1763년에 조성이 되었다. 삼존불을 모신 칠성각이 영조 40년인 176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볼 때, 이 본존불은 칠성각의 주존인 치성광여래로 볼 수 있다. 삼존불은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을 거느린 삼존불로 모두 연화좌 위에 앉아 있다.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본존불은 소발의 머리에 작은 육계가 있고, 전면에는 계주가 표현되었다. 그 은은한 얼굴에 미소가 후덕하게 보인다. 이런 상은 마애불 중에서도 그리 흔치가 않아, 이 마애불을 조성한 장인이 기능적으로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상호에는 눈두덩이 부푼 눈과 보수한 삼각형의 짧은 코, 작은 입 등이 묘사되었다. 어깨에 닿는 긴 두 귀와 얼굴에 연이어 어깨가 시작되어서 목은 달리 표현되지 않았다.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에는 내의의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불신의 전면에는 두꺼운 옷주름이 표현되었는데, 양 손은 복부에 모아 여의주를 들고 있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일광, 월광보살

 

보존불의 좌우의 보살상 역시 머리에 쓴 삼산관과 가슴에 모은 수인을 제외하면, 본존불과 같은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 마애불은 전체적인 모습을 볼 때, 얼굴과 당당한 어깨 등 상체의 표현에 치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렇게 마애삼존불로 치성광여래가 남아있는 것은 매우 희귀한 예이다.

 

 

6월 16일, 오랜 가뭄으로 인해 대지는 더욱 뜨거웠다. 한 낮의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산길을 걸어 만난 삼막사 마애삼존불. 처음 만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볼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에 소재한 삼막사. 삼막사의 내력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5호인 ‘삼막사사적비’에 보면, 신라 문무왕 17년인 577년에 원효, 의상, 윤필 등이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성산’이라는 명칭도 이때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사적비는 조선조에 세워진 것이지만, 그만큼 삼막사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사찰이라는 것이다.

 

비문에는 신라의 원효(617-686)등이 창건하고 도선국사(827-898)가 중건하여 ‘관음사’라고 개칭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 후 고려 태조가 중수하여 삼막사라 하였고, 여말 선초에는 나옹, 무학 등의 고승이 오래 머물면서 선풍을 드날린 고찰이라는 것이다. 그 뒤 조선 태조 때 왕명으로 중수되었다는 등의 사실이 적혀있다.

 

 

사적비를 지나 오른 산신각

 

사적비는 삼막사 경내를 들어서면 좌측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 위쪽에 자리한다. 이 사적비를 지나면 바위를 직접 깎아서 조성한 돌계단이 있다. 삼막사 인근은 바위가 많은 곳으로, 삼막사에는 남녀근석과 마애불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사적비를 촬영하고 있는데, 여러 사람이 곁을 지나 위로 올라간다. 그 위편에는 전각이 보이지를 않는데, 바위에 대고 수없이 절을 한다. 도대체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저렇게 산 쪽을 향해서 절을 하는 것일까?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보았다.

 

밑에 산신각이란 이정표는 있는데 정작 위편에 전각이 보이지를 않아 의아해했는데, 계단 위를 올라서는 순간 그 모든 의문이 풀렸다. 바로 바위를 안으로 깊이 파내고 그 곳에 산신을 새겨 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보이지 않는 전각은 바로 이렇게 바위에 산신각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힘들었지만 기분 좋은 답사

 

삼막사 입구 주차장에서 삼막사까지 올라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날 오른다고 생각을 하면, 처음부터 한숨부터 나온다. 그런 가파른 오르막길을 물도 없이 한 시간 넘게 걸어 올라가보지 않은 사람은, 그 답사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올라가 만난 절 삼막사. 전통사찰인 삼막사에는 몇 점의 문화재가 있기도 하지만, 그동안 여러 해 찾아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올 들어 가장 기온이 높다는 날 올랐으니, ‘땀이 비 오듯 한다.’는 말을 실감한 답사 길이다.

 

그렇게 찾아 올라간 삼막사. 저 멀리 까마득하게 마을이 보인다. 거의 산 정상부에 절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계곡 밑에서 치밀어 오르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살 것만 같다. 시원한 물을 한 대접 마시고 올라가 만난 사적비와 산신각이다.

 

 

 

이 산신각 명물 되겠네.

 

삼막사 바위암벽 산신각은 바위면을 안으로 네모나게 깊게 파 들어가, 그 안에 산신과 호랑이 동자상 등을 돋을새김 하였다. 양 편에는 기둥을 새겨 놓았으며, 바위를 보고 우측 위편에는 구름을 새겨 놓았다. 처음에는 산신이 타고 앉은 호랑이를 보고 한참이나 속으로 웃었다. 산신님이 들었으면 노했을 듯도 하다.

 

 

 

호랑이가 어딘지 모르게 옛 만화에 나오는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앙편에 새겨 놓은 동자상도 조금은 어색하다. 아마도 지금은 기계를 갖고 조형을 했을 텐데, 일부러 옛 분위기를 만드느라 민화에 나오는 모습으로 조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몇 사람인가가 또 올라와 절을 한다. 이 더위에 그늘도 없는 곳에서 절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치성을 드려서 덕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살기 팍팍한 세상에 그래도 이런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도 행복이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이 산신각에도 이야기가 생겨날 것이고, 그 후에는 명물이 될 것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 온 바람 한 점이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인 안양중초사지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에 1층의 몸돌만이 남아 있고, 그 위에는 지붕돌만 포개어져 있는 형태이다. 중초사터에 남아 있는 이 삼층석탑은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고, 1960년 옛 터에 유유산업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1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부는 2·3층 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3개 포개져 있다. 기단과 1층 몸돌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매우 두꺼워 급한 경사를 이루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희미하게 들려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1·2층은 4단, 3층은 3단을 두어 간략화 되었다.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해제된 석탑

 

안양시 석수동 중초사지에 있는 이 삼층석탑은, 지금은 건물만 남은 유유산업의 정문에 들어서면 좌측에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보물 제 4호)와 고려시대 석탑이, 문화재 보호구역(826㎡)내에 나란히 서 있다. 향우측에는 또다른 석탑의 부재로 추정되는 면석이 있다. 그중 석탑은 1963년에 보물 제 5호로 지정되었다가 최근에 해제된 상태이다.

 

‘중초사’는 통일신라 흥덕왕대의 사찰로 당시의 큰 절이었던 황룡사의 항창이 절주통으로서 이 당간지주의 불사에 참여 할였다고 한다. 그만큼 중초사는 커다란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초사는 『동문선(東文選)』,『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흥지도서(興地圖書)』,『가람고(伽藍考)』같은 문헌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후기에 이미 폐사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안정한 석탑, 그러나 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해

 

전체적으로 기단부가 너무 크고, 탑신의 1층 몸돌이 그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석탑이다.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지면 위에 두꺼운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이단괴임으로 조각된 별석을 놓아 상층 기단부를 받치고 있는, 단층 기단 형식을 취하고 있다.

 

4매로 짜여진 기단중석은 중앙에 탱주는 없이 양우주만 조각되었고, 그 위에 덮여진 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다. 괴임은 일단이나 남면은 약간 부서진 상태이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매의 돌로 조각되었는데, 1층 몸돌인 탑신석만 있을 뿐, 이삼층은 몸돌은 사라진 채 머릿돌인 옥개석만 포개어져 있다.

 

 

 

노반 이상의 상륜부 역시 사라진 상태이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한 편으로, 받침은 1 ·2층이 4단이고 3층은 3단이다. 대체로 이 탑은 원형을 잃었으나 고려시대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3월 3일에 찾았던 중초사지. 굳게 닫힌 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다가 우여곡절 끝에 안으로 들어가 찬찬히 돌아본 삼층석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형태로 보아도 상당히 훼손이 많은 석탑이다. 더구나 2, 3층의 몸돌까지 사라져, 지붕돌만 포개어진 모습은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아프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라도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숱하게 수탈을 당하고 망가져 그 형체조차 찾을 길 없는 수많은 문화재들. 그래도 이렇게 일부분이나마 남아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아무리 못생기고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해도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집을 날마다 해체하는 여인이 있다. 도대체 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화가 박남희(여, 49세,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왜 그냥 집이 아니라, 집을 모두 펼쳐서 그림 안에 집어넣었을까? 3월 3일 오후에 평촌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나의 조형예술은 ‘집’을 바라보는 시각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집이란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기에 집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것을 바라보고 관심을 갖는 대상은 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일상은 ‘일탈’을 도출하는 ‘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화가 박남희.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귀인중학교 앞 작업실에서 만났다


‘꿈’을 집이라는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화가

화가 박남희는 그 동안 네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2003년 성보갤러리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연 후, 2008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2회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2009년에는 관훈갤러리에서 3회를, 2010년에는 서울남부지방검찰청 갤러리에서 현대미술 초대전을 열었다. 그동안 단체전도 열심히 했다.

1999년 전통과 현대의 만남전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연 것을 비롯하여, 2008년 중국에서 한일문화교류전, 2009년에는 공주 원골에서 예술과 마을 설치제, 2010년 2010 Project- C전 등 20여 회의 단체전을 열었다. 현재 서울미술협회 회원이면서 아트플래시의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저는 그림을 늦게 접했어요. 어려서부터 시작을 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그런 작업을 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서 늦게 그림을 시작했죠. 30대 초반에 시작한 그림이, 이제는 전업화가가 된 것이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는데, 46세에 졸업을 했으니 참 늦은 셈이죠.”

그런 그녀가 그림에 푹 빠진 것이다. 집을 풀어 그림으로 표현을 하는 그녀의 작업은 늘 꿈으로 가득하다.

“꿈을 집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죠. 물론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사고나 감정이죠. 하지만 그림 속에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가능하죠. 집을 바라보는 시각을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하고, 그것을 펼쳐 놓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그 안에 ‘꿈’을 그려 낼 수가 있는 것이죠,”

'집의 조각들'이란 개인전을 관훈크럽에서 기졌을 때의 작품 


그림속의 색채의 조화로움에 희열을 느껴

화가 박남희, 그녀의 그림 속에는 집안의 모든 것들이 나열이 되어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 속의 이미지보다 오히려 색채를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색채의 조화를 그려내다가 보면, 현실의 표면적인 현상보다도 본질과 자아의 내면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는 것. 그것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미지로 규칙과 제약이 없는 일정한 질서 속에 자유로움을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이죠. 화가는 만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끝없이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면서 그 작업 안에서 느끼는 희열이 없다면, 아마도 아무도 그림을 그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좌절과 희열이 반복되면서, 나의 무의식이 하고 싶은 것과 원하는 것을 가장 직설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박남희 작 <다섯 개의 구름기둥>. 그녀는 집을 평면화하여 그 안에 꿈을 그려 넣는 작업을 한다


그녀의 그림 속에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사물인 집이라는 건축이미지를 해체하여 평면화 시키고 있다. 그 안에 친숙하고 구상적 이미지인 하늘이나 식물 등의 이미지를, 평면과 입체의 이중적 공간을 다시 한 화면 속에 안착시킨다. 그것은 사물에 대하여 낯설음과 익숙함을 동시에 깨달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림은 내 영원한 동반자, 돈으로 따지고 싶지 않아

“저는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가장 편안하고 따듯한 느낌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 그림을 보면서 본인의 현실적인 일탈을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죠. 책장 속에 숨어 있는 수수께끼 같은 계단, 또는 반복적인 패턴화 된 층계, 안과 밖이 모호한 문 등,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구성을 그런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다가 말고 너무 오랜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죄스럽다. 하지만 그림을 바라다 볼수록 자꾸만 빠져드는 이상한 마력 같은 것을 느낀다. 아마도 화가 박남희의 말대로 그 그림 속에서 나의 일탈을 벗어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어떻게 하느냐고 바보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가정이 있으니 가족들의 도움도 받고, 초대전도 해서 충당하고 있다는 대답이다. 그림을 그릴 때는 팔기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대답을 한다.

“저는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는 않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이 돈이 목적이 된다면 그 안에 참다운 사고가 피어나질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예술은 신선해야 아름다운 것 아닌가요?”

되묻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그저 세상 속물인 기자 하나가 예술가의 자존심을 건드렸나보다. 3~4월 경에 그룹전이 있어 요즈음은 하루에 7시간 이상을 작업에 몰두한다는 화가 박남희. 그 전시회가 기다려지는 것은 또 다른 건조물의 펼쳐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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