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산136-11에 소재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4호인 고성화암사(高城禾岩寺)’는 신라 혜공왕 5년인 769년에, 법상종의 개조인 진표율사가 화엄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이 절은 조선 인조 1년인 1623년에 소실되었다가, 인조 3년인 1625년에 고쳐 짓는 등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그 뒤 고종 1년인 1864년에는 지금 있는 자리인 수바위 밑에 옮겨 짓고, 이름도 수암사(穗岩寺)라 하였다가 1912년에 다시 화암사(禾岩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전쟁 때 다시 한 번 불에 타 모두 소실이 되었던 것을 훗날 법당만 다시 지었다. 화엄사 경내에 현존하는 건물들은, 1991년 세계 잼버리대회 준비를 위해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것이다.

 

 

화암사 경내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일주문,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부도군과 일부 계단석이 남아 있다. 화암사는 금강산 일반 이천봉 팔만 구암자 중 남쪽에서 시작하는 봉우리의 두 번째인 신선봉의 바로 아래 세워져 있다고 한다.

 

수바위에 얽힌 전설

 

속초에서 고성으로 올라가는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금강산 화암사라는 이졍표가 보인다. 또 한 곳은 속초에서 미시령 터널로 향하다가 미시령 옛 길로 접어들어도 같은 이정표가 보인다. 어느 방향을 택해도 화암사를 찾기에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화암사경내를 향해 가다가 좌측에 보면 희게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바위를 수바위라고 부른다.

 

이 절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화암사라 부른 것은 1912년부터이다. 절 이름을 바꾸게 된 것도 화암사 남쪽 300m 지점에 우뚝 솟은 왕관 모양의 바위인, 이 수바위에 얽힌 전설 때문이다.

 

 

진표율사를 비롯한 화암사의 스님들은 모두 수바위 위에 편안히 앉을만한 곳을 찾아 좌선을 시작했다. 이 수바위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 그곳에서 기우제도 지냈다고 한다.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의 공양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주를 해오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수행을 하던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구멍을 지팡이로 세 번만 두드리면 쌀이 나올 것이다. 그 공양미로 밥을 지어먹고 열심히 수행에만 힘쓰라고 사라졌다. 꿈에서 두 사람이 같은 백발노인을 본 것을 이야기를 한 스님들은 백발노인의 말대로 했더니 정말 쌀이 나왔다.

 

 

지금도 이 수바위에서 기도를 한 스님이나 신도들이 밤에 꿈을 꾸면 이 백발노인이 나타나 미리 닥칠 일을 알려준다고 한다. 하지만 회암사로 이름을 바꾸게 한 그 수바위의 쌀이 나오는 구멍은 어찌되었을까? 여기도 마찬가지로 욕심이 많은 한 사람에 의해 그 쌀이 나오는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전설은 그렇게 어디서나 똑 같이 마무리를 한다.

 

삼성각은 유명한 기도도량

 

봄이 금강산 줄기 아래 고성 땅에 꽃소식을 몰고 올 때 찾아갔던 회암사. 한편에서 봄을 알리는 벚꽃이 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삼성각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미 촬영을 다 마치고 여유롭게 삼성각을 합 바퀴 돌아보고 싶어서이다. 화암사 삼성각은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서원이 이루어지려나?

 

 

삼성각 안 벽면에는 금강산 천신대, 상팔달, 세선봉, 삼신대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화암사가 금강산 화암사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긴 이 화암사에서 진표율사가 화엄경을 설하고 난 뒤 그의 제자 100명이 화엄경을 배우다가 그 중 31명이 하늘로 올라가고, 남은 69명은 무상대도를 얻었다고 하는 곳이다.

 

이런 이야기는 고성 끄트머리에 있는 절 건봉사에도 전한다. 건봉사에는 그렇게 많은 스님들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곳에 등공탑이 서 있어, 이곳보다 더 실제에 가깝게 느껴진다. 삼성각에서 참배를 하고 전각 밖으로 나온다. 수바위에서 불어온 바람 한 점이 108배에 흐른 땀을 식혀준다. 이런 행복함에 절을 찾는 것이다 아닌지.

 

지자체들, 혹은 언론사, 혹은 국가가 수여하는 상중에 봉사대상이라는 상이 있다. 그런 상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저마다 나름대로 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런 점에서는 수상을 한 사람들에게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다. 철저하게 검증을 거쳐서 주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모르고 있는 봉사자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오히려 그 분들 중에서 봉사대상을 받아야한다는 것이 내 속 좁은 생각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매년 천만 원에서 억이 넘는 막대한 돈을 슬그머니 갖다 놓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라는 사람도 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해마다 자신이 많은 돈을 들여 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알지 못해야

 

진정한 봉사는 자랑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 세상을 보면 별로 크지 않은(적어도 그 사람의 자산을 보면 큰 것이 아니란 생각이다) 것을 내놓고 있는 대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래서 세상은 자꾸만 각박해져 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자신이 가진 것에 개미 눈곱만큼 내놓고도 엄청 선심을 쓰는 양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 참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는 생각이다.

 

내가 아는 사람이 있다. 남들은 이 사람을 그저 마음 착한 동네 이웃정도로 생각한다. 늘상 이 사람이 하는 일이 그랬다. 한 두 해가 아니다. 자그마치 30년이 넘는 세월을 늘 그렇게 살아왔다. 그저 혼자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생활도 30년 넘게 지속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년을 두고 보았다. 정월에는 떡국을 끓여 동네 어르신들에게 대접을 한다. 초복이 되면 삼계탕을 맛있게 끓여 온 동네 어르신들을 초청해 대접을 한다. 그 삼계탕에 200그릇이 넘는다. 삼계탕 집을 해도 이 정도 그릇을 채우려면 버겁다. 하지만 삼계탕만이 아니다. 음료수에 떡과 과일까지 곁들인다. 이렇게 봉사를 할 때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나와 봉사를 돕고는 한다. 그만큼 주변에서 인심을 잃지 않은 탓이다.

 

중복에는 육개장을 끓여 어르신들을 대접한다. 미처 먹지 못한 어르신들은 나중에라도 드실 수 있도록 그릇에 담아 갖다드린다. 가을이 되면 이 집은 김치공장을 방불케 한다. 웬만한 주민센터보다 김장을 더 많이 담는다. 그리고 그 김장을 한 것을 홀몸어르신들이 사는 집에 배달까지 해준다. 자그마치 700포기에서 1,000포기의 배추로 김장을 한다. 이렇게 30년 세월을 해왔다. 하지만 아직 이런 봉사를 지자체에서도 알지 못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년 경로잔치로 어르신들 위문해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번지(창룡문로 56번길 18)에 거주하고 있는 고성주씨(, 60). 이 집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고성주씨의 하는 일은 신을 모시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무속인이다. 하지만 고성주씨는 그냥 무속인이 아니다. 춤은 물론, 소리까지 곁들인 당대의 재인이다. 그런 고성주씨의 한 해는 그야말로 봉사로 시작해, 봉사로 일 년을 마감한다.

 

매년 한 차례씩 이집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든다. 경로잔치를 하기 때문이다. 떡과 과일, 고기, , 전 상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차려놓는다. 그리고 소리꾼들이 모여 소리를 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모여 춤으로 흥을 돋운다. 어르신들도 흥이 나면 함께 춤을 춘다. 근동 어르신들은 고성주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주민센터에서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들어 온 쌀은 재포장을 해 이웃에 나누어준다. 오직하면 정미기계를 집에 마련해 두기까지 했을까? 그리고 동짓날이 되면 커다란 가마솥에 팥죽을 끓여낸다. 엄청난 양이다. 이날도 어르신들이 모여 팥죽을 드시고 한 통씩 싸들고 가신다. 한 사람이 일 년 동안 하는 봉사치고는 엄청난 경비를 사용할 것만 같다. 그럼에도 30년 이상을 계속했다고 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봉사왕은 바로 이 사람이다.

 

고성주씨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경로당과 불우한 사람들이 있는 곳을 즐겨 찾아다닌다. 그곳에 가서 춤도 추고 소리도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수원 연화장에 왔을 때, 고성주씨는 그곳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신칼대신무 춤을 추기도 했다. 누구도 선뜻 나서 춤을 추려고 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만큼 어디나 무엇이나 봉사로 따진다면 그를 따를 자가 없다.

 

그런데 세상은 참 이상하다. 남들에게 그렇게 많이 주는 상. 별로 봉사를 하지도 않은 듯한데 한 사람이 몇 장씩 갖고 있는 그 상장 하나가 없다. 한 마디로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을 줄 수 있는 사람들 곁에 가서 침에 발린 소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좋아서 하는 봉사라고 한다.

 

상을 받기 위해서라면 소문이라도 내었을 것을. 30년 이상의 세월을 핸 해도 거르지 않고 절기에 맞추어 봉사를 하는 고성주씨. 진정한 봉사왕은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본인이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흔한 상 한 장 마련함이 옳지 않겠는가?(신칼대신무 사진은 뉴시스에서 인용)

 

자 뻥입니다. 귀 막으세요

 

어릴 적 마을 안에 있는 장거리나, 시골의 5일 장 등을 찾아가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뻥튀기이다. 옥수수알이나 쌀, 보리, 혹은 누룽지 같은 것을 기계 안에 넣고 열을 가하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압력으로 인해 튀겨낸다. 튀기는 소리가 마치 대포가 터지는 듯 하고 소리가 나기 때문에 뻥튀기라고 했는가 보다.

 

뻥튀기는 과거 아이들의 간식거리가 마땅치 않을 때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뻥튀기를 해오면 다락에 놓고 잠가 놓는 일이 허다했다. 중독성이 있는 것 같은 이 뻥튀기가 곁에 있으면 배가 부른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손이 가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럴진 데 마땅히 먹을 것이 없던 옛날이야 오죽했을까?

 

 

5일장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뻥튀기

 

경기도의 한 지자체에서 5일장 책을 써 달라는 주문을 받고 어느 군의 5일장을 돌아본 적이 있다. 5일장은 5일마다 한 번씩 열리는 장으로 한 달이면 6번이 열린다. 1일과 6, 혹은 2일과 7. 3일과 8, 4일과 9일 등으로 5일 간격으로 장이 서는 것이다. 장이 크거나 작거나 이것은 관계없이 정해진 날짜에 장이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장마다 시간이 가면 한 번씩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이 지나가다 보면 놀라기도 한다. ‘하고 터지는 소리 때문이다. 그렇게 10분마다 한 번씩 터지는 뻥튀기는 하루 종일 이어진다. 뻥을 튀기는 기계 앞에는 줄을 지어 그릇에 쌀이면 옥수수 등이 들어 있다.

 

이런 뻥튀기를 좋아하는 것은 먹을 것이 도시만큼 없는 시골이기 때문은 아니다. 요즈음은 웬만한 시골에는 대형마트들이 자리를 하고 있어, 아이들의 먹거리는 도심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이렇게 뻥튀기가 인기가 좋은 이유는 손쉽게 집안에 저장을 해놓고 먹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소리에 깜짝 놀랐네.

 

15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못골시장에 들렸다. 필요한 것이 있어서 구입을 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복잡한 차도가 싫어서 일부러 미나리광으로 통하는 뒷길을 택했다. 조금 비좁기는 하지만 차와 사람에 부대끼지 않으니 늘 이 길을 이용한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하는 소리와 김이 하얗게 피어오른다.

 

그리고 보니 그동안 지나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집이 있다. 바로 남문 뻥튀기 집이다. 이 집은 날마다 문전성시다. 넓지 않은 골목길에는 항상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다. 뻥튀기 기계가 3대인가를 놓고 쉴 새 없이 튀겨낸다.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고 바쁘기도 하지만, 뻥을 튀기러 온 사람들이니 일부러 주의를 주지 않아도 알아서 조심을 한다.

 

그런데 그 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걷던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사람들이 그런 나를 보고 웃는다. 하지만 그렇게 예고도 없이 뻥을 튀겼다고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그저 멋쩍게 함께 웃을 수밖에. 그렇다고 그런 장면을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은가?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뻥을 튀길 테고, 좋은 기사거리가 하나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믿을 수 있는 간식거리인 뻥튀기

 

잠시 기다리고 있다가 시진촬영을 하니, 뻥을 튀기러 오신 분이 한 마디 하신다. ‘별 것을 다 찍는다.’. 하지만 이 추억의 장면이 어디 별것이겠는가? 이왕 사진까지 찍었으니 그 중 가장 젊은 분한테 질문을 한다.

 

뻥튀기 자주 튀겨가세요?”

, 한 달에 한 두 번은 꼭 와요

집에서 누가 뻥튀기를 좋아하시나 봐요?”

, 우리 아이들이 잘 먹어요

아이들은 이런 것 잘 안 먹지 않나요?”

아뇨 우리 아이들은 정말 잘 먹어요. 그리고 전 아이들에게 과자를 잘 안 먹어요. 요즈음은 과자도 믿을 수 없다고 하잖아요. 세상이 하도 어지럽다보니 수입용 밀가루를 긎고 과자를 만든다고 하잖아요. 심지어는 유전자 변형이 된 것도 있다고 하고요. 뻥튀기는 제가 직접 우리땅에서 키운 쌀을 사서 갖고 오니까 믿을 수도 있고요. 주문을 하면 화학 첨가무로 섞지 않고요. 아침에 우유나 콩음료 등과 함께 아이들에게 먹이면 건강에도 좋고요

 

맛있고 비싼 과자를 먹이는 것조차 안심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세상에 우리 전래의 뻥튀기는 얼마나 믿을 만한 식품인가? 무심코 지나다가 놀란 뻥튀기 소리. 그 소리가 오늘 유난히 정감이 있게 들린다.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62번지 일대에 소재한, 사적 제140호인 독산성과 '세마대지(洗馬臺址)'. 이곳은 몇 번이고 가본 곳이다. 이곳을 자주 찾는 것은 남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산 위로 올라가면 주변을 훤히 볼 수가 있어, 가슴이 후련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국민학교(우리 때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불렀다)에 다닐 때, 교과서에 실린 권율장군의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선조 26년인 1593년, 권율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 여명을 이끌고 독산성에 주둔하여, 가토가 이끄는 왜군 수만 명을 격퇴시킨 곳이기도 하다.

 

 

쌀로 말을 씻긴 세마대

 

산성에 오르면 보적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 뒤편에 지금은 정자가 서 있다. 정자에는 '세마대'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 세마대에 전하는 전설이 바로 국민학교를 다닐 때,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었다.

 

1593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권율 장군이 이끄는 병사 2만 여명이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가토(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이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내 조롱하였다. 그러나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백마를 산 위로 끌어 올려 흰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본 왜군은 멀리서 보니, 그 모습이 꼭 산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씻기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산성 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오판하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렇게 흰말과 쌀로 왜군을 속여 물리친 곳이 세마대이다. 사적 제140호는 독산성과 함께 말을 씻긴 장소라는 세마대지를 지정하고 있다.

 

도성을 지키는 요충지인 독산성

 

독산성을 언제 쌓았는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쌓은 성을,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중요한 거점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독산성은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성으로, 용인의 석성산성이나 광주의 남한산성 등과 연계하여 도성을 에워싸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조 27년인 1594년에는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1595년에는 성벽의 돌출된 치에 포루의 시설이 갖추어졌다. 1597년 2월에는 왜병의 조총을 방어하기 위하여, 평평한 집을 성벽 안에 짓고, 거기에 성의 아래로 향한 창문을 시설하였으며, 석차와 포차를 배치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인 1602년에도, 당시 부사 변응성이 성을 다시 보수하였다.

 

그 후 정조 16년인 1792년에도 성을 보수하였으며, 정조 20년인 1796년에는 수원읍성인 화성을 축조할 때 함께 개축하여 성을 단단히 하였다. 이렇게 독산성을 보수하고 단단히 쌓은 것은, 도성을 지키는 길목에 있는 군사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봄바람을 맞으며 독산성을 걷다

 

독산성의 둘레는 3240m이다. 성에는 문이 4개이고 암문이 있다. 정조 당시에 성을 개축할 때는 성의 둘레가 1800보였으며, 성벽은 외면이 장방형이나 방형이 되도록 다듬은 석재를 이용했다. 성벽은 안으로 약간의 기울기가 있도록 쌓아 매우 견고하게 축조가 되었다.

 

성안에 자리한 보적사에서 시작해 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황사가 심하게 낀 날이라고 하지만, 모처럼 맞은 따듯한 휴일이라 그런지, 성곽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세마대를 거쳐 동쪽으로 성벽을 밟고 걸어본다. 단단하게 쌓은 성벽에 돌출된 치가 보인다. 아마도 저 곳에 포루를 설치하고, 밀려드는 왜적을 향해 포를 쏘았을 것이다.

 

 

 

산성 주변을 모두 잡목을 제거하여 성벽이 훤히 보이도록 하였다. 3월의 봄바람이 시원하게 땀을 식힌다. 문지였을 것 같은 곳에는 성벽이 유난히 단단해 보인다. 뒷짐을 지고 걸어보는 독산성. 성벽 틈에 아래로 꺼진 곳, 그곳에 암문이 자리하고 있다. 적의 배후를 기습적으로 공격을 하거나, 적이 모르게 군수물자를 옮기기 위해 만든 문이다.

 

가파른 산비탈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아마도 저 곳에 수만 명의 가토가 이끄는 왜병들이 주둔을 했을 것이다. 독산성의 위치만으로도 오르기 힘든 곳이거늘, 거기다가 이렇게 견고한 성이 자리하고 있었다니. 왜병들도 이 성을 공략하기란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한 시간 남짓 돌아본 독산성. 옛날 옛적 교과서에서 배운 전설 같은 이야기를 기억하며, 산자락에 걸린 성을 뒤로한다.

김제 금산사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외국인들도 보인다. 10월 17일 김제 모악산 금산사에 개산대제가 열리는 날이다. 개산대제란 금산사가 처음으로 문을 연 날을 말한다. 절을 ‘산문’이라고 한다. 개산대제는 바로 절문을 처음으로 열었다는 뜻이 된다. 금산사의 개창일이 되는 셈이다.

금산사는 조선 성종 23년인 1492년에 작성된 <금산사 5층 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진표율사는 중건자로 보아야 한다.

금산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그 이유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보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날 금산사에 모인 인파는 5,000명 정도라고 한다. 아마도 절집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금산사 개산대제에는 언제나 그 정도의 인원이 모여, 부처님의 도량이 문을 열었음을 축하하는 것이다. 금산사 개산대제의 이모저모를 둘러본다.


개산대제를 거행하는 기념식장에는 외국인들도 보인다. 종교에는 벽이 없어서인지, 파란 눈의 외국인들도 개량한복을 똑같이 차려입고 많은 사람들이 참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행사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어섰다. 죽장자를 짚은 전 조계종 총무원장이신 월주 대종사께서 현 금산사 주지 원행스님과 많은 인파를 대동하고 식장으로 입장을 하고 계시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차를 받치고 입장을 한다. 그 뒤로는  쌀, 향, 꽃, 등, 과일, 차 등 공양물을 부처에 바치는 의식인 육법공양물을 손에 든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육법(六法)'이란 깨달음과 관련된 6가지 공양에 정신적인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다.

(1)등(보시) - 지혜의 등불이다. 등은 세상을 밝히는 광명 지혜인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2)향(지계) - 해탈의 향기이다. 향은 가려진 곳에도 향기를 두루 나눠 주는 공덕이 있다.
(3)꽃(인욕) - 보살 행의 아름다움이다. 열매가 맺기 위해서는
먼저 꽃을 피워야 한다.
(4)과일(정진) - 깨달음의 열매이다. 지극히 바른 도로써 성취 하겠다는 정진을 표현한다
(5)차(선정) -열반의 맛을 의미한다. 부처님께 올리는 차는 보통 차가 아니라 '감로차(甘露茶)'이다.
(6)쌀(지혜) - 깨달음의 기쁨이다. 봄부터 수많은 노력을 한 후
가을에 추수할 때의 기쁨을 상징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 손을 모으고 부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월주 대종사의 개산대제를 기념하는 법문으로 이어진다. 특히 이 날은 만등불사와 불자들이 법명을 받고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보살계'가 함께 이루어져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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