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보물 제11호로 지정된 사인비구의 범종은 각기 독특한 형태로 제작이 되어,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사인비구의 범종은 8개의 종이 나름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모두가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

다양한 범종을 제작한 사인비구

사인비구의 동동 중에서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은 포항 보경사 서운암의 동종(보물 제11-1호)이다. 서운암 동종은 종신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불경의 내용을 새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보물 제11-2호 문경 김룡사 동종과 제11-3호 홍천 수타사 동종은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딴 종과는 다르게 독특하게 표현했다.

전통적인 신라 범종 형태로는, 보물 제11-4호인 안성 청룡사동종과 제11-8호로 지정된 강화 동종이 있다. 보물 제11-6호로 지정이 된 양산 통도사 동종은 팔괘를 문양으로 새겨 넣어 딴 사인비구의 종과는 다른 모습이다. 더욱 유곽 안에 보통 9개씩의 유두를 새겨 넣는 일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단 한 개만을 중앙에 새겨 넣는 방법을 택했다.



그밖에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에 두 마리 용을 조각한 보물 제11-5호인 서울 화계사 동종과 보물 제11-7호인 의왕 청계사 동종 등이 있다. 이렇게 8기의 보물로 지정된 종들은 독창성을 갖고 있어 당시 범종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신라범종의 전통성을 따른 안성 청룡사 범종

청룡사의 동종은 종루의 종으로 만든 것이다.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4년에 제작한 안성 청룡사 동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가 색다르다.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에는 대나무 모양으로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용뉴에 새겨진 용은 네 개의 발로 종을 붙들고 있는 형상이며, 이마와 볼에는 뿔이 나 있다. 얼핏 보아 험상궂은 듯 하면서도,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용뉴에 보이는 조각 하나만으로도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보이는 것이 사인비구의 동종이다.


포탄 모양 종신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둘렀으며, 어깨띠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 '파옥지진언(破獄地眞言)'을 한 줄씩 새겨 넣었다. 밑으로는 사다리꼴 유곽 4좌가 있고, 그 사이에는 각각 연꽃 가지를 든 4기의 보살입상과 4개의 위폐가 한 쌍으로 마련됐다.

유곽은 각각 사다리꼴로 사방을 두 선으로 이루어 선 안에 꽃잎이 그려져 있고, 여기에 유두 9개씩을 배치하였다. 유곽 사이 위폐 안에는 <宗面磬石 王道 隆 惠日長明 法周沙界>라는 글씨를 각각 새겼는데, 서울 화계사 동종에는 같은 문구가 양각되어 있다.

이러한 범종의 제작기법은 17세기 중반에 정통 승장계 장인들이 주로 쓰던 기법으로 전한다. 사인비구가 30대 때에 만든 것으로 전하는 안성 청룡사 사인비구주성동종은, 지준, 태행, 도겸, 담연, 청윤과 함께 만든 통일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범종계열이다.

작은 종에 새겨진 불심

사인비구는 왜 이렇게 범종을 만들었을까? 물론 승장(僧匠)으로써 신라 범종계의 정통을 잇는 종을 만든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러나 단지 그것 때문에 경기도와 경상도 일대를 돌면서 종을 만들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하나의 종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청룡사 동종도 종루의 종으로 만들었다고 하나, 현재는 대웅전 안에 보관하고 예불 시에 이 종을 이용한다.



사인비구는 이 종 하나를 만들면서 스스로의 도를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이 받는 고통을, 이 종을 제작하면서 그 업보가 가시기를 비는 마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단순히 승장으로서 정통을 잇는 종을 만든 것이 아니고, 그 안에는 사바세계에 사는 많은 중생들의 업장소멸을 위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손으로 조금만 힘을 주어서 두드려도 맑은 소리가 울려나는 청룡사 동종. 그 안에는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는 무형의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마 그러한 소리를 들으면서, 세속의 더럽혀진 귀를 씻고, 마음의 편안을 얻으라는 사인비구의 간절함이 깃든 것이었으리라는 생각이다.

석남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절로, 고려 초에 해거국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태종 7년인 1407년에는 국가에 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자복사(資福寺)'로 지정이 되기도 했다. 절에는 대웅전 등 많은 전각들이 국보나 보물, 혹은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 민가와는 달리 절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전각 등의 훼손이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오랜 시간 충실한 보수로 인해, 그 본모습을 지켜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석가모니의 팔상도를 모시는 영산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에 소재한 석남사의 영산전은, 보물 제82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함께 모신 전각의 명칭이다. 석남사의 영산전에는 16나한을 함께 모셔 놓았다.



석남사의 영산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꾸며진 크지 않은 전각이다. 석남사의 입구에 있는 금강루라는 누각 밑으로 난 입구를 지나면 계단 중간 우측에 자리한다. 그리 크지는 않은 전각이지만, 나름대로 독창적인 건축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위로 올라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이 영산전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명종 17년인 1562년이다. 이 영산전은 임진왜란 때도 소실을 면하였다.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건축양식을 갖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작아도 소중한 문화재

석남사 영산전은 딴 전각에 비해서 크지가 않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작은 전각으로 주위를 돌아보면, 나름대로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산전은 돌 축대를 쌓고, 돌로 쌓은 돌담으로 앞을 둘렀다. 그리고 지붕 가구는 오량으로 구성하였다.

이 영산전은 지은 지도 오래되었지만,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전국의 많은 사찰의 전각들이 소실되고 폐허가 된 것에 비해, 이곳은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석남사는 영조 1년인 1725년에는 해원선사가 영산전과 대웅전의 기와를 갈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웅전은 원래 영산전 앞에 있던 것을, 영산전 뒤로 높여놓았다. 그러나 영산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영산전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형태가 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주추로 사용했다는 점이나, 그 위로 올린 민흘림기둥의 일부가 여기저기 파여 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큰 보수 없이 보존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영산전 앞의 석탑

계단을 오르면 영산전 게단 양편에 두 기의 석탑이 서 있다. 고려 말기의 탑으로 보이는 이 두 기의 탑은, 절 아래쪽에 서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이 탑 중에 영산전 방향으로 있는 석탑은 옥신석에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누군가 그 안에 작은 부처를 갖다가 놓았는데. 이곳이 감실임을 나타내려고 그런 것 같다.

석남사는 유서 깊은 절이다. 현재 석남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영산전 외에, 대웅전과 석탑, 그리고 마애불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산비탈에 늘어선 전각들이 자리한 석남사. 여름철 녹음이 짙어지면 이곳을 다시 찾고 싶다. 또 다른 느낌이 들 것이란 생각에.

우리나라 여기저기를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마을입구나 혹은 마을 안에 돌미륵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형태를 갖추지 않은 부정형의 돌일망정, 사람들은 미륵이라고 여겨 정성껏 치성을 드리고는 한다. 이렇듯 우리나라에는 웬만한 마을에는 미륵이라 불리는 돌부처가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민중들 속에 깊이 파고든 신앙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이유는 석가모니 부처 다음 세상을 약속한 미륵불이 현신하면,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모두 그 고통에서 구해준다는 약속 때문이다.

경기도 안성에서 이천 장호원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이정표가 보인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6호인 기솔리 석불입상이 있다는 안내판이다. 길을 따라 안성시 삼죽면 기솔리 산33-1에 소재한 2기의 석불입상을 만난다.


장대석에 조각한 미륵불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열반한 뒤,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 인간세계에 나타난다고 했다. 용화수 아래에서 3번을 설법하고 성불하여,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후천세계의 부처이다. 그래서인가 미륵석불의 경우에는 대개는 거대석불입상으로 조각을 하는 것이 예이다. 아마 후천세계가 도래할 때까지의 신앙대상물이기 때문인가 보다.

안성은 미륵불이 많은 곳이다. 이곳은 과거 궁예가 묵으면서 칠장사라는 절에서 무술을 배웠다고 전한다. 그래서인가 안성은 미륵불이 어느 곳보다도 많이 남아있다. 안성 인근에서 보이는 미륵불은 거대석불이다. 기다란 돌을 조각해 놓은 거대석불은 그만큼 인간들보다 월등히 도력이 높은 미륵임을 상징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남녀 한 쌍으로 조형이 된 기솔리 미륵입상

기솔리의 미륵입상은 그 높이가 5m 정도나 된다. 그러나 일반 석불입상과 같이 조각을 한 것이 아니라, 기다란 장대석에 얼굴부분만 조각을 하고, 목 밑으로는 선각에 가깝게 꾸며 놓았다. 2기의 석불입상 모두가 사각형의 얼굴에 가는 눈과 삼각형의 짧은 코, 두터운 입과 목까지 내려 온 귀 등을 뚜렷하게 조각하였다.

이 두기의 미륵입상은 모두 민머리인 소발을 하고, 그 위에 지혜의 상징이라는 육계가 튀어나와 있다. 머리 위에는 얇고 둥근 보개석을 얹어 놓았는데, 그 중앙에 구멍을 뚫어 육계에 끼워 갓처럼 표현을 해놓았다. 입은 굳게 다물었으나 엷은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이 미륵입상은 법의를 앞가슴에서 둥글게 파내려, 발끝까지 U자 형 주름으로 표현하였다. 일반적으로 거대석불의 경우 이런 법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아마 이 지역의 특징적인 형태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가슴까지 올려 진 왼손과, 배위에 올려놓은 오른손은 약식화가 되어 있다. 장대석에 조각을 하다보니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기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몸의 굴곡도 같은 형태로 사실적이지는 못하다. 마을에서는 동쪽으로 향한 불상 중 북쪽에 체구가 굵고 약간 큰 불상을 남 미륵불, 남쪽에 위치한 날씬한 불상을 여 미륵불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받고 싶지가 않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가보면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다 고통이 있기 마련이다. 하기에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고, 그것이 미륵을 형상화 시킨 미륵입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 이 일대의 미륵입상은 모두 거대석불로 조성이 되었는데, 그 또한 이 지방 미륵입상의 공통된 표현방법이다.



아마도 이렇게 거대석불입상을 세운 것은 미륵불이 하루 빨리 현신해, 중생의 고통을 잊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도 모른다. 기솔리의 석불입상을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중생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일 것이라는 점이다. 바로 세상을 살면서 조금이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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