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1756번지에 소재한 <충주조동리지석묘>. 아파트를 연상케 하는 이 지석묘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이 되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흔히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러한 고인돌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고인돌이 충주 조동리에 소재하고 있다.


불교와의 접목으로 탑과 같은 형태

충주 조동리의 지석묘는, 조동리 탑평마을 중심부에 위치하며 민가에 둘러싸여 있다. 이 고인돌은 3층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여러 개의 자연석을 고임돌로 사용하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조동리 고인돌은 인근에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조동리 선사시대 생활유적과 인접하고 있어, 중원지방의 청동기시대 생활문화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그런데 이 고인돌이 처음부터 이렇게 3층으로 되어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이런 형태의 모습은 후에 어떤 계기에 의해서 또 디른 모습으로 변형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지방의 고인돌과 달리 덮개돌 위에 평면 타원형의 돌을 올려놓아 3층의 탑과 같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조동리 지적묘.



아랫단의 덮개석은 그 크기가 450×350×100cm의 커다란 돌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를 굄돌을 이용하고 또 다시 2층을 더 올려놓았다. 덮개돌 위의 2층은 본래 고인돌 축조와는 시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불교 전래 이후 탑의 모습을 모방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고인돌과 불교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독특한 양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희한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워

조동리 지석묘가 언제 이렇게 변형된 모습으로 바뀌었는가는 정확히 시기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마을을 ‘탑골’ 또는 ‘탑평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마을의 이름도 이 고인돌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바둑판식 고인돌로서 3층 구조의 특이한 외부구조를 갖추고 있는 조동리 고인돌.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며, 청동기시대의 묘제연구에 중요한 학술 자료가 되고 있는 이 고인돌은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처럼 3층으로 올려쌓은 특이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탑골마을 고인돌. 문화재답사는 이런 재미가 있어, 늘 설레게 만든다.


제대로 지역에 있는 문화재 하나 주변 정리도 못하는 지자체가, 문화 운운하는 것은 정말로 짜증스럽다. 용인시는 딴 지역에 비해 월등한 문화자원을 갖고 있는 곳이다. 공연장만 해도 용인시청 청사 내를 비롯해, 수지 등 몇 곳에 어느 곳에도 뒤처지지 않는 공연장을 갖고 있다. 그런 용인시에 소재한 문화재가 방치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어이가 없다. 문화재 주변에 가득한 말라버린 덤불이며, 누군가 갖다 놓은 농기구 등, 이렇게 문화재 관리를 하고 있다는 것에 울화가 치민다. 많은 문화재를 보았지만, 이렇게 황당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264번지에 가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2호로 지정된 공세동 오층석탑이 있다. 탑안마을이라고 하는 곳에 서 있는 이 공세동 탑은 몇 년 전부터 찾아다닌 탑이다. 아파트 공사를 할 때부터 찾아갔으니, 어림잡아도 몇 년은 지난 듯하다. 당시는 이 탑을 보기 위해 여러모로 힘을 썼지만 찾지를 못했다. 이번 12월 26일 답사 길에서 만난 공세동 탑. 혼자 그렇게 독야청청하게 버티고 있는가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2호인 용인 공세동 오층석탑. 주변이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백제계열의 고려 석탑

공세리 오층석탑은 백제탑을 모방한 고려시대의 탑으로 보인다. 탑의 높이 2.5m의 이 석탑은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옛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곳에 서 있다. 그 옆에는 목이 잘린 석불이 한 기 마른 덤불 속에 방치되어 있다. 탑의 앞에 서 있는 문화재 안내판을 보면 이 석불의 머리가 없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석불이 지금처럼 머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나보다.

「높이 2.5m의 이 탑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옛 절터에 불상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백제계 석탑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은 지대석에는 연꽃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윗면에는 낮은 받침이 있다.(하략)」

이와 같은 설명으로 보아 무너져가고 있는 담장 밑에 방치되어 있는 목 없는 석불 한기가 같은 절터에서 발견이 된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는 사라지고, 기단부의 상단은 앞뒤 판석이 없다.

옛 절터, 사전에 발굴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졌을까?

이 안내판을 보면서 의아한 점이 있다. 5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는 공세동 옛 절터라는 옆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몇 년 전인가 이 탑을 답사를 하려고 왔을 때는, 이곳에 아파트를 짓느라 부산했을 때이다. 그런데 그 당시 이 탑 주변의 발굴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가 궁금하다. 아마 당시 아파트를 짓느라 이 일대를 다 파헤쳤을 텐데, 그런 절터에 관한 것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은 가셨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문화재가 서 있는 곳을 발굴한다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다. 더구나 이곳이 절터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좀 더 세심한 발굴이 이루어졌어야만 했다. 또한 아파트를 건설한 축대 밑에 있는 이 석탑과 불상에 대해, 조금 더 신경을 써서 관리를 해야만 했다. 도로에는 수많은 예산을 쏟아 붓고 있는 지자체에서, 이렇게 문화재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납득이 가질 않는다.

안양사로 추정하는 절터라는 곳에 있는 석불좌상. 목이 없고 주변은 온통 말른 덤불투성이다.

일설에는 안양사라고 하는 절터였다고 하는데, 그런 것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만 같다. 그리고 이렇게 덤불 속에 방치된 석불좌상 등 분노마저 느끼게 하는 문화재 관리이다. 만일 사전에 충분한 발굴이 이루어졌다면, 그에 대한 조사보고 정도는 안내판에 적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름 섬세한 고려시대의 석탑

이 공세동 오층석탑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고려시대의 석탑으로는 상당히 정교하게 조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단부는 네모나게 조성을 해 연꽃문양을 둘렀는데, 상면만 땅 위에 보일뿐, 흙에 묻혀있어 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주변을 정리하고 흙이라도 좀 파냈다면 한결 보기가 좋았을 것을. 상층 기단부는 앞뒤의 판석이 떨어져 나갔다.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는데, 탱주가 없는 것은 탑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몸돌은 모두 오층으로 조성이 되었는데, 일층의 몸돌은 크고 이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일층은 탑 몸돌과 덮개석을 따로 제작했는데, 이층부터는 몸돌과 덮개석이 한 장의 돌로 꾸며졌다. 지붕돌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그 위에 추녀를 두었는데 처마꼬리가 약간 위로 치켜 올려졌다. 비록 일부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약간 치켜 올라간 처마 등 나름 멋진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는 모두 사라져 어떠한 형태였는가를 알 수가 없음이 아쉽다. 이제라도 공세동 오층석탑 주변을 정리를 하고, 문화재다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인근 아파트에 사는 자라는 학생들이 이런 모습을 본다면, 우리 소중한 문화재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갖게 될까 걱정스럽다. 가뜩이나 문화재가 홀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요즈음에.

기단부가 땅에 묻혀있어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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