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 공중파 TV 방송사에도 이런 제목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나름 꽤나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소재한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 안에 서 있는 비석 때문이다.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은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란 조선조 때 초급교육기관이던 서원 중에서, 국가로부터 특별히 공인을 받은 서원을 말한다. 사액서원이 되면 임금이 친히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하사한다. 사액서원은 서적과 노비, 토지 등을 함께 하사를 받게 되며, 사액서원의 시초는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영주의 ‘소수서원’에서 비롯하였다.


낙동강 좌측은 안동, 우측은 함양에서 인재가 나온다.

남계서원은 조선조 오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명종 7년인 1552년 지방의 유생들이 세운 서원이다. 소수서원이 명종 5년인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남계서원이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니, 그보다 17년 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역사를 가늠할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사액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앞에 정문인 누각을 세우고 강당 및 사당을 일직선으로 세워, 일반적인 사원의 구조와 같다. 그러나 그 전각의 형태 등은 남다르다. 경내의 건물들이 위엄을 보이고 있고, 예사 서원과는 그 품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동강 좌측으로는 안동에서, 우측으로는 함양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이곳에서 정여창 선생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이 된 것이다.



명종 때 하사받은 편액은 남계와 서원이란 두개의 현판으로 되어있다(위)
입구 양편에 있는 연못과(가운데) 비가 내려 물방을을 머금은 수련(아래)

전각 안에 있는 비석에 채색을

이 곳 남계서원은 정문인 풍영루 안으로 들어서면 강당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길 양편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놓았다. 그런 것 하나라도 서원을 꾸밀 때 많은 신경을 쓴 모양이다. 강당을 향해 좌측 연못의 끝 길가에는 비석을 보호한 전각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단계서원의 중수기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 비석을 보다가 의아한 점이 있다. 비석은 받침돌과 비문을 적은 몸돌, 그리고 지붕돌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이 지붕돌에 채색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비석을 보았지만, 지붕돌에 채색을 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나무도 아니고 돌에다가 채색을 했다는 것이 색다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비를 보호하는 전각과(위) 이 서원이 사액서원임을 알리는 비문(두번 째) 그리고 머릿돌에 칠한 채색

찬찬히 전각 주변을 돌면서 훑어본다. 머릿돌에 한 채색은 요즈음의 색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채색은 도대체 언제 저렇게 한 것일까? 그리고 지붕돌에 무슨 연유로 채색을 한 것일까?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본다. 그러나 그렇게 채색을 한 머릿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계산해도 맞지 않는 사적의 문화재 안내판

혹 그런 내용이라도 있는가 싶어 자료로 찍어 온 안내판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한참 읽다가보니 혼란만 가미된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람. 사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연도가 잘못 기재가 되어있다. 명종 7년은 1552년이다. 그런데 명종 21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그 해가 1556년이라고 적혀있다. 14년의 차이는 어떻게 났으며, 그 14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결국 안내판에 년도가 잘못 기재가 되었다. 명종 7년인 1552년에 남계서원을 건립했고, 14년 후인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그것을 1556년으로 적어 놓았으니, 보는 사람의 계산이 맞지 않을 수밖에. 문화재 안내판은 신경을 더 많이 써야한다. 그런데 국가지정 사적의 안내판에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니.


전각 안에 있는 비의 머릿돌 채색과 전각의 단청(위) 그리고 오류가 있는 안내판 

문화재가 너무 많아 그 소중함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채색에 대한 궁금증도 풀지 못했는데, 잘못 표기된 안내판으로 인해 귀한 시간을 내어 발품을 판 답사가 망쳐진 듯하다.


모악산에 자리한 대원사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번지에 소재한다. 대원사는  모악산 동쪽 중턱 어머니 품속 같은 형태에 자리잡고 있으며, 삼국유사 권제3 <보장봉로 보덕이암> 조애는 '백제 의자왕 20년인 660년에 열반종 개산조 보덕의 제자인 대원, 일승, 심정 등의 고승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조 인종 8년인 1130년에 원명국사 징엄 스님(1090~1141)이 중창 하고, 이어서 공민왕 23년인 1374년에는 나옹 혜근스님(1320~1376)이 중창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태종 15년인 1415년에 중창 흔적의 기록이 있으며, 그 뒤 선조 30년인 1597년의 정유재란 때 대부분 건물이 불타 없어졌으나, 선조 39년인 1606년 진묵스님(1562~1633)이 다시 중창하였다.

 

어머니의 절 대원사

 

▲ 벚꽃이 만개한 경내 모악산 대원사 주변에는 수령이 300년 이상이 되었다는 산 벚꽃나무들이 아름답게 꽃을 피운다.


대원사 주변에는 300년 이상 되었다는 산 벚꽃이 둘러쌓고 있어, 봄철에는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으며, 가을이면 온통 불이 타는 듯한 붉은색이 절을 뒤덮는다. 대원사에서는 2001년부터 매년 1월1일 촛불기원 해맞이 타종축제와 4월 둘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모악산진달래 화전축제로 이미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고찰이다.

 

모악산 대원사는 어머니 품속 같은 터전에 자리 잡아, 천하대복지 최길상지 명당이라고 한다. 대원사를 어머니의 절, 효의 절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등산객들로 늘 경내가 붐비고 있는 대원사는, 전국 각지에서 예를 갖추고 찾는 이가 끊이지 않는 창건 1350년의 유서 깊은 전통사찰이다.

 

대원사 문화재 안내판의 이변

 

▲ 방치된 옛 안내판 문화재를 분실하고 나서 그대로 방치된 목각사자상 안내판

▲ 안내판 목각사자상을 도난 당한 사연을 적은 현 안내판


어느 절이나 사찰에 문화재가 있으면, 그 앞에 문화재 안내판을 설치해 놓는다. 모악산 대원사에는 대웅전에 모셔진 전북 유형문화재 제215호인 삼존불과 전북 유형문화재 제71호인 용각부도가 있다. 그런데 대원사 안내판에 보면 현재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문화재가 있었음을 적고 있다. 바로 진묵 스님이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목각사자상이다. 전북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이 되어 있었다는 목각사자상은 어떤 것일까?

 

대원사 경내 한편에는 예전 목각사자상을 설명한 문화재 안내판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내용을 보니 다음과 같다. 

 

이 목각사자상은 조각한 시기와 조각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진묵대사가 만들었다고 하며, 이 위에 북을 올려놓고 가축을 하늘로 인도하는 제사를 지낼 때 북을 쳤다고 한다. 크기는 높이 90cm, 길이 135cm이며 괴목나무로 섬세하게 조각한 사자상이다. 다리는 다른 나무로 만들었으며 현재 다리부분이 약간 떨어져 나갔다. 이 사자상의 등에 경전 등을 올려놓을 수 있게 만들었다.

 

위와 같은 설명으로 보아 이 목각사자상은 상당히 소중한 문화재임이 틀림이 없다. 더구나 제를 지낼 때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신물(神物)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목각사자상은 어디로 간 것일까? 현재 대원사 문화재 안내판에는 목각사자상이 사라진데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대원사의 문화재인 사자상은 돌아와야

 

 
▲ 도난단한 목각사자상 도난 당한 목각사자상.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이고 있다. 안내판 사진


어떤 연유로 목각사자상이 대원사를 떠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안내문에는 1988년 12월 1일에 도난을 당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1989년에는 완주군에서 속성으로 문화재지정을 해제했다는 것이다. 문화재가 도난을 당할 경우 해당 부처에서는 문화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빨리 문화재해제를 한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 뒤 목각사자상은 1999년 10월 27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거주하는 이모씨가 소유를 하고 있었는데, 공소시효를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의 문화재법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문화재 지정이 해제돼 있었다. 그리고 이 목각사자상은 다시 종로구 인사동 거주 이 아무개에게 팔렸다는 내용이다.

 

문화재란 개인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진묵 스님이 만들었다고 하면 이미 그 제작연대가 500년 가까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원사는 진묵 스님께서 가장 오래 묵으신 절이기도 하다. 그만큼 진묵 스님의 체취가 배어있는 고찰이다. 그리고 목각사자상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될 만큼 소중한 문화재란 생각이다.

 

문화재법도 중요하지만 소중한 모악산의 문화재인 목각사자상은 반드시 대원사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대원사 문화재 안내판에는 목각사자상이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얼마나 간절한 바람이었으면, 안내판에 그러한 사연을 기록을 했을까? 어떤 경로를 통해 문화재를 취득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목각사자상은 대원사로 돌아와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4, 19)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옥천리 479번지 작은 사랑이라는 집골목에는, 당간지주 하나가 서있다. 원래 당간지주는 두 개가 한 쌍이지만, 이곳 당간지주는 한 개만이 외롭게 서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나머지 한 개는 일제강점기에, 당시 일인 경찰서장이 당간지주 중 한 짝을 양평읍 양근리 소재 갈산으로 옮겨, 자기네의 황국신민서사를 새겨 세웠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갈산 일대를 찾아보았으나, 아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일본으로 가면서 가져갔다고도 이야기들을 한다.

 

아직도 길에 눈이 많이 쌓여있어 미끄럽다. 앙평군의 사나사를 찾아보고, 옥천면에 들려 문화재의 위치를 확인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두 개의 당간지주가 서 있어야 하는데, 영 찾을 길이 없다. 마침 지나는 마을 분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신다. 원래는 옥천리 논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당간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그런데 당간을 보는 순간 참으로 어이가 없다. 당간은 현재 양평군 향토유적 재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런데 안내판 앞에 개를 매어 놓아 안내판이 가려졌다. 안내판 전체를 읽을 수가 없다. 더구나 하나 남은 당간에는 눈이 밑 부분의 원공까지 덮어버렸다. 길을 치우면서 당간에 눈을 쌓아놓은 것이다. 눈을 치우고 나서 원공을 찍으려는데, 묶어놓은 개가 허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이래서야 어디 문화재 답사를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현재 하나뿐인 당간지주도 원래의 간대와 기단은 소멸이 되었단다. 최근에는 시멘트와 석축으로 보수를 해 놓았다고 하는데, 눈이 쌓여 확인할 수가 없다. 옥천리의 당간지주는 높이가 305cm, 폭 50cm, 두께 36cm 정도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곳 옥천리와 인근 용천리에 신라 말과 고려 초에 대원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대로라면 이 당간지주는 신라말 고려초에 세운 가치 있는 문화재라는 것이다.

 

▲ 안내판 개집을 당간과 문화재 안내판 사이에 놓아 안내판을 읽을 수가 없다. 어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 안내판 개집을 당간과 문화재 안내판 사이에 놓아 안내판을 읽을 수가 없다. 어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소홀한 문화재관리 마음 아파

 

문화재 안내판과 당간지주 사이에 놓인 개집, 그리고 치운 눈을 가득 쌓아올린 당간. 참으로 어이가 없다. 한 개의 당간을 잃어버린 것도 마음이 아픈데, 꼭 이렇게 문화재 옆에다가 개까지 묶어놓아야만 했을까? 새삼 우리 문화재의 현실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문화재이거나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런 소중한 문화재를 이렇게 홀대하고 있다니. 세상 어느 나라가 이렇게 자신들의 문화재를 함부로 방치하고 있는지, 아마 아무데도 이렇게 방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 원공 당간지주의 가운데 뜷려있는 원공. 당간을 고정시키는데 쓰인다.

▲ 개와 당간 당간의 안내판에는 게집을 놓고, 눈은 당간지주에 쌓아 놓았다.

 

치운 눈을 쌓아놓아, 당간의 지주부분은 확인조차 할 수가 없다. 문화재의 소중함을 생각한다면, 딴 곳과는 달리 이곳의 눈부터 치워야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갖다가 쌓아올린 모습.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뒤떨어진 것일까? 추운 날 서둘러 나선 답사 길에서 마음만 아파 돌아온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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