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 5년인 1510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올해로 꼭 500년이 되었다. 물론 그동안 집의 형태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집을 지은 후, 여기저기 달라진 점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행랑채가 없다거나 사랑방을 감싸는 외곽 담이 없는 것을 보면, 처음에 이 고택을 지은 후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전해지면서,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 정무공 오정방 고택을 돌아보고 있노라면, '참 아름다운 집이다'라는 찬사를 할 수 밖에 없다. 가옥의 구성이 그러하다. 현재는 대문을 걸어 외곽 담장을 두르고 있다. 그 안에 대문채가 자리한다. 대문을 걸어 사랑채 쪽으로 나간 또 한편의 담장은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는 사잇담이 되었다.

 


이 고택에서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오정방(1552 ~ 1625), 오상(1512 ~ 1573), 오두인(1624 ~ 1689)과 같은 해주오씨의 명현들이, 바로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오정방 고택은 처음에는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252번지에 세웠으나, 조선조 효종 1년인 1650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장대석 기단이 돋보이는 사랑채

 

오정방 고택의 사랑채는 안채와 붙어있다. 장대석 기단이 이 집의 견고함을 말해준다.


오정방 고택의 사랑채는 별채로 구성되지 않고, 안채와 단일채로 구성을 하였다. 전체적으로는 ㄱ 자형의 건물에 - 자형으로 사랑과 대청, 안방을 두고, 꺾어진 부분에 부엌을 둔 형태다. 사랑채는 장대석 기단을 4단으로 높이 쌓고, 그 위에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주추를 놓았다. 두 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는 측면과 앞면에 툇마루를 두었는데, 방이 끝나는 부분부터 측면으로는 난간을 둘러 멋을 냈다.

 

사랑의 앞의 툇마루는 안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안채와의 구분을 사잇담으로 나누고, 그 마루에도 문을 달아 구분을 하였다. 사랑채의 뒤로는 조금 비껴서 사당채를 꾸며 놓았다. 사당채는 1칸 규모로 지어졌으며, 별도의 담장을 둘러놓았다.


사랑채의 뒤편에 자리한 사당채. 현재는 독립채로 되어있으나, 처음에는 바깥 담장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잇담으로 가른 사랑채와 안채

 

오정방 고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사잇담이다. 이 사잇담은 대문에서 시작해, 안채로 가로지르며 형성이 되었다. 사잇담이 끝나는 마루에 문을 달아 안채와의 경계로 삼았다. 툇마루는 안채의 대청이 시작되는 부분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사랑채와 사잇담이 만나는 곳에도 문을 달아 구분을 하였고, 툇마루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방과 대청 사이에도 문을 달았다. 사랑채에서 툇마루를 따라 안채로 들어가려면 두 개의 쪽문을 자나야만 한다.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툇마루. 이 마루는 두개의 쪽문을 달아 안채의 출입을 통제했다.

 
사잇담 안에 있는 한 칸 방의 용도는?

 

문제는 이 사잇담 안에 있는 방이다. 도대체 이 방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툇마루는 사랑채에서 안채의 대청이 시작되는 부분까지, 같은 높이의 누마루를 깔았다. 대청의 마루는 이 툇마루보다 낮게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이 한 칸의 방 앞에 또 다시 문을 달아, 안채와 구분을 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또한 이 방의 툇마루에는 난간을 드렸다.

 

밑으로는 아궁이를 두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한 사랑채와 안채의 사잇방. 이 방을 혹 정자처럼 이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집 안에 딸이 사용을 했거나, 안주인이 아닌 여인네가 사용을 한 것은 아닐까?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불러 온다고 했던가? 결국 이 방에 대한 용도는 알지 못한 채, 혼자의 즐거운 상상만으로 시간을 보냈다.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사잇담이 있고, 사랑채에서 안채로 오려면 작은 방이 하나 있다. 이 방의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다.

 

현재의 대문채는 중문채로 보여

 

전체적인 집의 구조로 보면 현재의 대문채는 중문채였을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는 - 자 형으로 지어졌으며, 대문을 두고 옆으로 두 칸의 광이 마련되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현재의 대문채는 처음에는 중문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만한 집에서 일각문으로 대문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랑채와 사당을 두르는 외곽의 담장이 없다는 점, 그리고 행랑채가 없다는 점 등이 이를 말해준다.

 

현재 오정방 고택의 대문은 과거에는 중문채였을 것으로 보인다.

대문 옆에는 두 칸의 광이 있다.

 

격자살 창호가 아름다운 부엌

 

격자살 창호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된 창호를 말한다.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내는 이 창호는, 우리 고택에서 흔히 보이는 창호의 형태다. 오정방 고택의 부엌을 보면 이 격자살 창호를 이용해 멋을 내고 있다. 전체적인 집의 규모보다 부엌이 상당히 큰 형태로 꾸며진 오정방 고택이다.

 

안방에서 달아 낸 부엌은 3칸 정도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위를 다락으로 꾸며 모두 격자살 창호를 달아냈다. 중앙에 부엌문을 달아내고, 부엌을 바라보면서 우측에는 또 하나의 작은 격자살 창문을 내고, 좌측으로는 까치구멍을 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락 전체를 격자살 창호로 문을 달아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두칸의 마루와 안방, 그리고 부엌이 있는 안채다. 부엌은 격자살 창호를 달아 시원하게 연출했다.

 
 
사잇담에 작은 구멍 하나, 눈을 끌다

 

집안 곳곳을 돌다가 보니, 사잇담 아래쪽에 작은 구멍이 하나 보인다. 그저 지나치기가 쉬운 것이, 그 앞에 오정방 고택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릴 것 같은 이 작은 구멍. 담장 밑에 있는 이 작은 구멍은 물론 배수구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배수구 하나에도 미를 생각했던 우리네의 가옥. 그것이 바로 한국의 미를 창출해낸 마음일 것이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에 소재한 칠장사는 국보와 보물 등을 소유한 고찰이다. 이 칠장사 대웅전 옆에는 보물 제983호인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이 입상은 원래 ‘봉업사지’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다시 현재의 칠장사로 옮겨서 보관을 하고 있다.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인 63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고찰이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인 칠장사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이 되어있기도 하다. 칠장사가 위치한 칠현산은 원래 ‘아미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이 산 아래 아란야를 짓고 기도를 하던 차에, 선량치 못한 7인이 찾아와 교화가 되었다고 하여 칠현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고려 초기 작품

 

현재 보물 제98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여래입상은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의 높이는 1.57m이고 총 높이는 1.98m이다. 현재 대웅전 좌측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눈과 코, 입은 심하게 닳아 제 모습을 판가름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얼굴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비교적 식별이 가능하다. 양 어깨에 걸친 법의는 어깨를 감싸 며 밑으로 흘러내린다. 옷 주름은 여러 겹의 U자형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치마가 양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루고 있다.

 

 

 

 

석불의 형태는 비교적 비례가 원만한 편이며, 전체적인 신체표현에 있어서 손이 다소 큰 편이다. 하지만 머리와 어깨의 너비 등의 신체비례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를 조각하였는데, 두광과 신광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신광으로 표현을 하였다.

 

지방의 특징을 보이는 봉업사지 석불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보면 중앙의 문화재와 지역의 문화재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앙의 기능이 뛰어난 석공들이 참여하여 조성한 석불이나 탑 등은 그 화려함이나 섬세한 조각이 뛰어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지방의 석공들이 조성을 한 석불이나 탑 등은 나름대로의 지역적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당당한 어깨와 발달된 신체표현, 그리고 U자형의 옷주름 등과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안성지방 인군의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지방은 그 지방 나름의 기능공들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조성을 하기 때문에, 그런 점을 잘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받침돌의 표현이 두드러져

 

받침돌은 아래받침돌과 위바침돌로 구분이 되어있다. 위 받침돌은 둥글게 조성을 하고 조각을 하였는데, 심하게 마모가 되어 조각을 잘 알바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아래받침돌의 문양으로 볼 때 위받침돌에는 꽃과 구름 등을 새겨 넣었을 것 같다. 또 이 위받침돌이 심하게 훼손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도 정확지가 않다.

 

 

 

아래받침돌은 문양이 그대로 살아있다. 밑으로 된 넓은 앙련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새겨 넣었다. 이렇게 연꽃잎에 꽃을 사긴 것은 흔히 볼 수 만날 수가 없다. 아래받침돌의 위부분은 돌출을 시켜 그 곳에도 8장의 꽃잎을 가진 꽃을 돌아가면서 조각하였다. 이 받침돌 하나만 보아도 당시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이 많은 공을 들인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제 자리를 떠나 안성 칠장사 대웅전 옆에 서 있는 봉업사지 석불입상. 우리의 많은 문화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 자리를 떠났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속으로 기원을 한다. 앞으로는 이렇게 제자리를 떠나는 문화재들이 없게 해달라고.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종교적인 편향을 갖고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문화재를 함부로 취급할 경우는 정말 짜증스럽다. 9월 7일 안성에 취재를 하는 길에 고찰 칠장사에 들렸다. 칠장사는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에 있는 칠현산에 소재한다.

 

칠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이며, 경기도 문화재 자료 24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찰이다. 현재 칠장사가 위치한 칠현산은 본래 아미산 이었는데,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7명의 도적을 교화해 일곱 현인을 만들었다고 하여 칠현산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칠현산을 칠장산이라고도 한다.

 

 

 

 

문화재의 보고 칠장사

 

칠장사는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현종 5년에는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칠장사를 중창했고, 고려 우왕 9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의 역조실록을 이곳으로 옮겨와 보관하기도 했다. 그만큼 칠장사는 불교문화를 지켜내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고찰이다.

 

칠장사에는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15동의 전통건축물과 석탑, 동종 등이 있으며, 국보 296호인 오불회 괘불, 보물 1256호 삼불회 괘불, 보물 488호 혜소국사비를 비롯, 보물 983호 봉업사 석불입상, 보물 1627호 인목왕후어필 7언시와 경기 지방문화재 114호인 칠장사 사천왕, 경기도 지방문화재 39호인 칠장사 철당간 등이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칠장사

 

칠장사는 여느 절과는 다르다. 절 안에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사람들은 꼭 불자가 아니라고 해도 칠장사를 즐겨 찾는다. 칠장사 명부전 벽화는 색다르다. 벽화에 임꺽정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궁예가 활을 쏘는 모습도 있다. 이는 궁예가 칠장사에서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또한 의적 임꺽정과 7명의 도적이 가바치 스님인 병해대사의 설법에 마음을 바로잡고 의적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칠장사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이다. 암행어사 박문수는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나한이 과거시험 구절을 가르쳐주어 장원급제 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칠장사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볼거리와 들을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에, 수시로 사람들이 찾아들고는 한다. 접에서 키우고 있는 커다란 개는 사람들이 찾아와도 무신경하다. 딴 곳이 여기저기 출입을 통제시키는데 비해, 칠장사는 모든 곳을 개방하고 사람들이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도 이 절의 특징이다.

 

“선생님, 거기서 담배를 피우시며 안됩니다.”

 

이런 칠장사이다가 보니, 지나치는 사람들이 누각에 올라가 앉아 쉬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개방을 한 전각 마루에 걸터앉아 쉬는 것은 좋은데, 버젓이 담배를 피워 물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경내에서 담배는 금하고 있다. 더구나 칠장사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더 더욱 화재 등에 민감한 곳이다.

 

“선생님 거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대개는 ‘몰랐다’거나 ‘미안하다’고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양반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슬슬 부아가 치민다. 얼굴 사진이라도 찌거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저씨 거기 담뱃불 끄세요.”

 

 

 

 

말이 조금 험악해지니 그때서야 슬그머니 담배를 비벼 끄고 절 마당에 휙 집어 던진다.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았다는 생각이다. 버린 꽁초를 주어 다시 가져다주었다. 경내를 나가서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물론 오지랖 넓게 별 것을 다 신경 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같이 문화재를 힘들여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용납이 되질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버렸지만, 답사 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다. 이 소중한 문화재들이 자칫 화재라도 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동화사 사태 등으로 내내 심기가 불편한 사람인데 말이다. 도대체 언제나 제대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들이 들을 것인지. 맑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깊은 한숨만 쉰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가네

 

안성 지역에 구전되는 전설의 남사당패 꼭두쇠인 바우덕이의 노래 사설이다. 바우덕이의 이름은 박우덕, 또는 ‘김암덕(金岩德)’이라고 전해진다. 남사당패는 여사당패와 구별을 하기 위해 조직된 과거의 유랑집단의 한 유파이다. 굳이 ‘남사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남자들로 연희패가 구성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

 

안성 남사당패의 근원지는 안성시 서운면 청룡사 일대이다. 이곳에는 칠사당, 혹은 팔사당이라고 하여서, 예전 유랑집단인 남사당패들이 한 겨울을 나곤 했던 곳이다. 유랑집단은 봄서부터 가을까지는 전국을 순회하며 기예를 보여주는 대가로, 돈이나 곡물들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겨울이 되면 청룡사 인근으로 돌아와 기예를 연마하고는 했다고 전해진다. 이 남사당패 중에서 가장 명성을 떨친 것은, 역시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있는 ‘개다리패’였다. 안성 남사당의 풍물패는 기(旗)에 옥관자를 붙이고 다녔다. 이는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에 안성의 남사당패들이 참여를 하여 노역자들을 위로한데서, 대원군이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옥관자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남사당패들은 늘 풍물패의 위에 있었다.

 

피지도 못한 채 숨져간 바우덕이

 

당시 바우덕이는 꽃다운 나이의 처녀였다. 그 자태가 남자들을 녹일 만큼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가 노역장에 들어서면 당연히 뭇 사내들의 눈길이 바우덕이에게 꽂혔을 것이다. 안성의 남사당패는 바우덕이가 이끄는 개다리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육덕패, 복만이패, 이원보패 등도 바우덕이와 비슷한 연대에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자태와 기예에 출중한 바우덕이는 꽃다운 나이로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나에게 바우덕이는 남다른 존재이다. 1987년인가 안성시(당시는 안성군)에서 의뢰를 받아 ‘안성남사당풍물놀이도보’라는 소책자를 쓰기위해, 안성에서 오랜 시간을 기거하면서 청룡사를 20여 회나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안타까운 것은 바우덕이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였다. 다행히 바우덕이에 대해 높은 식견을 가진 토민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을 작은 서책이지만 하나하나 정리를 할 수가 있었다. 꽃다운 나이에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바우덕이, 안성을 들릴 때마다 늘 마음 한편이 짠한 이유였다.

 

오랜만에 다시 안성을 찾다

 

한참이나 안성을 찾지 못했다. 9월 7일, 안성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의 공연장이 있는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를 찾았다. 그런데 10여 년 전에 들렸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실내 공연장이 새로 자리를 틀고 있는가 하면, 앞으로는 테마공원이 한창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세계민속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공연장 앞으로 가보니 남사당패의 자랑인 칠무동 상이 서있고, 그 뒤편으로는 각 잽이들의 모습을 담은 동상들이 줄을 지어 있다. 그런데 공연장 입구에 서 있는 바우덕이 상을 보고 훔칫 놀랐다. 이 바우덕이의 상과 닮은 여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영란(여, 36세. 바우덕이 풍물단 상임단원), 바로 이 여인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바우덕이의 환생, 하영란

 

하영란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0살에 안성남사당풍물단에 입단을 했다. 당시는 나이가 어려 당연히 무동을 맡았다. 하영란이 남사당풍물단에 입단을 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서운면은 바로 남사당패들의 근거지가 있던 청룡사가 있는 곳이다. 그곳 서운초등학교에 다니던 하영란은 풍물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나이가 지긋한 풍물패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그것에 한 눈에 반해버렸다.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르고 그 풍물패를 따라 다닌 것이다. 그들을 놓치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전날 끝까지 따라가 보아둔 풍물패들의 모이는 곳으로 달려가, 그날부터 남사당패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것이 벌서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바우덕이의 동상과 참 많이도 닮았다. 장고를 메고 마당에 나와 장고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당시의 바우덕이의 모습도 저랬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딸 둘을 둔 아이엄마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이 마치 새털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30년 가까이 속 앓이를 하던 바우덕이에 대한 아픔이 조금은 가실 것만 같다.

 

풍물단 상임단원 하영란 대담

 

- 25년이란 오랜 시간 풍물단에 속해 있으면서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생업을 위해 출근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내가 이곳에 와서 나의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치 배낭을 메고 등산을 가는 기분으로 집을 나섭니다. 풍물을 하는 것은 나의 일상입니다. 밥 먹고 잠자고 하는 것과 같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때문에, 25년 동안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 그렇게 오랫동안 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공연을 할 때 관객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교감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 저희가 이렇게 시립 풍물단이 된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공연을 하면서 팬들도 생겨났죠. 그분들이 늘 ‘다시 보러 오겠다’거나 혹은 ‘정말 좋은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해주어 고맙다’라는 인사를 합니다. 어떤 분은 커다란 사진을 빼다가 직접 갖다 주시기도 하시고,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을 갖다 주기도 하십니다. 그런 교감이 활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 활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처음에 아버님의 반대가 심하셨을 때, 몰래 배우면서 공연 등을 하느라 애를 먹은 일이 힘들었죠. 그리고 서울예술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 매일 안성서부터 서울로 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늘 차 시간에 쫓겨 다녔을 때인 듯합니다. 차를 놓치면 기차를 타고 평택까지 와서 다시 안성으로 오면 새벽에 집에 들어오고, 새벽 5시면 또 일어나 준비를 하고 학교를 가야 했으니까요.

 

- 아이 둘을 키우면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개는 아이가 둘이면 이곳을 떠납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란 생각을 하고 살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첫 애를 낳고나서 몸무게가 15kg이나 쪘는데,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남들보다 2시간을 먼저 출근해 걷고 또 뛰고는 했죠. 나를 이기는 싸움을 한다는 생각으로요. 아마도 그런 열정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동안 해외공연도 많이 했을 텐데 기억할 만한 일은 없었는지?

일 년이면 3~4회 정도 해외공연을 하니까, 그동안 30~40회 정도 해외공연을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8년에 헝가리 세계민속축제에 개인 자격으로 참가를 해, 대상을 받고 월계관을 썼죠. 아마 그것이 제 개인적으로도 가장 영광스런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서운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전교생이 다 합니다. 도시처럼 잘하는 아이들을 뽑아서 할 수 없는 일이죠. 실내 연습장이 없어 무더위에 운동장에서 하는데, 이 남사당풍물 만은 꼭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은 한 번 사라지면 다시 되살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올해 제가 풍물을 시작한지 25년이 되는 해라서 작은 공연이라도 무대에 올리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둘째를 낳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죠. 그래서 착실히 준비를 해 30년이 되는 해 개인공연을 하려고 합니다.

 

- 오랜 시간 고맙습니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은데 너무 시간이 흘렀네요.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저희 남편(강규원, 46세. 건축 감리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공연을 보고 늘 서포터를 해주고는 합니다. 아마 남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이어가기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항상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 고맙습니다. 30년 기념무대를 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꼭 부끄럽지 않은 바우덕이의 후예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산110번지, 설성산성지로 올라가는 길목 좌측에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된 선읍리 석불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죽곡 마을 앞 시냇가에 묻혀 있던 것을, 신흥사 주지가 현 위치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석불입상을 보면, 보개석과 몸체, 그리고 발을 딛고 있는 연화대좌는 예전의 것인데, 머리는 새로 만들어 놓아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다.

 

얇은 판석에 돋을새김으로 조각을 한 몸 부분엔 장신구 없이 법의와 손을 조각하였다. 그러나 법의의 굴곡을 보면, 그 부드러움이 돌이라는 것을 잊게 할 정도다. 또한 발밑을 받치고 있는 대좌의 연화문 등을 보아도, 뛰어난 조각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몸의 형태를 보면 여래입상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신읍리 석불입상은 왜 두상이 사라진 것일까?

 

네 개 부분으로 나눠진 입상?

 

이 석불입상은 대좌와 몸체, 두상과 보개의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조각을 한 후, 조성을 헸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석불입상을 조성할 때, 몸과 머리 부분을 따로 떼지는 않는다. 거대한 석불도 아니고, 전체높이가 257cm 정도의 석불을 조성하면서, 머리를 떼어 조각을 한 후 신체에 올리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 석불입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발과 밑을 받치는 연화대는 넓적한 돌을 이용하였다. 발과 연화대를 조각하기 위해서는, 판석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위에 몸은 한 장의 판석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대개 얼굴과 몸은 한 장의 판석으로 조성하기 때문이다.

 

이 석불입상의 사라진 머리 부분과 연결되는 목 부분을 보면, 둥글게 올라가다가 사라진 목 부분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석불입상을 조각하는데, 구태여 두 장의 판석에 조각을 해 붙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점으로 보면 이 석불입상은 발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 그리고 몸과 보개석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머리 부분이 잘려나갔다고 보아야

 

몸에서 머리를 올린 목 부분을 보면, 삼도를 표시한 목 부분 아래가 파손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목이 훼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3년에 이 석불입상의 조각을 찾아 내 새롭게 조성을 할 때, 목 부분이 발견이 되지 않아 새로운 돌로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목 부분이 따로 조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확실해진다. 만일 목 부분을 따로 떼어 내 조각을 한 후 붙이고자 했다면, 땅 속에 묻혀있는 목의 한 부분이라도 발견이 되었을 것이다. 목 부분의 훼손이나 목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 석불입상의 머리 부분을 누군가 고의적으로 훼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뛰어난 미적 감각을 지닌 조각기법

 

이 석불입상을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조각기법이 돋보인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들어낸 우견편단으로 양팔에 걸쳐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법의를 표현한 것을 보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돌에 생명을 불어 넣은 듯한 이런 조각기법이라면, 기술이 뛰어난 석공에 의해서 조성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두 손의 손가락 부분도 훼손이 되어 시멘트로 발라놓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석불입상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키고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내려 복무를 감싸고 있으며, 왼팔을 들어 가슴에 대고 엄지와 장지를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로 볼 때, 이 석불의 수인은 전법륜인과 시무외여원인의 복합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전법륜인에서 손가락을 구부려 마주할 때, 엄지와 둘째 인지를 맞대면 법신불, 엄지와 중간 장지를 맞대면 보신불, 엄지와 무명지를 맞대면 화신불이라고 한다. 이 석불입상의 수인은 엄지와 장지를 맞댄 보신불로 보인다.

 

발가락을 돌출시킨 석불입상

 

이천 장호원읍 선읍리 석불입상의 발을 보면, 안성 석남사 마애불의 발과 동일하다. 그 조각 수법도 동일하게 표현을 하였다. 즉 아래는 연꽃대좌를 조각하고, 그 위에 법의가 발목까지 덮인 형태로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목서부터 밖으로 돌출을 시켜, 열 개의 발가락을 조각한 수법도 동일하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선읍리 석불입상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문화재들의 훼손. 그것은 결코 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스스로가 훼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재에 무관심한 것 자체가, 문화재의 훼손에 일조를 한 셈이기 때문이다. 목을 잃은 선읍리 석불입상. 과연 그 목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새롭게 조성해 올려놓은 두상이, 조금은 불편한 듯하다. 좀 더 세심하게 조각을 해서 올릴 수는 없었을까?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