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入垂楊 玉謝梅(금입수양 옥사매) 금빛은 수양버들에 들고 옥빛은 매화를 떠나는데

小池春水 碧於苔(소지춘수 벽어태) 봄 작은 연못의 물은 이끼보다 푸르구나.

春愁春興 誰深淺(춘수춘흥 수심천) 봄 시름 봄 흥취 어느 것이 깊고 얕은가

燕子不來 花未開(연자불래 화미개) 아직 제비도 오지 않고 꽃도 피지 않았는데.

 

조선 전기의 대문장가요 학자인 서거정의 시 ‘춘일(春日)이다. 서거정은 조선조 세종 2년인 1420년에 태어나 성종 19년인 148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달성이요, 서거정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四佳)이다. 할아버지는 호조전서 ’의(義)‘이고, 아버지는 목사 ’미성(彌性)‘이며 어머니는 권근의 딸이다. 최항은 그의 자형이다.

 

 

조수와 유방선 등에게 학문을 배은 서거정은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성명, 풍수 등 여러 방면에 두루 관통하였다. 세종 26년인 1444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1년인 1451년 사가독서 후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세조 3년인 1457년 문신정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45년간 6명의 왕을 섬긴 서거정

 

서거정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45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벼슬에 나아간 서거정은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으며,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문장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세조 6년인 1460년에 사은사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에서 안남사신과 시재를 겨루었다. 요동인 구제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고 하며, 또 성종 7년인 1476년에는 원접사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을 때에는 수창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후, 성종 1년인 1470년에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이 되고 달성군에 책봉되었다.

 

 

 

조선조 문인의 대표적 인물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다. 『경국대전』『동국통감』의 저술에 참여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지방연혁과 풍물을 담은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도 함께하였다.

 

신라의 설총에서부터 조선건국 이후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약 5백인의 작가들 작품 4,302편을 수록한『동문선』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언해했다. 그의 저술서로는 『역대연표 歷代年表』『동인시화』와,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筆苑雜記)』와 설화와 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대표적인 저술서로는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방이동서 이묘한 서거정의 묘

 

서거정의 묘소는 본래 서울시 강동구 방이동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1975년 6월 13일 이장하여 현재의 위치에 모셔졌다. 현재 봉담읍에서 수원으로 올라오는 도로변 우측,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47번지에 소재한다. 묘소 앞에는 사당이 세워져 있고, 옛 석물로 남아있는 것은 묘표, 문인석뿐이고, 상석 등은 이장할 때 새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5월 10일 목요일 오후, 봉담읍에 소재한 서거정의 묘를 찾아보았다. 조선조의 대문장가로 알려진 서거정의 묘소 앞으로는 후손들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아래편에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묘를 이장할 때 19매의 묘지석이 출토되었으며, 이 묘지석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되어 경기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묘지석은 백자로 구워졌으며 제1번 묘지석은 특별히 ‘청화(靑畵)’로 썼고, 나머지는 정사각형의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도필로 글자를 써넣었다.

 

 

 

축대 위에 지은 솟을대문의 앞에는 ‘전성문(展省門)’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은 재실인 ‘염수재’가 있다. 염수재는 24평으로 염수재의 앞에는 ‘염수재기’를 적은 비가 놓여있는데, 비의 뒤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사가공 재실인 염수재는 서기 1976년도 이축하여 약 25년간 유지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했으나 오래되고 낡은 도가 지나쳐 고심하던 차에, 종산의 일부가 경부고속철도 부지로 편입되어 그 보상금으로 1999년 3월에 옛 재실을 헐어버리고 새롭게 재실의 지었다는 것이다.

 

 

 

안내판 하나 없는 대문호 서거정의 묘역

 

재실인 염수재를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비스듬히 비탈이 진 곳에 서거정의 묘를 맨 위에 둔 서씨일가의 묘역이 층층이 마련되어 있다. 서거정의 묘는 묘 앞에 세운 묘표와 좌, 우측의 문인석만이 옛 것이고, 남은 석물은 묘를 이전하면서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묘표에는 조선숭정대부 좌찬성 달성군 서거정과 정경부인 선산김씨의 묘임을 적고 있다.

 

서거정의 묘로 오르는 길에 그 앞에 자리한 묘들을 보니, 봉분의 흙이 파이고 제대로 관리가 안된 듯하다. 서거정의 묘는 서울 방이동에서 이묘를 했다고 하지만, 그 묘를 이묘할 때 나온 묘지석이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상태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서거정의 묘역은 당연히 화성시에서 관리를 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거정의 묘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근처의 공장 안내판과 함께 걸려있으며, 재실과 묘역 앞에는 안내판 하나가 서 있지 않다. 길가에 따로 서 있는 신도비의 앞에 퇴색이 되어 글씨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묘소 안내문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그래도 조선의 대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서거정의 묘역치고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의 대문장가요, 중국에서까지 기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서거정. 화성시에서는 이곳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 인물이 묻힌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몰라라식의 처사인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구 유형을 갖고 구분을 짓는다.

 

탁자식이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식으로 조성을 한 것이다. 바득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오산 외심미동의 고인돌

 

오산시 외삼미동 384에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 기념물 제211호 고인돌. 이 지석묘는 숲으로 둘러싸인 구릉에 위치한 2기의 고인돌이 자리한다. 이 고인돌은 시민들의 요구에 의하여 한양대 박물관장겸 경기도 문화재 위원인 김병모 교수가 현지에서 조사를 하였다.

 

이 지석묘는 확인결과 청동기 시대 후기에 속하는 유적으로, 북방식과 남방식이 혼재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고인돌을 ‘거북바위’ 또는 ‘장수바위’리고 부른다. 이 고인돌은 선사시대 생활상을 연구할 수 있는 문화사적 가치를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 고인돌의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260×230×90cm 정도이다.

 

 

 

굄돌이 누워있는 형태의 고인돌

 

이 고인돌은 덮개돌의 중앙을 손질하여서 마치 거북등과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덮개돌의 위에는 지름 6~7cm 정도의 성혈이 15개 정도가 있다. 이 고인돌의 특징은 바로 덮개석을 받치고 있는 굄돌이다. 일반적으로 굄돌은 사방에 세워 묘실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고인돌의 형태이다.

 

그러나 외삼미동의 고인돌은 굄돌이 처음부터 누여져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모습의 고인돌의 형태인 황구지천의 상류인 화성 병점과 수기리 유적에서도 조사가 된 바 있다. 굄돌을 세우지 않고 누운 채로 그냥 사용하였다는 것은 고인돌의 처음의 이른 형태였을 것으로도 생각한다. 이 고인돌의 남쪽 옆에는 개석식 고인돌의 덮개석으로 보이는 넓적한 돌이 놓여있다.

 

 

 

고인돌을 찾아 거리를 방황하다.

 

오산시 외삼미동에 있는 고인돌을 찾아 길을 나섰다. 요즈음은 멀리 장거리 답사를 나가지 못하는 편이라, 시간이 날 때마다 주변을 다니면서 답사를 하는 편이다. 외삼미동 안으로 들어가 북오산IC 입구로 가다보니 외삼미동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런데 거리는 적혀있지 않고 앞으로 가라는 화살표만이 보인다.

 

그리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 다음에 안내판이 나올 것이란 생각을 하고 갔지만, 화성 동탄 끝까지 갔는데도 어느 곳에도 고인돌 안내판이 보이지가 않는다. 오산시 문화체육과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우측으로 굴다리가 있다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고인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들어가는 입구에도 안내판이 없고, 굴다리 안에는 또다시 좌측으로 굴다리가 있는데도 안내판이 없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굴다리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 안내판이란 초행길인 사람들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달랑 길가에 하나 서 있는 안내판. 화살표 하나로 문화재 안내를 다 했다는 생각을 한, 담당부서의 무책임한 처사에 울화가 치민다.

 

들어가는 입구에 안내판 하나만 더 설치를 했다면, 20km정도를 더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를 찾아다닌다. 내 고장의 자랑거리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여주읍에서 점동면으로 나가는 도로변에 문화재 안내판이 한 기 서 있다. <처리선돌>이라고 쓴 안내판에는, 안내판에서 30m 근처에 선돌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콘크리트 회사의 축대 밑에 서 있어, 선돌이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 길을 숱하게 지나다니면서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30m 이내에 선돌 비슷한 것도 발견을 할 수가 없었다.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공장의 축대 밑이고, 그곳에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마 안내판에 적힌 선돌이 그 공장 안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공장 안에 들어가 있는 문화재

몇 번 주위를 돌아보다가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공장 안은 콘크리트 공장답게 주변에 제품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그 안쪽에 돌로 축대를 쌓은 곳이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함께 서 있는 선돌이 보인다. 이렇게 선돌이 있으면 안내판에 공장안이라고 표기를 하든지, 아니면 축대에서 외부인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길이라도 내어 주는 것이 좋았을 것을. 그저 아무런 설명도 없이 30m 표시만 있으면 어떻게 찾으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주군 점동면 처리 88 - 6에 소재하는 이 선돌은 경기도 기념물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선돌은 높이가 2.1m에 넓이는 1.35m 이다. 돌의 두께는 30cm 정도로 직사각형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돌은 위 부분을 가공한 흔적이 보인다.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져간 문화재

‘입석(立石)’이라고 하는 이 선돌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선돌은 고인돌과는 달리 근대화가 되는 과정이나, 도시화가 되는 과정에서 많이 사라지고 말았다. 선돌이 왜 세워지는가에 대해서는 학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이 선돌은 마을의 신앙대상물이거나, 경계표시, 권위의 상징 등으로 세워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처리선돌이 서 있는 앞으로는 도로가 나 있고, 그 앞에 청미천이 흐른다. 이곳이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것으로 보아, 이 선돌은 아마 마을의 숭배 대상이었을 것이다. 처리 선돌 앞에는 길게 누운 돌이 또 하나 있다. 처음에 같이 세운 것이 아니고, 후에 갖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보아서 선돌의 앞에 누운 돌은 제단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처리의 선돌은 풍년을 구가하는 거석숭배 사상에서 기인한 마을의 신앙물로 추정된다.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

작은 문화재 하나라도 그 가치를 따질 수가 없다. 이 문화재들이 온전히 보존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공장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해서 문화재의 관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길가나, 논밭 아무 곳이나 서 있는 것보다 관리 면에서는 더 좋을 수도 있다. 다만 이 선돌을 일반인들이 쉽게 지나면서 볼 수 있도록, 안내판에서 바로 들어가는 길 하나쯤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거대한 콘크리트 공장 안에 갇힌 선돌의 바람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지석묘는 흔히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돌방을 세우고, 그 위에 커다란 돌을 괴어 놓기 때문이다. 지석묘는 우리나라의 전역에 걸쳐서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거대한 지석묘들도 있다.

2월 26일 의정부, 남양주를 거쳐 포천으로 들어갔다. 마을 제의식을 지내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 이정표가 보인다. ‘자작리 지석묘’라는 안내판을 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상당히 큰 지석묘 한기가 보호철책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석묘는 포천시 자작동 251-2에 소재하며, 현재 포천시 향토유적 제2호이다.


보존 잘되고, 거대한 지석묘가 향토유적?

이렇게 큰 지석묘는 이 인근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이렇게 화강암으로 조성한 지석묘 1기가, 한편의 굄돌 벽이 반쯤 파손이 된 것을 빼고는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석묘가 지방기념물도 아니고 향토유적이라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 향토유적은 자치단체에서 지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작리 지석묘는 커다란 덮개돌 밑을 사방으로 굄돌을 놓아 받쳤다. 탁자식인 이 지석묘는 하부 돌방이 약간 땅속에 묻혀있기는 하지만, 거의 완벽한 모습이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420cm × 347cm 정도의 크기이다. 덮개돌의 두께는 45~50cm 정도가 된다. 덮개돌은 위가 평평하게 조성이 된 것이, 상당히 넓어 보인다.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지석(굄돌)은 사방이 모두 남아있다. 다만 남쪽을 받치고 있는 돌이 반쯤 잘려나갔을 뿐이다. 굄돌의 규모는 서쪽이 265cm × 144cm ×33cm이며, 반대편인 동쪽의 굄돌은 220cm × 144cm × 31cm로 이 돌 역시 화강암의 판석으로 조성하였다.

짧은 단벽의 길이는 북쪽벽이 105cm × 144cm × 28cm이며 장벽 사이에 끼어져 있다. 남쪽의 단벽은 110cm × 85cm × 20cm 의 규모이다. 이 남쪽의 단벽은 15cm 정도만 땅위에 올라와 있다.


문화재 안내판에 신경을 써야

이 고인돌은 사방에 벽을 대고, 그 위에 덮개석을 올리는 형태이다. 사방의 벽면 안에는 묘실이 되는데, 현재 묘실 바닥에서 덮개석의 하단부까지는 144cm 이고, 지표까지의 높이는 70cm 정도이다. 묘실의 넓이는 180cm × 122cm이며, 묘실 바닥에는 부식토가 깔려있다. 이런 형태의 지석묘라면 그 부장품은 모두 도굴을 당했다고 해도, 그 지석묘만 갖고도 문화재자료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지석묘는 마을로 들어가 가정집의 담장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문화재의 주변은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이 지석묘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 역시, 지나가는 사람이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지석묘 앞에는 ‘자작리 유적지’가 있다고 안내판이 있으나, 주변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유적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마 몇 바퀴를 주변을 돌았을 것이다.




문화재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형태에 따라 국보가 되었거나 보물이 되었거나, 아니면 향토자료라고 해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요즘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안내판 하나 제대로 설치를 하지 않은 이런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를 관계자들이, 제대로 그 기치를 알고 평가를 할 것인지.

도선(道詵)국사는 전라남도 영암 풀신이다.신라말기의 고승으로 827년에 태어나 898년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풍수설의 대가였다. 도선은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절을 창건하였으며, 그 절마다 모두 풍수에 기인하여 창건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남원지역의 많은 절들은 대다수가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남원의 풍수를 보아 적당한 곳에 절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런 도선국사의 일화는 수도 없이 많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도선은 틀림없이 신라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려 때 지은 절에 도선국사가 창건을 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생몰연대조차 정확하게 따져보지 않은 이런 류의 안내로 인해 가끔은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용담사

남원에서 운봉을 향해 가다가 보면 남원을 벗어나는 곳이 주천면이다. 이곳 도로 좌측에 보면 용담사라는 절의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보물 제42호 용담사지 석불입상이 있다고 적혀있다. 용담사에 소재하고 있는 석불입상에 관해서는 두 번째 글을 쓰고 있다. 문화재란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더 안목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용담사가 언제적에 지어진 절인가는 확실하지가 않다. 용담사 경내에 있는 안내판의 설명을 보면 ‘용담사지 석불입상’이라 쓰여 있다. 이것은 예전의 절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금의 용담사는 이름만 전하는 용담사 터에 세워진 절이라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절이라는 설과, 통일신라 말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정작 석불입상 앞에 적힌 또 하나의 안내판에는 전혀 황당한 긇이 적혀있다. 용담사에 관한 내력을 적은 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증없이 적어 놓은 글이 문화를 잘못 알려

<천년의 향기 - 용담사는 고려시대 사찰로써 천년전 절이 세워지기 전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고있어, 밤이되면 여우로 둔갑하여 사람을 잡아먹고 농작물을 해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려도 어찌할 수 없었으나 마침 도선국사께서 큰 원력을 새워 이곳에 미륵물을 모시고 기도 중에 해탈주를 독송하니 이무기가 순간 업보의 허물을 멋고 용이되어 사라졌다. 해서 용담사라는 전설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이 설명 하나가 결국 절의 내력을 다 망쳐놓은 결과가 되었다. 신라 때 고승인 도선국사가 고려 때에 젏을 지었다는 황당한 설명에는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구를 적은 안내판을 석불입상 앞에 버젓히 세워놓아 문화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담사는 고려 떄가 아닌 신라말에 지은 절이며,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여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질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거대석불로 보이는 용담사 석불입상

보물 제42호인 용담사지 석불입상은 광배와 입상이 '일석(一石)'으로 꾸며졌다. 대개 석불의 경우에는 불상과 광배가 따로 제작이 된다. 하지만 용담사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바위를 이용해 입상과 광배를 조각하였다. 석불입상은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의 거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높이가 6m에 달하는 이 석불입상은 체구가 당당하다. 

용담사 석불입상은 이 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고려 시대 미륵의 형태이다. 머리위에 육계의 윤곽은 비교적 뚜렷하고, 귀는 긴 편이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법의는 거칠게 표현을 하였으며, 두 손 등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많은 훼손이 되어 있어서 그 형태만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석불의 안면 밑으로는 양 편 어깨부근에 구멍이 하나씩 나 있는데, 이 구멍의 용도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무슨 장식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는 자연석 위를 둥글게 조성하였다. 이곳에도 양편에 구멍이 나 있다. 아마도 이 석불입상을 보호하기 위해 전각을 지었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화재 하나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안내판 하나를 잘못 기재함으로써, 문화재의 소중함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잘못된 안내판은 하루 빨리 철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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