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타고 다녔다는 정승 고불 맹사성. 맹정승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많이 전하는 편이다. 정승 고불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인 1360년에 태어나, 조선조 세종 20년인 1438년에 세상을 떠났다. 려말과 선초에 걸쳐 세상을 살다 간 맹사성은 본관은 신창이며 자는 자명, 호는 고불이다.

많은 벼슬을 거쳐 1427년에는 우의정이 되었으며, 1432년 좌의정을 지내고 난 후 1435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정승 황희와 함께 조선 초 우리 문화를 금자탑을 이룩한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고불 맹사성.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로 명성을 높였으며, 효자로 유명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지기도 했다.


청빈한 삶을 살다간 맹사성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소재한 고불 맹사성의 옛집. 사적 제109호인 '맹씨 고택'은 맹사성이 살던 고려 때 지어진 고택과 더불어 맹사성이 심었나는 수령 600년이 지난 은행나무, 그리고 맹우와 맹희도, 맹사성의 위폐를 모신 세덕사가 있다.

평소 청빈한 삶을 살아 온 맹정승은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면 대문 밖까지 나가 맞아들이고, 언제나 상석에 앉혔으며 손이 떠날 때도 반드시 대분 밖까지 배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하는 ‘쌍행수’

고불의 고택이 있는 곳을 ‘맹씨 행단’이라고 한다. 행단은 은행나무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담으로 양편을 쌓은 쪽문 안에는 <청백리 고불 맹사성 기념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밖으로 돌아 계단을 오르면 맹사성의 유적을 관리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듯, 솟을대문 안으로는 ㄱ 자 형의 집이 있다. 그 집을 바라보고 우측 계단으로 오르면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고물 맹사성이 1380년경에 이곳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이다. 두 그루 은행나무 중 우측의 은행나무는 외과 수술을 한 듯, 나무 가운데에 남성의 성기 같은 시멘트로 바른 죽은 가지가 보인다. 수령 630년이 지난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쌍행수'라고 부르는데, 높이는 35m 둘레는 9m 정도에 이른다. 잎이 떨어져 가지만 남아 있어도 이렇게 위용을 보이고 있으니, 여름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면 대단할 것 같다.

최영장군도 살다 간 680년 역사의 맹씨 고택

은행나무 앞으로 자리하고 있는 고택 한 채. 바로 고불 맹사성이 살았던 고택이다. 이 집은 고려 충숙왕 17년인 1330년에, 최영 장군의 부친인 최원직이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무민공 최영이 살았던 집이다. 최영장군과 고불 맹사성이 살았다는 고택 한 채. 이 집의 내력이 대단하다.

고불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자사위이다. 최초로 지어진 지 680년이나 된 이 고려 때의 고택은, 최영과 맹사성이라는 역사의 일면을 장식한 두 사람이 거처로 정했던 곳이기도 하다. 맹씨 고택은 성종 13년인 1482년, 인조 20년인 1642년, 그리고 순조 때인 1814년과 1929년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집은 '공(工)' 자 형으로 꾸며져 있으며, 27.5평에 불과하지만, 고려 때의 고부재와 창호 등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집이다.




집안 곳곳에 배어 있는 고불의 청렴

두 사람의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 살다 간 고택. 최영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다. 고불 맹사성은 청백리로 소를 타고 다니며 직접 아궁이에 불을 땔 정도로 청렴한 정승이었다. 이렇게 세상의 탐욕과는 거리가 먼 두 분의 마음이 맹씨 고택에는 그대로 배어 있다. 기단은 커다란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주추도 다듬지 않은 덤벙주추를 놓았다. 중앙에는 두 칸의 마루를 놓고, 양편에는 길에 방을 드렸다. 그 방의 끝이 앞뒤로 삐죽이 나와 工 자 형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방은 별다른 꾸밈없이 양편에 길게 들였는데, 뒤편을 막아 각각 윗방을 들였다. 이 집의 아궁이는 별다르게 부엌을 만들지 않고, 앞면 담 밖에 아궁이를 놓았다. 이런 아궁이의 형태는 밑에 사람을 쓰지 않고, 직접 불을 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불 맹정승의 청빈한 삶을 그려 볼 수 있는 것이다.



700년 가까운 세월. 그렇게 청빈한 주인들이 살다 스러져간 고택 한 채. 그 집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요즈음 돈푼께나 있고, 권력께나 가졌다는 자들은 앞을 다투어 고래등같은 집을 짓고 자기자랑을 하고자 할 때, 그저 작은 집 하나로 비바람을 피했다. 그 청빈하고 세상에 찌들지 않은 마음 하나를, 비워놓은 내 마음에 담아간다.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84번지, 학성산에 위치한 ‘인취사’. 2월 13일, 일요일에 찾아간 인취사는 그리 넓지 않은 길을 구불거리며 들어간다. 인취사 주변은 온통 연꽃이 즐비한 곳이다. 연꽃축제로 더 알려지기도 한 이 절은, 백제 무녕왕 18년인 518년에 창건했다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 법흥왕 때 창건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주지 ‘창암스님’은 극락전에 모셔진 삼존불 등에 넣어둔 절의 내력을 적은 복장물들이 다 도난을 당해, 절의 중창 년대 등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신다. 인취사는 공주 마곡사의 말사이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인취사(咽嘴寺)’라고 나와 있고,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에는 지금과 같은 ‘인취사(仁翠寺)’로 적고 있다.


축대 밑에 자리한 연꽃단지

인취사를 둘러본다. 현재 주지인 창암스님이 이곳에 부임해 축대를 새로 쌓고, 안쪽에 있던 종각을 축대 앞으로 끌어내 정리를 하였다고 한다. 반듯하게 쌓은 축대 밑에는 고무 통을 나란히 땅을 파고 묻어, 그곳에 연꽃을 심어 놓았다. 봄이 되면 각종 연꽃이 피어나는 것이 볼만 하다는 곳이다.

넓은 마당의 뒤편으로는 삼존불을 모신 극락전이 자리하고, 그 앞으로는 공양간이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곳을 딴 용도로 사용했을 것 같다. 공양간 좌우편 끝에는 요사가 자리하고, 그 중간에 석탑 2기가 서 있다. 그저 넓은 공간에 듬섬듬성 서 있는 탑이며 전각들이, 조금은 휑한 듯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산비탈에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시원한 정경이 펼쳐진다.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석탑 2기

인취사에는 옛 석탑이 2기가 서 있다. 극락전을 바라보고 좌측 보호철책 안에 서 있는 이 석탑은 모두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다. 앞에서 산 쪽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것은 오래된 것이나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오른쪽에 서 있는 탑은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23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화강암 석재로 구성한 이 석탑은 기단 갑석위에 삼층 석탑이 올려 진 상태로 있다. 기단갑석은 한 편이 떨어져 나가 상태이고, 탑신과 옥개석인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탑신인 몸돌에는 양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의 받침은 아래서부터 4-3-3단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2단의 굄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삼층석탑은 비례가 맞지를 않는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깊게 떨어지고 있으며, 옥개석 끝의 반전도 그리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보이고 있어, 전체적인 탑의 모습을 가늠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5층으로 추정되는 인취사 석탑

탑의 맨 위에는 부정형의 돌을 하나 올려놓았다. 이 탑도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닌데, 절을 정리하면서 이곳으로 모아 놓은 듯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탑은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단갑석의 크기가 탑의 크기에 의해 맞지가 않는다는 것이 그 첫째 이유이다.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탑은, 아래 이층부분이 유실된 듯하다. 기단부가 없어지고 갑석만 남아있는데, 그 갑석의 크기로 보아도 그렇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취사 삼층석탑. 비록 문화재자료이기는 하나, 그 또한 소중한 고려시대의 유산이다. 이런 탑 하나에도 공을 들여 조성을 했을 당시 장인의 마음과 손길을 기억해 내는 것은, 지금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다.

2월의 찬바람에 올라간 인취사. 넓은 절터에 부는 한줄기 바람이 탑을 돌아 저 밑 연꽃마을로 사라진다. 곧 꽃피는 춘3월이 돌아오면 인취사는 각종 아름다운 연꽃으로 단장을 하게 될 테고, 그 바람 한 점이 꽃을 재촉하는 듯하다.


충남 아산시 장존동 산 60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설화산 오봉사. 절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너무 조촐해 보아는 이 곳은 마곡사의 말사이다. 그저 오봉사라는 명칭보다는 오봉암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한 사찰이다. 현재는 대웅전과 요사, 그리고 가건물로 지은 공양간 건물이 다이지만, 상당한 역사를 지닌 절이라고 한다.

2월 13일 일요일. 버스가 오르기도 버거운 딜을 올라 오봉사에 도착을 했다. 오봉사 앞 마당에는 고려 때의 석탑으로 보이는 삼층 석탑 한기가 있다. 오봉사가 자리하고 있는 설화산은 온양 온천수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설화산이라는 명칭보다는 오봉산이라고 즐겨 부른다. 이 오봉사에는 보기에도 험상궂은 개 두 마리가 살고있다. 절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는 녀석들을 보면, 겁이라도 덜컥 먹을 것 같은 모습이다. 

아산 설화산 오봉사에서 만나 호피무늬견 두 마리

호피무늬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 '호구'

우리는 흔히 누렁이를 '황구', 흰개를 '백구'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늬가 흡사 호랑이처럼 얼룩덜룩한 이 개는 호피무늬견, 혹은 호구라고 부른다. 진돗개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두 녀석은 묶지도 않는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설화산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닌다. 


눈밭을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개라기 보다는 늑대와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보는 분들은 겁을 먹기도 하지만, 이녀석들 관심도 없다.


표정을 보면 웬만한 개들은 미리 겁부터 먹고 꼬리를 감출 것만 같다. 그렇게 사람들이 사찰 안에 가득차 소음이 일어도 두 녀석이 산속을 돌아다니고 있다.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서인가? 불러보아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한참을 산 속을 돌아다니던 녀석들이 절로 내려온다. 두 녀석이 앞서거니 뒤거서니 하면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으젓하게 폼을 잡는다. 그러고보면 오봉사를 찾은 사람들에게 꽤나 많이 포즈를 잡아주었나 보다.




'어이 이쪽으로 고개좀 돌려봐'
'거 왜 자구 귀찮게 그래 쫒아다니면서. 그리고 나 이름있어, 어이가 머여'
'얼굴 사진하나 찍자고'
'아자씨, 얼굴 찍지마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아니 그게 아니고, 멋있잖아 모델 한 번 해주라고'
'모델료는 좀 낼꺼야. 딱 보니 사진만 신나게 찍고 사라질 것 같은데'

두 녀석 사진을 찍으라고 하는 것일까? 제법 얼굴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보았자다 녀석들아.


절을 찾아온 분이 이 녀석들을 불러 배를 문질러주자 좋다고 낑낑댄다. 그저 아무리 인상이 험한 녀석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순둥이다. 절집에서 자라는 녀석들은 대개 풀어놓고 지내게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에게 위협적이지가 않다. 이 녀석들 생긴 것 하고는 영 딴판으로 순둥이다.


'아자씨 얼른 찍어 눈 위에서 이게 머여, 배시럽게'
'알았어 잠깐만 참아 이왕이면 이쪽으로 고개좀 돌리지 그래'
'그건 안되지'
'녀석 깐깐하기는'
'이봐요 아자씨 그래도 내가 호구라는거 아녀'

두 녀석과 친해지기 시작하는데 버스가 떠난다고 재촉이다. 다음에 오봉사를 찾을 때는 녀석들이 좋아하는 뼈다귀라도 들고 가보아야겠다. 더 좋은 포즈를 취해줄 수도 있으니.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소재한 외암리 민속마을은,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그리고 마을 안에는 충청지방의 양반집과 초가가 한데 어우러져, 우리의 기옥구조나 실생활 등을 볼 수 있는 전통의 마을이다. 조선조 경종 3년인 1723년에 이간 선생이 지은 <외암기>에는 마을 이름을 '외암'이라 기록한 사실이 있어, 외암의 명칭이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외암리 민속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집단으로 한 마을이 중요민속자료로 정해진 몇 곳 안 되는 곳 중 한 곳이다. 경주의 양동마을, 순천의 낙안마을과 강원 고성의 왕곡마을 등이 이렇게 집단으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외암리 민속마을은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 민속마을 외암리 민속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집단으로 한 마을이 중요민속자료로 정해진 몇 곳 안 되는 곳 중 한 곳이다

 

입장료 징수에 맞는 관람이 이루어져야

 

외암리 민속마을은 사진작가 등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곳은 아산시민들은 주민등록증 등을 보여주면 무료로 관람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외지인은 경우 성인들은 2000원의 관람료를 지불하여야만 한다. 문제는 이렇게 관람료를 지불하고도 몇몇 집은 밖으로만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민속마을 등에 들어가면 그 안에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밖으로만 맴돌다가 나온다면, 굳이 관람료를 지불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외암리 민속마을의 경우 마을 안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되어 있는 집이거나, 그 외에 몇 집은 아예 문을 걸어두거나, 개인의 소유임을 써 붙이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주 양동마을의 경우 누구나 관람료 없이 마을을 돌아볼 수가 있다. 물론 몇 집은 사생활이 침해받는 것을 싫어 출입을 제한한다는 문구가 보이기도 한다.

 

▲ 건재고택 중요민속자료인 건재고택.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 건재고택 담 밖에서 본 건재고택, 아름다운 정원 등이 있어 외암리에서도 가장 뛰어난 고풍을 자랑하는 집이다.

 

만일 관람료를 받았다면 그만큼의 충분한 관람을 책임져야만 한다. 사람이 살기 때문에 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하면,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개방을 하거나,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서라도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꼭꼭 닫혀있는 집들은 관람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관리소 측의 대답이다. 물론 주차료로도 그만한 돈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주 세종대왕릉이나 효종대왕릉의 경우 주차는 무료이다. 그리고 두 곳의 능을 관람하는 대도 대인의 경우가 일괄 천원이다. 2000원을 받든지 얼마를 받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외지에서 온 관람객들을 위한 서비스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꾸며놓은 시설물, 외국인들에게 미안해

 

▲ 물레방아 마을 입구 다리건너에 있는 물레방아. 그러나 그 기능을 잃었다

▲ 디딜방아 공이가 찧는 부분은 다 망가지고 낙엽만 수북하다.

 

외암리 마을에서 관람료를 지불하고 다리를 건너면 좌측에 물레방아가 있다. 물은 흐르는데 정작 방아는 찧어지지 않는다. 가까이 가서보니 물의 힘으로 수차가 돌아가면, 방아를 움직여야 하는데 연결되는 부분이 연결이 안 되어 있다. 마을을 돌다가 보면 디딜방아와 연자방아도 보인다. 그런데 이 방아들 역시 대충 모양만 꾸며 놓았다. 디딜방아 공이가 곡식을 찧는 부분은 무너져 있고 가득 낙엽 등이 쌓여져 있다.

 

외암리 민속마을은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디딜방아를 돌아보다가 눈살을 찌푸린다.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대충 들어보니 어떻게 여기서 방아를 찧느냐는 것이다. 그저 보여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이 실제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모습만 갖춘 이런 것들을 볼 때,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보이지 않는 안내판 정비해야

 

 
▲ 안내판 글이 다 지워져 알아볼 수 없는 안내판

▲ 외국인들 민속마을 관람을 하고 있는 외국인들. 좀 더 신경을 써서 제대로 된 마을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마을을 돌다가 보면 집 앞에 그 집이 어떤 집이었나를 안내하는 안내판들이 있다. 여러 성씨가 살았으나 조선조 명종 때 예안 이씨인 이사종이, 세 딸만을 둔 진한평의 첫째 사위가 되면서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면서 동족마을이 된 곳이 바로 외암리 민속마을이다. 그러다 보니 마을 내에는 종손집, 참판댁, 송화댁 등 가호가 붙은 집들이 있다. 이렇게 집집마다 명칭이 붙으면서 그 내력을 설명한 안내판이 집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 중 몇 곳의 안내판은 글이 지워지고 훼손이 심해 알아볼 수가 없다. 마을의 여기저기서 보수를 하느라고 주변이 부산하다. 관람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추어 놓아야 우리 것을 제대로 알릴 수가 있다.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모습에서 우리 민속마을의 아름다움이 제 가치를 잃는다면, 차라리 보여주지 아니함만 못한 것이 아닐까?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져, 민속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더 기분 좋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9)



아산시 읍내동 159번지에 소재한 온주아문 및 동헌은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아 건물이다. 동헌의 뒤로는 낮은 남향의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문은 동헌의 문을 말하며, 현판에는 「온주아문(溫州衙門)」이라고 써 놓았다. 이렇게 명칭을 붙인 것은 신라 문무왕 3년인 663년에 이 군의 명칭을 온주라 붙인 데서 비롯한 것이다.

 

온주아문의 문루는 이층의 누각으로 되어 있다. 문은 모두 장대석으로 기단을 깔고, 그 위에 사각형의 기초석을 갖춘 높이 1.5m 정도의 주형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고종 8년인 1871년에 중건한 아문은 모두 세 칸으로 마련을 하였으며, 우측으로는 누대 위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놓았다. 그러나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이 곳 누대로 오르는 계단 위도 자물통이 채워져 있다. 문화재의 보존을 위함이지만, 차라리 관리자를 두고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 온주아문 온주아문에 걸린 현판. 이곳이 신라때 온주였기 때문에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듯하다.

 
▲ 잠긴 문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자물통으로 잠겨있다.

 

원형 복원을 마친 동헌

 

동헌은 아문을 들어서면 뒤편에 서 있다. 현재 이 문화재 지역 안에는 동헌건물과 아문 두 동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 동헌의 건물은 조선조에는 온양군의 동헌으로 쓰이다가, 일제 때인 1928년부터는 일제의 주재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파출소로, 1986년 시 승격 후에는 20년 간 온주동 동사무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이용을 하면서 그 원형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동헌은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동헌을 바라보면 좌측 한 칸은 돌출된 방을 놓았고, 다음 두 칸의 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한 칸의 방을 두었다. 좌측의 한 칸의 방을 빼면 대청 앞으로 낸 툇마루로 모두가 연결이 되어 있다. 그동안 동헌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1993년 4월 예산을 들여 1995년 5월에 원형대로 복원을 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 온양군 공해조에 보면 동헌 10칸, 아사 23칸, 객사 37칸, 무학당 3칸, 향청 12칸 등 건물이름과 칸수가 기록되어 있어, 온주 동헌의 옛 모습이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 동헌 원래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아문과 동헌 두 동만이 남아있다

 
▲ 경고문 동헌의 방문 등에 하얀쪽지가 경고문구다. 여기저기 많이도 보인다.

 
▲ 들어가십시오 '들어가지 마십시오'란 문구를 글자를 지워놓아 '들어가십시오'가 되었다.

 

문화재 훼손이 징역 2년 이상이면, 관리 소홀은?

 

동헌을 한 바퀴 돌아보니, 여기저기 보수를 해야 할 곳들이 보인다. 겨우내 손을 보지 않았는지 동헌 뒤편 배수로의 축대 돌들은 무너져 내리고, 문을 바른 창호지는 누군가 일부러 찢었는지 모두 너덜거린다. 마루에 '들어가지 마십시오'리고 쓴 푯말은 '지'와 '마'를 지워놓아 '들어가 십시오'란 푯말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훼손이 된 창호의 밑에 무엇인가가 안팎으로 붙어 있다. 글씨를 보니 건조물 파괴, 창살문, 창호지 훼손 등 문화재를 파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징역 2년 이상에 처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관리소홀인 담당자는 어떻게 처벌을 해야 할까? 물론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양식 없이 하는 행동이 문화재를 훼손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이렇게 경고성 문구를 여기저기 수도 없이 붙여놓은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훼손이 징역 2년 이상이라는 문구를 적었다면, 관리 소홀도 그와 상응하는 처벌을 해야 하지 않을까?

 

▲ 무너진 배수로 배수로의 축대가 무너져 내렸다. 겨우내 한 번도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 창호 심하게 찢어져 걸레가 된 창호

▲ 경고 관람객들에게만 경고를 할 것이 아니라, 관리소홀을 한 사람들이 먼저 경고를 받아야 할 판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를 온전히 관리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경고성 문구나 무조건적인 잠그기보다는, 온전히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인원배치가 우선이다. 매번 들어가는 보수비용만 갖고도, 그런 지킴이 한 명 정도의 인원을 쓸 수 있는 예산은 충분하단 생각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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